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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반과 경쟁, 운보와 우향 부부 ‘붓의 삶’

[변종필의 미술 대 미술] 부부화가의 살 김기창·박래현

2016.10.13 변종필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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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도 없고, 청력을 상실한 장애인에 가난뱅이, 유일하게 내세울 것이라고는 그림 잘 그리는 것 말고는 없는 남자. 현대사회의 결혼풍속도로 보면 최악의 조건에 해당하는 이런 남자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 여자가 있을까?

미래가 불투명한 화가에게 선뜻 자신의 미래를 맡기는 여자가 있다면 어떤 마음에서일까?

현실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영화나 드라마 속 설정이 아닌 70년 전 한국화단에서 일어났다.

1942년 어느 봄날의 운명 같은 만남

김기창은 1942년 봄, 박래현을 처음 만난 운명의 그 날을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볼 일이 있어 외출했다가 느지막이 집에 돌아왔다. 중문을 들어서는 내 눈앞에 마당 한복판이 환해 보였다. 가까이 가니까 ‘이거 꿈이 아닌가?’ 싶도록 아주 멋쟁이에 젊고 예쁜 여인이 산뜻한 흰 양장에 역시 흰 하이힐을 신고 단발한 모습으로 내 눈을 부시게 했다. 마당 가득히 환했다.”

김기창을 만났던 박래현 역시 그에게 받았던 강렬한 인상을 후일 이렇게 말했다.

“내 앞에는 거대한 검은 바윗덩어리 마냥 시꺼먼 체구가 버티고 있어 순간 그것에 부딪히게 되었다. 엉겁결에 뒤로 물러서면서 그 시꺼먼 바위덩어리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여기를 찾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김 선생은 하도 유명한 분이어서 적어도 칠십 노대가로 알고 찾아뵙고 인사 올리러 왔던 것인데, 이제 내 눈앞에 태산 마냥 버티고 선 우람한 체구, 얼굴은 젊고 패기가 가득 차 보이는 미남이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정신이 아찔했다.”(김기창 저 ‘나의 사랑과 예술’ 정우사, 1977. 인용)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부부화가로 명성을 떨친 운보(雲甫) 김기창(1914~2001)과 우향(雨鄕) 박래현(1920~1976)의 만남은 운명적이라고 밖에 달리 말하기 어렵다.

첫 만남 이후 서로에게 호감이 있었지만, 결혼까지는 힘든 상황이었다. 김기창이 당시 탁월한 예술적 재능으로 일찌감치 화가로 명성을 얻었다 해도 미래는 불투명했다.

무엇보다 청각장애로 원활한 대화를 할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결국 선택은 박래현의 몫이었다. 김기창은 박래현의 의사를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학력, 집안, 인물, 성격 등 무엇 하나 부족할 것이 없는 박래현이 악조건의 김기창과 결혼을 결심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어려움도 예술로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였다. 예술로 모든 것을 초월하여 소통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렇게 두 사람은 만나지 3년만인 1946년 박래현 집안의 거센 반대(어머니는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했다)를 이겨내고 결혼했다. 김기창 나이 34세, 박래현은 28세였다.  
 
“어떤 경우라도 간섭하지 맙시다”

김기창과 박래현은 인생에서는 동반자였지만, 예술에서는 경쟁자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경쟁은 일반적 경쟁과는 달랐다. 상대방을 이기기 위한 경쟁이 아니라 서로의 예술적 발전을 위해 격려하는 선의의 경쟁 관계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서로 발전적 협력을 했다는 것은 작품을 통해서 확인된다.

일반적으로 부부로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서로를 닮아가는 구석이 생긴다. 서로 다른 개성을 지녔다 해도 생활습관에서 한쪽이 상대방을 닮아간다.(희생하며 맞춰가는 경우도 포함)

김기창과 박래현 또한 서로를 닮은 부분이 있지만, 예술세계에서만큼은 달랐다.

두 사람의 경쟁은 철저하게 독립적인 자기세계의 탐구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어떤 경우라도 상대의 작품에 일절 간섭하지 않았다.

사실 결혼 당시 두 사람은 ‘서로 생활하다 성격상, 환경상 차이가 벌어질 경우 미련 없이 헤어져도 좋다’는 내용과 더불어 ‘각자 작품에 협조는 해도 간섭은 하지 않는다.’ 것을 결혼 조건으로 내세웠다.

개성이 강한 예술가가 부부로 살다보면 겪게 되는 갈등을 애초에 만들지 않겠다는 방어책이었다. 각자 화가로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야할 두 사람에게는 그 어떤 조건보다 중요한 문제였다.

두 사람의 작업실은 한 공간을 양분해서 사용했던 터라 자연스럽게 각자의 창작활동이 상대에게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의 작품이 개별성이 뚜렷하다는 것은 그만큼 독립적인 세계를 탐구할 수 있도록 서로를 배려했다는 방증이다.

성북동에서 작업 중인 김기창과 박래현.
성북동에서 작업 중인 김기창과 박래현.
 실제 1950년대 김기창과 박래현의 작품경향이 한때 비슷했던 시기에도 대상을 표현하는 시선과 형태감은 분명한 차이(김기창에 견주어 박래현은 인물을 수직적으로 늘림)가 있었다.

