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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늪에서 예술을 꽃피운 두 여류화가

[변종필의 미술 대 미술] ⑦ 까미유 끌로델 VS 프리다 칼로

2014.08.27 변종필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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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위대한 여성작가로 평가받는 까미유 끌로델과 프리다 칼로.

두 사람의 예술은 불행에서 탄생했다. 까미유 끌로델(1864~1943)과 프리다 칼로(1907~1954)는 둘 다 빼어난 외모를 지녔지만, 신체적으로는 장애가 있었다.

프리다는 여섯 살에 앓았던 척수성 소아마비로 평생 오른쪽 다리가 불편했고, 18살에 겪은 교통사고로 살아생전 32번의 수술을 받는 등 육체적 고통에 시달렸다.

까미유 역시 어린시절 앓은 질병 때문에 한쪽 다리를 절었다. ‘누가 더 불행했을까’라는 주제 말고는 비교대상이 없을 것 같은 두 여성의 삶과 예술을 들여다본다.  

◇ 태생적 불행, 사랑과 배반의 삶

까미유는 불행을 안고 태어났다.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지만, 그녀 앞에는 생후 2주일 만에 죽은 오빠가 있었다. 오빠의 죽음 이후 태어난 까미유는 아들을 바랬던 어머니에게는 절망감을 안겨준 대상이 되었다.

아버지의 극진한 보살핌이 있었지만, 어머니의 냉대와 질시는 모녀지간이 아닌 원수지간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적대적이었다. 아버지가 죽은 직후 어머니에 의해 강제로 정신병원에 갇혀, 30년 동안 고립된 채 살았다.

까미유 끌로델의 사진. 20세, 71세 때 모습이다.
까미유 끌로델의 사진. 각각 20세, 71세 때 모습이다.

어머니와 더불어 까미유의 삶과 예술을 송두리째 지배한 또 한 명은 프랑스 최고의 조각가 오귀스트 르네 로댕(1840~1917)이었다.

그녀 나이 열 아홉살 때 스물 네 살 연상인 로댕과 만났다. 서로에게 마음을 뺏긴 두 사람은 사회의 냉대에도 불구하고 사랑했다. 로댕은 까미유의 천재적 기질을 보고, 편견과 보수성이 강한 프랑스 화단에서 그녀가 조각가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물질적, 정신적 지원을 해주었다.

까미유 역시 로댕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였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 보다 로댕의 작품에 창조적 영감을 불어넣는 뮤즈의 역할에 시간과 열정을 쏟았다. 로댕의 명작인 <지옥의 문>과 <키스> 등 많은 명작이 그녀의 영감에 도움을 받은 작품이다.

역동적이고 거칠었던 로댕의 조각이 여성적 부드러움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까미유의 덕분이다. 까미유는 거듭된 낙태에도 사랑을 믿었고, 로댕의 아류라는 미술계의 비판에도 당당히 견뎌냈다.

그러나 로댕은 달랐다. 그는 사랑과 예술에서 실리만을 추구하는 이기주의자였다. 20년을 내조해온 실질적 아내(결혼을 하지 않음)를 저버릴 수 없다는 이유로 결국 까미유를 남의 남자를 가로챈 파렴치한 여자로 지탄받게 했고, 까미유와 결별한 후에는 까미유가 조각가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방해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취했다.

로댕을 조각 역사상 최고의 천재 조각가로 평가하면서 동시에 한 사람의 천재 여성조각가를 망친 인물로 평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까미유 끌로드의 작품. 왼쪽부터 <비상하는신,1894, 브론즈>,<왈츠,1895, 브론즈>,<플롯을 부는 여인 1905 브론즈>
까미유 끌로드의 작품. 왼쪽부터 <비상하는신,1894, 브론즈>,<왈츠,1895, 브론즈>,<플롯을 부는 여인 1905 브론즈>

까미유는 로댕과 결별 후 열정과 인내로 창작에 몰입해 찬사를 받기도 했지만, 결국 우울증과 로댕에 대한 피해의식으로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다. 자신을 억제하지 못한 채 작품을 파괴하며 스스로 파멸을 재촉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사랑과 예술을 잃고, 어머니와 가족에게조차 철저히 버림받았던 까미유의 삶은 끝내 불행의 터널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 육체적 고통을 작품으로 승화

프리다 칼로의 모든 불행은 신체장애에서 시작되었다. 어릴적 앓았던 소아마비와 끔찍한 사고로 겪은 육체적 고통은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장래희망이 의사에서 화가로 바뀐 것은 1년 가까이 척추 교정용 코르셋을 착용하고 병원에서 생활하는 동안 육체적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시작한 그림 때문이었다. <벨벳 드레스를 입은 자화상>이 그때 그려진 그림이다.

프리다가 자신의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디에고 리베라(1886~1957)를 만난 것은 1921년 개혁의 바람이 불던 때였다. 파리생활을 정리하고 고국으로 돌아와 벽화를 제작하던 디에고는 프리다를 만나 그녀의 예술적 재능과 여성적 매력에 매료되었다.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예술에 대한 공감이 결혼으로 이어진 것은 프리다가 22살, 디에고 나이 43살 때였다. 당시 디에고는 세 번째 결혼이었다.

