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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운드의 미생(未生)들을 위하여

[김한석기자의 스포츠 공감] 시상식의 계절에 새기는 ‘완생’의 의미

2014.12.11 김한석 스포츠Q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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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未生)’ 열풍이 거세다.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 바둑에서 미생이라고 부른다.

윤태호 작가의 동명 샐러리맨 웹툰을 원작으로 한 케이블방송의 드라마 ‘미생’은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화상으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자기성찰을 통해 단순한 생존이 아닌 완생(完生)의 의미도 되새기게 한다.

바둑이 인생의 모든 것이었던 청년 장그래를 보면서 “나도 그래” 하고 공감한다. 프로 입단에 실패한 뒤 목표를 잃고 기술도 스펙도 없는 비정규직으로 냉혹한 직장 현실에 내던져졌지만 바둑에서 얻은 통찰을 단서로 문제의 실마리를 하나씩 풀어가면서 성장해나간다.

모두들 “그래”야만 한다는 당위에 대해 조용한 목소리로 거꾸로 되묻는다. 역발상으로 성취도 얻는다. 부단히 노력하는 마이너리티. 그러나 여전히 옥죄는 불안한 신분과 자신에게는 문이 열리지 않는 차가운 현실. 장그래는 외친다.

“죽을만큼 열심히 하면 나도 가능한 겁니까?”

스포츠에서만큼은 답이 가능하다. “그래”하고.

바둑에서 돌들이 두 집을 이뤄야 완생이다. 그러지 못하면 미생이나 죽은 돌, 즉 사석(死石)이 된다. 한 집 이하만 나면 미생이다. 미생은 아직 살아 있지는 못해도 생존 여력이 있는 돌. 사석과 엄연히 구분되는 희망의 돌이다.

스포츠에서 한 시즌을 한 판의 바둑이라고 할 때 미생들은 자신의 가치를 높여야 한다.

감독은 상대와 수싸움을 통해 경쟁력 있는 미생들만 살린다. 위기 상황이 되면 사석작전이라고 해서 미생들을 희생시키고 반대 급부의 실리나 명분을 챙긴다. 이 작전에 희생되는 돌들은 팀을 위해 헌신하는 가치를 인정받는다.

존재감이 없으면 집을 늘려가는데 중요한 요석(要石)이 되지 못한채 바로 버려진다. 선수들이 요석이 되고자 분투하는 이유다.

스포츠 시즌이 끝나고 시상식의 계절이다. 한 시즌 땀 흘린 보람을 평가받는 축제들이 이어진다. 최우수선수나 각 포지션별 으뜸상, 성취나 재기 등 전문적인 부분의 특별한 상들은 저마다 수상자들의 완생을 공인해준다.

서건창. 프로야구의 미생이다.

서건창 선수가 지난달 18일 서울 양재동 더K호텔에서 열린 ‘2014 프로야구 MVP, 최우수 신인선수 및 각 부문별 시상식’에서 MVP를 수상한 뒤 소감을 말하고 있다.(사진=저작권자(c)연합뉴스.무단전재-재배포금지)
서건창 선수가 지난달 18일 서울 양재동 더K호텔에서 열린 ‘2014 프로야구 MVP, 최우수 신인선수 및 각 부문별 시상식’에서 MVP를 수상한 뒤 소감을 말하고 있다.(사진=저작권자(c)연합뉴스.무단전재-재배포금지)

신고선수 신화를 쓰며 프로야구 최우수선수에 오른 뒤 연말 각종 시상식 대상을 휩쓸고 있다. 넥센의 리드오프로 정규시즌 전 경기 출장, 전인미답의 200안타 돌파 등의 활약으로 완생을 인정받았다. 인천 아시안게임 대표 탈락의 시련도 있었지만 2012년 신인왕에 이어 MVP까지 오르는 인간승리의 드라마를 썼다.

장그래만큼 암울한 현실에 맞서 싸운 비주류의 도전이 열매 맺은 것이어서 더없이 감동을 준다.

특출한 장기가 없어 프로 구단으로부터 외면 받는다. 고생하는 홀어머니와 여동생을 위해 명문대 스카우트 제의를 뿌리치고 LG 신고선수(연습생)의 길을 택한다.

단 한 번 찾아온 기회. 삼진으로 돌아선 뒤 방출된다. 현역병으로 방망이 대신 소총을 잡고도 이미지트레이닝으로 앞날을 그린다.

