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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와 대통령

2017.05.22 한기봉 국민대 초빙교수/언론중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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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계를 떠난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 말이 있다. 올챙이 견습기자 시절이다. 나는 대선배와 술을 마시다 당돌하게 “훌륭한 기자란 도대체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질문을 잘 하는 사람이다.”

우문현답이었다. 기자(記者)는 말 그대로 ‘쓰는 놈’인데, 잘 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잘 질문하는 것이구나. 선배의 촌철은 30년 동안 기자로서의 나를 따라다녔다. 그 말을 후배들에게 전수하면서 나는 나대로 하나를 덧붙이곤 했다. “훌륭한 기자란 누가 어느 분야의 전문가인지를 잘 아는 전문가”라고. 사건 사고는 예고가 없고 기자는 만물박사가 될 수 없으니까. 기자는 최고의 전문가를 빨리 찾아내서 끊임없이 묻고 또 물어 사태를 정리하고 본질을 밝힐 줄 알아야 한다. 특종은 그런 데서 나올 수 있다.

기자가 가진 가장 큰 특권 중 하나는 질문이다. 기자라는 이름으로 누구에게든 어디서든 무엇이든 질문할 수 있다. 대통령이든 전문가든 살인자든, 길에서든 술자리에서든 기자는 물을 수 있다. 취재 행위란 사실 질문의 연속이자 진실한 대답을 이끌어내는 노력이다. 대답을 회피하거나 침묵하는 취재원의 입을 열게 하는 노하우도 필요하지만, 그 대답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판단하는 직관, 숨기고 있는 진실을 끄집어내는 능력 또한 갖춰야 한다.

우리 언론은 한동안 대통령에게 질문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얼굴을 볼 수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청와대 춘추관(기자실) 풍경이 바뀌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처음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곳은 춘추관이었다. 대통령이 기자들 앞에 섰다. 총리와 국정원장, 비서실장 인선을 직접 발표했다.

익숙하지 않은 장면이었다. 기자들을 더 놀라게 한 건 그들을 대동하고 나와서 소신껏 발언할 기회를 주고, 이어 기자들에게 마음껏 질문을 하도록 한 것이다. TV에서나 보던 백악관 기자실 풍경이다. 모처럼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액세서리가 되지 않았다. 대통령 곁에 도열한 사람들도 허수아비가 되지 않았다. 질의응답의 각본도 없었다. 문 대통령은 그 후에도 인사 발표를 위해 춘추관에 왔다.
 
“기자에게 무례한 질문은 없다.” 
‘백악관의 전설’로 통하는 헬렌 토마스(1920~2013)가 한 말이다. 그녀는 89세까지 50년간 10명의 대통령을 취재한 최장수 백악관 출입기자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를 유명하게 만든 건 직설적인 질문 스타일이었다. 1991년 걸프전을 일으킨 조지 부시(아버지) 대통령에게는 “전쟁의 진짜 이유가 무엇인가? 석유인가? 이스라엘인가?”라고 돌직구를 날렸다.

그녀의 시원한 질문에 감동받은 국민들이 매일 그녀의 사무실로 장미꽃을 보내는 캠페인을 벌인 적도 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그가 세상을 떴을 때 “헬렌은 나를 포함해 미국의 대통령들에게 긴장의 끈을 놓지 않게 만들었다”는 애도 성명을 발표했다.
그녀가 남긴 다른 어록들이다.
“대통령에게 질문할 수 없는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다.”
“대통령에게 질문하지 않으면 대통령이 왕이 된다.”

언론 사상 가장 ‘무서운’ 인터뷰어로 통하는 이탈리아의 전설적 여기자 오리아나 팔라치(1929~2006). 권력자나 독재자에 대한 그녀의 질문은 결코 친절하지 않았다. 상대의 아픈 곳을 물어뜯어 결국 과오를 자백하게 만들거나 내면의 진실한 답을 끌어내는 전투 같은 스타일이었다. 그는 권력자의 천적이었다.
“권력자들은 자기를 영웅이라 착각한다. 그들을 발가벗기는 것이 기자가 할 일이다.”  
질문으로 먹고 사는 유일한 직업이 기자다. 기자에게 침묵은 직무유기다. 질문의 힘은 곧 언론의 힘이며, 그 힘은 국민이 위탁한 것이다. 그래서 기자에게 무례한 질문은 없다. 대통령의 유체이탈 화법은 물고 늘어져야 하며, 질문 기회를 주지 않고 돌아서는 등 뒤에 대고 “질문 있습니다”라고 외쳐야 하는 게 기자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섹스 스캔들 때 어떤 기자는 대통령에게 “르윈스키의 드레스에 묻은 액체는 대통령 것입니까?”라고 거침없이 물었다. 

문 대통령은 대국민 소통과 언론프렌들리(friendly)를 약속했다. 그 점에서는 전임자와는 완전히 다른 파격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사실 그게 파격이 아니며 정상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말한다. 언론프렌들리란 대통령이 기자들과 등산하고 단체 사진을 찍고 삼계탕을 먹으며 언론과 친밀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청와대도 잘 알 거라고 생각한다.

기자실에 자주 나타나서 마이크 앞에 서는 게 언론프렌들리다. 기자가 대통령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은 기자실이나 기자회견장이다. 기자의 질문은 국민의 궁금증을, 국민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주는, 민주주의가 위탁한 권리라는 걸 잊지 않는 게 언론프렌들리다. 아무리 싫고 곤혹스런 질문이라도 진실하게 대답하는 게 언론프렌들리다. 기자와 대통령은 친밀해질 수 없다. 친밀해져서도 안 된다. 권력자가 친밀해져야 하는 사람은 국민이다. 기자는 그 사이에 있을 뿐이다. 언론프렌들리는 국민프렌들리다.

한기봉

◆ 한기봉 국민대 초빙교수/언론중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언론보도로 피해를 본 사람과 언론사 간 분쟁을 조정하는 언론중재위원이며, 국민대 언론정보학부에서 글쓰기와 한국 언론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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