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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되느냐 칭송받느냐 신념에 달렸다

[변종필의 미술 대 미술] 찬반의 기로에 선 공공미술품

2017.08.18 변종필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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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에서 새로운 건물이나 공간이 탄생하면 거기에 어울리는 공공미술품이 설치되곤 한다. 예술성이 높은 공공작품은 건물이나 장소를 대표하는 랜드마크 역할까지 한다.

그러나 모든 공공미술작품이 호응을 얻는 것은 아니다. 공공미술품이 공개되었을 때 작품에 관한 찬반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경우가 많다. 공공미술작품과 관련한 스캔들에는 누구나 아는 거장의 작품도 들어있다.

오귀스트 로댕 <발자크>, 1898년, 석고, 275×121×132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오귀스트 로댕 <발자크>, 1898년, 석고, 275×121×132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1891년, 프랑스 최고의 조각가로 명성을 쌓은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40~1917) 에게 조각품 제작의뢰가 들어왔다.

제작할 조각상은 오노레 드 발자크.(Honoré de Balzac, 1799~1850). 그의 사후 50년이 지나 프랑스 문인협회는 프랑스 문학에 큰 영향을 끼친 그를 기리는 기념조각상을 제작하기로 결정하고, 적합한 조각가를 물색했다. 이때 문인협회 회장이었던 에밀 졸라(Emile Zola, 1840~1902)의 강력한 추천으로 결정된 조각가가 로댕이다.

제작을 맡은 로댕은 발자크부터 연구했다. 습관, 옷차림, 자세, 얼굴표정 등 인물의 외형에 대한 탐구는 물론이고 생존해 있는 발자크 친구들을 인터뷰하며 그의 모든 것을 알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에 로댕의 탁월한 조형감각이 더해져 명작이 탄생할 거라는 기대가 컸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제작이 늦어졌다. 완성까지 예정한 3년보다 4년을 더한 7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몇 차례 실제크기의 석고 초벌을 공개했지만, 그때마다 문인협회는 흡족하지 않았다. 문인협회는 애가 탔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기왕에 늦어진 만큼 세상을 깜짝 놀랄 만한 명작의 탄생만을 기대했다.

1898년 4월 30일, 모두가 기다리던 순간이 왔다. 로댕이 7년간 고심하며 작업했던 작품이 공개되었다. 그런데 발자크 석고상이 전시되자 상황은 달라졌다. 예상했던 작품과 너무나 달라 문인협회 회원들은 허탈감을 느껴야 했다. 그리고 기대감은 실망과 분노로 바뀌었다. ‘이것은 조각이 아닌 눈사람이다’, ‘비를 맞아 녹아내린 큰 소금 덩어리다’, ‘장바구니다’, ‘환자복을 걸친 흰색 덩어리다’ 등의 로댕에게 모멸감을 주는 비난의 목소리가 들끓었다.

실제 사진 속 발자크상만 보면 당시 비판일색의 여론을 짐작할 만하다. 배가 나온 거대한 몸뚱이를 천(후드가 달린 수도사복장)하나로 감싸고 있는 형상이 부담스럽다. 심지어 미완성이란 느낌마저 준다. 가뜩이나 제작시일을 넘겨 지칠대로 지친 문인협회 회원들이 기대했던 위대한 발자크상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발자크상에 대한 비판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일이 겹쳤다. 당시 프랑스는 장교 드레퓌스 사건으로 정치사회적으로 극도의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드레퓌스의 무죄를 외치는 옹호자와 유죄를 주장하는 반대자로 양분되어 극렬한 대립이 이어졌다.

로댕의 친구들과 무죄를 외치는 옹호자들(로댕은 유죄를 주장하는 쪽이었다)은 스파이로 몰려 누명을 쓴 드레퓌스 대령과 문인협회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는 로댕의 불행을 비슷한 입장으로 해석했다.

그래서 발자크상을 공공장소에 세우기 위해 필요한 청동제작비를 모금하는 등 로댕을 위해 노력했다. 이 때 어느 예술품 수집가가 2만 프랑을 제시하며 발자크상의 구입의사를 밝히고, 벨기에의 브뤼셀 시는 발자크상을 설치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이러한 제안에 로댕은 고민했다. 하지만, 자신의 작품이 개인소장가의 소장품이 되거나 다른 나라에 보내지는 것은 싫었다. 로댕은 모든 제의를 거절했다. 문인협회에 발자크상 제작비를 돌려주고, 자신의 자존심과 작품을 지켰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1938년, 발자크상이 주문된지 47년이 흐른 어느 날, 바뱅-몽파르나스 사거리에 작품(청동 발자크상)이 설치됐다.