2011년 말 넥센의 공개테스트에 도전해 유일하게 합격한다. 이듬해 개막전에서 찾아온 기회를 이번엔 놓치지 않고 드라이브를 건다. 신인왕으로 햇살을 맞는다.

지난해 ‘소포모어(2년차) 징크스’에 부상까지 겹친다. 연구를 거듭해 자기만의 배꼽타격으로 변신한다. 그 승부수로 프로야구 새역사까지 쓴다.

서건창은 여전히 미생을 자처한다. 정규시즌 시상식에서 약속했다.

“백척간두진일보라는 말처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한 단계 더 나아지는 선수가 되겠다. 내년에도 내 자신을 속이지 않고 팬들을 흥분시키는 게임메이커가 되겠다.”

비주류로 겪은 시련 속에서 얻은 통찰이 묻어난다. “작은 것 하나부터 실패를 통해 깨달음을 얻고, 깨달음을 통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자기다짐이다.

김병지. 서건창보다 19세 많은 프로축구 최고령 선수이지만 여전히 미생의 도전을 이어간다.

고교 1년 때 성장을 멈춰 장갑을 벗는다. 그 뒤 2년 동안 20cm가 훌쩍 자라 뒤늦게 전학을 통해 골키퍼의 꿈을 이어가려 했지만 진학에 실패한다.

창원의 전자공장에 취직한다. 꿈을 잃지 않고 테스트를 거쳐 상무에 입단한 최초의 선수가 된다. 순발력 하나가 울산현대 차범근 감독의 눈에 들어 연습생으로 출발해 어느덧 스물세겹의 나이테를 쌓았다.

김병지 선수가 1일 서울 홍은동 그랜드힐튼호텔에서 열린 ‘2014 현대 오일뱅크 K리그 대상 시상식’에서 슈틸리케 축구대표팀 감독에게 특별상을 받고 있다.(사진=저작권자(c)연합뉴스.무단전재-재배포금지)
김병지 선수가 1일 서울 홍은동 그랜드힐튼호텔에서 열린 ‘2014 현대 오일뱅크 K리그 대상 시상식’에서 슈틸리케 축구대표팀 감독에게 특별상을 받고 있다.(사진=저작권자(c)연합뉴스.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드리블 돌출행동으로 히딩크 감독의 눈밖에 나서 2002월드컵 4강신화의 현장은 함께 지켰지만 끝내 골문은 지키지 못한 아픈 응어리도, 2008년 허리디스크 수술로 맞은 은퇴 위기도 모두 넘기고 지난달 22일 44세 7개월 14일로 최고령 출전 신기록을 세운다.

올시즌 전 경기에 출전한 김병지는 K리그 시상식에서 특별상을 받은 뒤 “남들은 기량이 떨어져 쫓겨나는데, 그만두고 아니고를 선택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오직 실력이 있는 자가 살아남는 시대에 이는 상당한 축복”이라며 “2~3년은 더 뛸 수 있다”고 했다.

철저한 자기관리로 경쟁력을 잃지 않고 골문을 지킬 때마다 최다 출전기록을 새로 쓰고 있는 베테랑은 내년에도 700경기 출장을 향해 미생으로 돌아간다. 주위에서 은퇴를 얘기해도 매년 초심을 잃지 않았던 것처럼.

경쟁은 치열해지고 환경은 어려워지고, 아무리 노력해도 뜻대로 나아가기가 쉽지 않은 세상이다.

살아남는 돌만이 성공은 아니다. 모두가 요석이 될 수도 없고, 모두가 완생할 수 없다면 존재가치를 높여 사석작전에도 헌신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쓸모있음에 자긍을 갖는 것 말이다.

위태로움을 늘 인식하면서 자기만의 경쟁력을 길러 연습생 신화를 써가는 두 스포츠 스타의 항상심과 절실한 실천력이야말로 그라운드의 미생들을 일깨우는 덕목이다. 장그래가 존경하는 영웅 이창호 9단이 전하는 깨우침이 있다.

“노력을 이기는 재능은 없고, 노력을 외면하는 결과도 없다.”

김한석

◆ 김한석 스포츠기자

스포츠서울에서 체육부 기자, 체육부장을 거쳐 편집국장을 지냈다. 스포츠Q 창간멤버로 스포츠저널 데스크를 맡고 있다. 전 대한체육회 홍보위원이었으며 FIFA-발롱도르 ‘올해의 선수’ 선정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21회 이길용 체육기자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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