두 사람의 조형적 차이점은 미술평론가 오광수의 견해처럼 김기창은 필선이 중심이 된 구성적 경향이었고, 박래현은 면이 중심이 된 채색의 구성이었다. 이는 각자 독자적 조형세계를 구축하는 실질적 힘으로 작용했다.

김기창은 애초에 전통 한국화에 맥을 잇고 있었지만, 평생을 통해 새로운 조형적 탐구에 몰입했다.

당대 화가 중 조형적 변화의 스펙트럼이 넒은 화가로 손꼽힐 정도로 주제, 소재와 표현기법에서 하나의 틀에 머물지 않고 끝없는 변화를 모색했다.

‘청록산수’, ‘바보산수’ 등 예술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작품을 통해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고, 과감한 생략과 웅장한 크기의 추상작품을 통해 동양화의 표현범위를 확장했다.

김기창의 시기별 작품 : 위 1934/1953~55/1960~64/1967/1968. 아래1976/1987/1986/1993
김기창의 시기별 작품 : 위 1934/1953~55/1960~64/1967/1968. 아래1976/1987/1986/1993

새로운 조형적 탐구는 박래현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면에서 김기창보다 한층 뚜렷하고 자기색이 분명했다. 동시대 활동했던 여류화가 중 박래현만큼 실험적 시도로 자신만의 조형언어를 구축한 화가도 드물다.

이러한 특징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 ‘노점’ 연작이다.

박래현의 시기별 작품- 위1942/1953/1957/1959/1960 아래 1965/1968/1972/1972
박래현의 시기별 작품- 위1942/1953/1957/1959/1960 아래 1965/1968/1972/1972

특히 1956년에 제작한 <노점>(제5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대통령상 수상작)은 피카소가 이끈 입체파의 조형적 특징을 기본원리로 삼은 부분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고유한 자신만의 조형성을 지닌 그림이다.

즉, 입체파의 조형원리에 기댄 화풍이라기보다는 박래현의 진지한 조형성 탐구가 이뤄낸 결과물이다. 결혼 전 일본유학, 결혼 후 50세에 가까운 나이에 7년 동안 미국생활을 하면서 끝없는 조형적 도전을 지속했던 끈기와 노력으로 자신만의 내면세계를 작품으로 표출했다.

박래현 <노점> 1956년, 267×210cm, 국립현대미술관
박래현 <노점> 1956년, 267×210cm, 국립현대미술관
 김기창 박래현 부부가 한국미술사에서 차지하는 특별함이 전시경력에서도 찾을 수 있다.

두 사람은 결혼 후 하와이, 뉴욕, 워싱턴 등 해외전시를 포함해 <운보-우향 부부전>을 17회에 걸쳐 개최했다. 한국 미술사에서 연인관계가 아닌 부부가 화가로 활동하며 지속적인 작품활동을 펼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세계적으로 화명을 떨친 부부화가인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가 있지만, 김기창과 박래현처럼 부부전을 지속해서 개최한 경우는 미술사에서 유일하다. 박래현이 병(간암 말기)으로 갑작스럽게 타계하지 않았다면, 부부전의 신화는 지속되었을 것이다.

박래현의 죽음 이후 서너 달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세상을 잃은 듯 슬픔에 빠졌던 김기창은 어느 날 불현듯 다시 붓을 잡고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아내의 몫까지 온 힘을 기울여 창작활동에 매진하는 것만이 두 사람이 꿈꿨던 예술세계를 이뤄내는 길이라 여겼다. 홀로 남은 외로움과 고독을 이겨내는 것은 그림밖에 없었다.

김기창의 일제강점기 시절 친일적 성향은 논란의 대상이지만, 적어도 그의 삶과 작품은 온전하게 예술이라는 본질적인 탐구에 밀착해있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김기창과 박래현이 부부로 살면서 겪은 갈등이나 고뇌를 전부 언급할 수는 없지만, 30년간 동고동락하며 부부화가로 한국화단에 끼친 영향과 함께 이뤄낸 예술적 성과는 적지 않다.

“나는 귀가 들리지 않는 것을 불행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듣지 못한다는 느낌도 까마득히 잊을 정도로 지금까지 담담하게 살아왔습니다. 더구나 요즘같이 소음공해가 심한 환경에서는 늙어갈수록 조용함 속에서 내 예술에 정진할 수 있었다는 것을 오히려 다행이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다만 이미 고인이 된 아내의 목소리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게 유감스럽고 또 내 아이들과 친구들의 다정한 대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하는 것이 한(恨)이라면 한(恨)이지요.”

김기창이 박래현을 떠나보낸 후 남긴 어록에는 그의 고독했던 생의 단면이 담겨있다. 평생 귀가 아닌 마음으로 듣고,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해하려 했던 부부화가의 사랑과 예술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 참고문헌 및 추천도서 : 오광수저『김기창·박래현』 재원, 2003. 허나영 지음『화가 화가』은행나무, 2011. 김기창 저『나의 사랑과 예술』정우사, 1977.

 

변종필

◆ 변종필 미술평론가

문학박사로 2008년 미술평론가협회 미술평론공모에 당선, 200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에 당선됐다. 경희대 국제캠퍼스 객원교수, 박물관·미술관국고사업평가위원(2008~2014.2) 등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회원 겸 편집위원, ANCI연구소 부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학출강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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