전라의 여인에 둘러싸인 남성

1869년 파리 오페라 극장 전면에 조각품 하나가 설치됐다. 전라의 여인들에 둘러싸인 남성(바커스)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춤추며 흥겨워하는 모습이 사실감 있게 표현된 군상이다.

조각을 제작한 작가는 환희로 가득한 조각상이 보는 이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할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정작 작품이 공개되자 오페라극장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졸작이라는 여론이 들끓었다.

술에 취해 음란하게 노는 남녀군상쯤으로 보았다. 보수 언론은 도덕과 윤리를 내세우며 이 조각상 <춤>을 과장되고 외설적인 형편없는 작품으로 내몰았다. 급기야 조각상을 보고 광분한 사람이 춤추는 여인상에 잉크병을 던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잉크를 뒤집어쓴 조각상은 또다시 논란거리가 되어 연일 비난의 대상이 됐다.

조각상을 제작한 장 바티스트 카르포(Jean-Baptiste Carpeaux, 1827~1875)에 대한 인신공격과 비판도 거셌다. 특히 종교 신문들은 카르포의 작품을 포르노로 취급했다. 우아하고 역동적인 동세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했던 카르포의 제작의도와 다르게 조각상 <춤>은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카르포의 뛰어난 조각술을 인정한 사람은 그에게 처음 조각상을 의뢰했던 오페라 극장의 설계자였던 샤를 가르니에(Charles Garnier, 1825~1898)뿐 이었다.

공공의 적이 돼버린 <춤>에 대한 비난이 수그러들지 않자 결국 나폴레옹 3세가 진화에 나섰다. 그는 조각상 철거를 명령했고, 카르포에게는 대중의 열망에 부합하는 외설적이지 않고 예의 있는 조각상으로 다시 제작하라고 했다. 그러나 카르포는 황제의 명령을 거절했다.

그렇게 <춤>은 철거되는 위기에 놓였고, 조각상 제작은 다른 조각가에게 맡겨졌다. 그런데 이 시기에서 뜻하지 않은 상황이 발생했다. 1870년, 프로이센 프랑스전쟁(프로이센을 중심으로 독일연방과 프랑스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 일어나면서 조각상 철거와 관련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으면서 조각 논쟁은 묻혀버렸다.

그리고 카르포의 작품은 본래의 자리에 그대로 놓이게 됐다. 19세기 자연주의 조각의 걸작 <춤>은 그렇게 철거 위기상황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현재 원작은 보존상 이유로 오르세미술관에 소장되었고, 파리오페라극장에는 폴 벨몽도의 모조품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장 바티스트 카르포, <춤>, 1869년, 대리석, 420×298×145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장 바티스트 카르포, <춤>, 1869년, 대리석, 420×298×145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로댕의 <발자크> 석고상과 카르포의 조각상 <춤>은 공개 당시 갖은 비난과 비판으로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비난을 당당히 이겨내고 시대를 뛰어넘는 예술작품으로 거론된다.

이러한 성과는 시련을 이겨낸 조각가의 불굴의지가 크게 작용했지만, 여기에는 두 조각가의 신념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있다.

로댕을 추천했던 에밀 졸라와 카르포의 재능을 인정하고 조각 제작을 맡긴 샤를 가르니에이다. 에밀 졸라와 샤를 가르니에는 로댕과 카르포의 예술성을 누구보다 인정했던 인물이다. 두 사람이 없었다면 이 두 걸작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백락일고(伯樂一顧:재능 있는 사람이 그 재능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 인정을 받는다는 의미)라는 고사성어처럼 시대를 막론하고 예술가가 자신의 능력을 알아주는 안목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행운이다.

그러나 그 행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유행이나 위협에 굴복하지 않는 예술가로서의 철학과 신념, 후원자 혹은 향유자로서 예술가와 예술적 가치에 대한 자신의 안목과 신뢰를 끝까지 지키는 것이다.

* 참고문헌(도판포함) : 엘레아 보슈롱&디안루텍스 지음, 박선영 옮김『스캔들미술관』시그마북스, 2014 / 피에르카반 지음, 최규석 옮김『명작스캔들Ⅲ』이숲, 2017.

변종필

◆ 변종필 미술평론가

문학박사로 2008년 미술평론가협회 미술평론공모 당선, 200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에 당선됐다. 경희대 국제캠퍼스 객원교수, 박물관·미술관국고사업평가위원(2008~2016), ANCI연구소 부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관장으로 재직 중이며 미술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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