디에고는 프리다의 창작활동에 많은 도움과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프리다의 여동생과 불륜을 저지르는 등 타고난 바람둥이 기질을 절제하지 못한 여성관계로 번번이 프리다에게 정신적 상처를 주었다.

무엇보다 프리다는 유산을 거듭하며 아이를 갖지 못해 우울증과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극에 달했다. <헨리포드 병원>, <프리다와 유산>의 작품은 당시 프리다의 고통을 담은 고백적 그림들이다.

끝내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그녀는 인형을 아이처럼 사랑하는 집착을 보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고,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9개월 동안 강철 척추 교정용 코르셋을 착용하고, 일곱 번째 척추 수술을 받는 등 견디기 힘든 육체적 고통이 끊이지 않았다.

프리다 칼로의 작품. 왼쪽부터 <헨리포드 병원,1932,알루미늄판에 유채>,<나와 나의인형,1937, 금속판에 유채>
프리다 칼로의 작품. 왼쪽부터 <헨리포드 병원,1932,알루미늄판에 유채>,<나와 나의인형,1937, 금속판에 유채>
 

지독한 고통 속에서도 창작이 그녀가 살아가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녀의 열정에 감동한 디에고의 배려로 46살에 <회고 전시회>가 열렸다. 개막식 날 프리다가 침대에 실린 채 참석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나 전시 이후 급격한 건강악화로 오른쪽 다리 무릎 아래를 절단하는 고통을 다시 겪었다. 더 이상 삶을 지탱하고픈 의지를 상실한 그녀는 자살까지 시도했다.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난 어느 날 다수의 미완성을 남긴 채 그토록 힘겨웠던 삶의 끈을 놓았다. 

◇ 절망의 늪에서 피어낸 예술

까미유와 프리다의 예술적 가치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조명되기 시작했다. 까미유의 뛰어난 예술성이 로댕의 그림자와 프랑스 미술계의 조롱에서 벗어나 온전하게 평가받기 시작한 것은 까미유가 죽고 난후 30년이 흐른 뒤였다.

사랑과 분노를 동시에 품고 살았던 까미유의 불행한 삶은 남겨진 작품들을 통해 조금씩 보상받고 있다. <사쿤탈라>, <비상하는 신>,<왈츠>, <중년>, <수다쟁이들>, <파도>, <운명>, <플룻을 부는 여인>등 그가 남긴 작품에는 로댕과 다른 까미유 조각만의 아름다움이 충만하다.

까미유 끌로델, <수다쟁이, 1897, 대리석>, <파도, 1898, 대리석>
까미유 끌로델, <수다쟁이, 1897, 대리석>, <파도, 1898, 대리석>

까미유와 다르게 프리다는 자신의 불행을 작품으로 승화하여 당대 이미 많은 관심을 받고, 작가로서 위치를 돈독히 했다. 그녀는 초현실주의 거장인 앙드레 브르통에 찬사를 받고 주요한 초현실주의 전시에 출품하는 등 폭넓은 활동으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프리다는 사후에 조금씩 잊혀지는 화가가 되었다. 만약, 1970년 중반 세계적으로 일어난 페미니즘 미술 운동이 아니었다면 두 여성 예술가의 부활은 없었을지 모른다.

평생 불행이라는 외투를 입고 살았던 두 사람. 프리다는 47세에 폐렴으로 생을 마감했다. 인생의 절반을 병원신세를 졌던 고통을 죽음으로 비로소 끝낼 수 있었다.

프리다 칼로 <희망의 나무여 우뚝 솟아라, 1946, 캔버스에 유채>
프리다 칼로 <희망의 나무여 우뚝 솟아라, 1946, 캔버스에 유채>

‘행복한 퇴장이길,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은 그녀가 남긴 일기장의 마지막 글귀였다.

까미유는 79세로 장수했다. 그러나 49세에 어머니의 의해 정신병원에 강제 수용된 후 30년 동안 단 한번도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외롭게 생을 마감했다는 점에서 까미유의 삶은 사실상 병원에 이송되던 1913년 3월 10일에 끝난 셈이다. 실제 정신병원에서의 30년 행적은 누구에게도 알려진 바 없다.

시대적 냉대와 성차별이 극심한 불합리한 시대에서 불행, 우울, 좌절 등을 오직 작업으로 승화시켰던 두 여인의 예술은 절망의 늪에서 피워낸 숭고한 꽃이었다.

변종필

◆ 변종필 미술평론가

문학박사로 2008년 미술평론가협회 미술평론공모에 당선, 200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에 당선됐다. 경희대 국제캠퍼스 객원교수, 박물관·미술관국고사업평가위원(2008~2014.2) 등을 역임했다. 현재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장,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회원 겸 편집위원, ANCI연구소 부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학출강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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