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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라밸, 좋은 거지만…

2018.03.14 한기봉 칼럼니스트/언론중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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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과 야망은 더 이상 젊음의 빛나는 훈장이 아닐까. 요즘 여러 기관이 일과 여가에 대한 젊은 세대의 가치관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대체로 ‘성공적 미래를 위해 일에 몰입하는 것보다 현재의 일상과 여유가 더 중요하다’는 취지의 대답이 그 반대보다 더 많다. (과장된 비유일지 모르지만) 마치 링에 오르기도 전에 글로브를 벗은 복서처럼.

그래서 그럴까. 너도 나도 ‘워라밸’ ‘워라밸’ 한다. ‘Work and Life Balance’, 즉 ‘일과 삶의 균형’이다. 이 신조어의 연원이 궁금해서 포털에서 찾아봤다. 2016년 7월의 어떤 기사에서 처음 검색됐다. 직장인들이 높은 연봉보다 야근이 없는 직장을 선호한다는 기사에서다. 이 단어가 널리 퍼진 건 결정적으로 서울대 소비자학과 김난도 교수의 ‘공’이다. 그가 펴낸 ‘트렌드코리아 2018’이라는 책에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 ‘가심비’(가격 대비 심리적 만족)라는 신조어와 함께 등장해 세 가지 모두 시대적 대세가 돼버렸다.

사실 워라밸은 영어를 축약한 신조어일 뿐, 없던 개념은 아니다. 대표적인 게 오래 전부터 우리 귀에 익숙한 ‘저녁이 있는 삶’이다. 워라밸이란 말이 워낙 회자되다보니 워라밸을 모르면 시대가치에 무지한 사람이고, 회사형 인간에 충실하게만 살아온 구닥다리 아재 취급을 받는다. 칼퇴를 하는 직원의 뒤통수를 흘낏 쳐다보지 말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드는 의문 한 가지가 있다. ‘일과 삶의 균형’은 정말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할까. 워라밸은 말 그대로 ‘밸런스’다. 일과 삶의 조화다. 그 기본 취지는 어느 한 쪽을 포기하자는 것도 아니고, 어느 쪽을 더 중시하자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워라밸을 외치는 젊은이들에게서는 이런 인식의 단면을 본다.
“직장이란 그저 최소한의 밥벌이를 위해 나가는 곳이고, 나 개인의 성장과 행복에는 별 관계가 없다. 일에 치이지 말고 정시에 출퇴근해서 외국어 학원에도 다니고, 취미생활이나 데이트나 여가를 즐기며 행복하자.”

개인의 행복한 삶과 일은 별개이며 그 두 가지 영역은 마치 제로섬 게임인 양 해석된다. 워라밸은 “일에서 해방되세요. 그래야 비로소 행복해집니다”라고 주문하는 것만 같다. 진정한 자기성장과 자아실현은 회사 문턱 밖에서 이뤄지는 것이라고.

워라밸 트렌드에 대해 문제의식을 제기한 사람의 책을 최근에 읽었다. 연세대학교 교육학과 장원섭 교수가 쓴 ‘다시, 장인이다’라는 책이다. 책의 부제는 ‘행복하게 일할 것인가. 불행하게 노동할 것인가’다. 장 교수는 ‘워라밸’을 재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워라밸의 취지는 이해하지만, 그건 엄밀히 말해서 ‘일과 삶의 균형’이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일인 삶’과 ‘일이 아닌 삶’ 간의 조화를 말하고 있다. 우리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일을 삶의 밖으로 내모는 것이다.”

그는 일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가져야 할 때라고 강조한다. 삶의 중심이 지나치게 일로 쏠린 불균형한 워커홀릭이 아니라, 일을 사랑하면서 그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를 발견하고 일의 리듬을 삶의 리듬으로 만들어가는 조화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먹고살기 위해 노동하는 게 아니라 일을 통해 자기 삶을 완성한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에 대한 인식이 미국인은 자아실현형, 일본인은 관계지향형, 프랑스인은 보람중시형인데 비해 한국인은 ‘생계수단형’으로 바라본 경향이 컸다고 한다. 저자는 오래 전부터 장인(丈人)과 장인 정신을 강조해온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바로 ‘현대적 장인’이라고 말한다. 행복이란 결국 재미와 보람일 터인데, 장인은 일의 즐거움을 통해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일에서 진정 해방되는 길은 일에서 도망치는 게 아니라 일 자체의 즐거움을 통해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일과 삶의 균형’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자본주의 무한경쟁사회에서 그건 쌍무지개를 잡는 것처럼 사실 요원해 보인다. ‘균형’이란 말에는 숨겨진 함정이 있다. 무언가를 더 얻거나 그것에 시간을 할애하고자 한다면 그만큼 다른 무언가는 희생돼야 한다. 또 하나는 우리 삶의 중요한 가치들이 서로 대립한다는 가정에서 그 ‘균형론’이 출발한다는 것이다. 자아실현, 가정과 가족, 공동체, 친구, 취미, 여가 같은 가치들은 노동과 대척점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기실 일과 삶의 ‘균형’이 아니라 일과 삶의 ‘통합’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과 가족, 공동체, 자아를 모두 고양하는 것이다. 그 둘의 통합이란 내 일에 다른 가치들이 어떻게 연계되고 무슨 의미를 갖는지를 탐색하고 성찰하고 연결하도록 노력하는 자세다.

주당 법정 근로시간을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줄이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최근 국회를 통과했다. 근로자의 총수입은 줄 수도 있지만 워라밸을 누릴 수 있는 사회 여건은 좋아졌다. 오늘도 워라밸 기사가 보도된 걸 봤다. 신제품 홍보에는 ‘당신의 워라밸을 책임집니다’라는 식의 문구가 단골로 들어간다. 어떤 어떤 대기업들이 시대적 추세에 맞춰 직원의 근무여건과 복지를 크게 개선했다는 홍보성 뉴스도 읽었다. 제목에는 어김없이 워라밸이다. 그건 그냥 세일즈의 수단이고 복지제도 개선일 뿐이다. 요즘 워라밸이란 말이 너무 마케팅된다. 워라밸이 진지한 성찰 없이 감성적으로 소비만 되고 있다는 인상이 드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한기봉

◆ 한기봉 칼럼니스트/언론중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에서 글쓰기와 한국 언론에 대해 강의했다. 언론보도로 피해를 본 사람과 언론사 간 분쟁을 조정하는 언론중재위원이며, 이 곳 저 곳에 글을 쓰고 있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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