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전자정부 누리집 로고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2024 정부 업무보고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 정부정책 사실은 이렇습니다 2024 정부 업무보고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 정부정책 사실은 이렇습니다

콘텐츠 영역

꽃향기 퍼지는 쇼팽의 생가에서 들려오는 ‘혁명’

[정태남의 클래식 여행] 폴란드/젤라조바 볼라

2017.08.22 정태남 건축사
인쇄 목록

내가 탄 비행기가 바르샤바의 쇼팽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공항 이름 ‘쇼팽’이 자꾸만 입에서 맴돈다. 전설은 만들어지고, 영웅은 태어난다. 전설이나 영웅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법. 피아노의 시인 프레데릭 쇼팽은 바로 그런 전설과 영웅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다.

폴란드가 낳은 가장 위대한 인물 쇼팽은 폴란드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런데 ‘쇼팽(Chopin)’은 폴란드 성(姓)이 아니라 프랑스 성(姓)이다. 폴란드의 ‘영웅’이 어떻게 해서 프랑스 성을 갖게 되었을까?

진한 그늘을 드리우는 나무 사이로 보이는 쇼팽의 두상과 쇼팽의 생가.
진한 그늘을 드리우는 나무 사이로 보이는 쇼팽의 두상과 쇼팽의 생가.

설레는 마음으로 쇼팽이 태어난 ‘성지’를 찾아가 보기 위해 바르샤바 중앙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쪽으로 약 50킬로미터를 달려 한적한 소하체프(Sochaczew) 역에 도착했다. 역 앞 광장에서 버스 편으로 약 8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작은 마을 젤라조바 볼라를 향해 시골길을 달렸다.

향기를 뿜는 꽃과 진한 그늘을 드리우는 나무와 숲 사이로 쇼팽이 태어난 집이 보였다. 깔끔하게 보존돼 있는 생가 주변에는 푸른 공원이 아주 넓게 펼쳐져 있다. 생가 뒤뜰에 세워진 쇼팽 기념상은 폴란드를 상징하는 빨간색과 흰색의 꽃으로 장식되어 있다.

정원에서는 야상곡, 마주르카, 폴로네즈, 연습곡 등 쇼팽의 음악이 은은하게 들려왔는데 그 중 <12개의 연습곡 Op.10> 중 12번째 곡 ‘혁명’이 유별나게도 나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쇼팽은 비록 조국을 떠났지만 조국을 잊지 못해 주체할 수 없이 터져 나오는 열정을 이 피아노 선율에 그대로 담은 듯하다.

쇼팽 생가 내부. 쇼팽은 이곳에서 태어나 7달을 보냈다.
쇼팽 생가 내부. 쇼팽은 이곳에서 태어나 7달을 보냈다.

쇼팽의 생가 안에 들어서니 먼저 가족의 초상화가 눈길을 끌었다. 나의 시선은 그의 아버지의 니콜라 쇼팽(1771~1844)의 얼굴에 오랫동안 고정되었다. 그는 프랑스 사람이었는데 어떤 연유로 폴란드까지 왔으며 또 이런 한적한 시골까지 왔을까?

그는 프랑스 낭시(Nancy) 근교의 작은 마을 출신이었다. 소년시절 그는 좀 더 넓은 세상에서 삶의 지평을 넓히고 싶었다. 마침 그 곳에 살던 폴란드 귀족의 집사 바이들리히가 폴란드로 돌아가자 16살의 니콜라도 그를 따라갔다.

한편 폴란드는 한때 동유럽의 대국이었으나 17세기 이후에는 쇠약해져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에 의해 세 차례에 걸쳐 분할되었는데 1795년 제3차 분할 때는 국토를 완전 상실하고 말았다. 이 무렵 폴란드에 살면서 자신을 폴란드 사람이라고 생각하던 니콜라는 폴란드 혁명군에 가담했으나 혁명군은 패퇴하고 말았다.

쇼팽과 그의 부모와 누이들 초상화. 그의 아버지 니콜라 쇼팽은 프랑스의 로렌지방 사람이었다.
쇼팽과 그의 부모와 누이들 초상화. 그의 아버지 니콜라 쇼팽은 프랑스의 로렌지방 사람이었다.

그 후 그는 일정한 일자리가 없어서 귀족의 ‘프랑스어 원어민 가정교사’를 하면서 생계를 꾸려갔다. 그러다가 1802년에 스카르벡 백작의 프랑스어 가정교사로 초빙되어 젤라조바 볼라로 오게 되었고 백작의 영지 안에 있는 이 집에서 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바이올린과 플루트를 즐겨 연주하곤 했는데 이 가문에서 일하던 유스티나(1782~1861)와 눈이 맞았다. 그녀는 노래와 피아노에 능숙했기 때문에 더욱 그녀에게 끌렸다. 두 사람은 1806년에 결혼해 1810년 3월 1일에 둘째 프레데릭 쇼팽을 낳았다.

뒤뜰에 세워진 쇼팽 기념상. 폴란드를 상징하는 빨간색과 흰색의 꽃으로 장식되어 있다.
뒤뜰에 세워진 쇼팽 기념상. 폴란드를 상징하는 빨간색과 흰색의 꽃으로 장식되어 있다.

일곱 달 후인 10월, 니콜라는 바르샤바의 고등학교의 프랑스어 교사가 되어 가족을 데리고 바르샤바로 이주하게 된다.

쇼팽은 음악이 있는 가정에서 성장해 바르샤바의 모든 사람들이 주목하는 놀라운 피아니스트가 되었는데 그 사이에 가끔 이곳을 찾아오기도 했다.

1830년 늦가을, 20세의 쇼팽은 청운의 꿈을 안고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해 11월 30일 바르샤바에서 반러시아 봉기가 발발했다는 소식을 빈에서 접하고는 반러시아 저항운동에 참가하기 위해 고국으로 되돌아가려고 했다. 그의 아버지 니콜라는 이를 말렸다.

저항운동이 1831년 9월에 러시아 군대에 의해 진압되고 오스트리아가 폴란드 사람들을 차별하기 시작하자 쇼팽은 고뇌와 비애를 품은 채 프랑스로 향했다. 그 사이에 그는 <12개의 연습곡 Op.10>을 모두 작곡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혁명’은 바르샤바 봉기 기간 중에 작곡된 것이다.

쇼팽은 20세에 폴란드를 떠나 19년 후에 프랑스 파리에서 삶을 마감할 때까지 그토록 그리던 조국 땅을 다시 밟지 못했다. 그것은 그의 아버지 니콜라가 그에게 총이 아니라 음악으로 조국에 충성하라고 한 말이 평생 마음 속 깊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정태남

◆ 정태남 건축사

이탈리아 건축사이며 범건축(BAUM architects)의 파트너이다. 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 미술, 언어, 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로마역사의 길을 걷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이탈리아 도시기행>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이전다음기사 영역

하단 배너 영역

지금 이 뉴스

추천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