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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직시하는 치열한 예술정신을 담은 두 자화상

[변종필의 미술 대 미술] 푸생과 이쾌대

2015.08.31 변종필 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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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는 고대 이후 수많은 철학자가 반복적으로 제기해온 자아의 진정한 본성, 이른바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시각적으로 해답을 구해온 대표 장르이다.

사실상 미술과 인간의 정체성 관계는 미술사에서 한순간도 이탈한 적이 없다. 세계미술을 이끈 화가들이 자신의 자화상을 그린 것은 궁극에 현실 속 자신의 존재적 의미에 대한 물음과 직결된다.

17세기 프랑스 바로크 미술을 이끈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과 한국미술사에서 화가로서 역량과 미술사적 위상을 재평가 받는 이쾌대(李快大, 1913∼1965)는 시대와 환경은 다르지만, 자화상에 자신의 뚜렷한 예술관을 표현한 작가로 비교할만하다.

뛰어난 데생과 엄격한 형태의 완결성을 바탕으로 인간의 감성보다 이성적 사유를 끌어내는 데 초점을 두었던 두 화가의 자화상은 시공간을 넘어 풍부한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푸생<자화상> 1650. Oil on canvas, 98x74 cm. Musee du Louvre, Paris / 이쾌대<두루마기 입은 자화상> 1940년대. Oil on canvas, 72x60cm. 개인소장.
푸생<자화상> 1650. Oil on canvas, 98x74 cm. Musee du Louvre, Paris / 이쾌대<두루마기 입은 자화상> 1940년대. Oil on canvas, 72x60cm. 개인소장.

푸생의 <자화상>그림부터 보자. 푸생이 56세에 그린 자화상(오른손 위로 보이는 배경에 ‘1650년 로마에서 그린 레 잔드리 출신 화가 니콜라 푸생의 56세 초상’이라는 화제가 적혀있음)에는 평생 추구해온 예술세계의 정신이 담겨있다.

그림을 보면, 일단 화면 속의 모습이 어딘지 화가처럼 보이지 않는다. 웃음기 없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표정과 학자풍의 의상이 법관 같은 위엄을 풍긴다. 자기 생각대로 한 치의 오차 없이 행동에 옮기는 원칙주의자 같다.

화면 구성도 일반적 초상화와 다르다. 수직과 수평으로 배경을 나눴다. 직선의 기하학적 구성이 깐깐하고 고지식해 보이는 인물의 성격과 어울린다.

화가의 의도가 느껴지는 이미지들도 있다. ‘반지’, ‘리본으로 묶은 책자’, ‘왕관 쓴 여인초상’ 등을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세계를 암시하는 소재로 선택했다. ‘반지’는 고대 그리스 스토아철학자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붓 대신 잡고 있는 ‘리본으로 묶은 책’과 함께 예술은 감성보다 이성이 중요함을 표출하고 있다.

그리고 ‘왕관 쓴 여인’의 그림으로 회화가 다른 장르보다 가치 있고, 우월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푸생의 자화상에서는 그가 지향하는 예술철학이 반영된 이미지들로 채워져 있다.

그렇다면 이쾌대의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은 어떨까. 인상부터 예사롭지 않다. 1940년대 중후반에 그린 것으로 알려진 그림으로 한없이 평화로워 보이는 시골을 배경으로 두루마기를 입고, 붓과 팔레트를 들고 서 있는 화가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화가의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옷차림이 어색하고, 자세는 어딘지 경직되어 보인다.

그런데도 뚜렷한 이목구비(진한 눈썹, 부리부리한 눈, 꽉 다문 입술)로 정면을 응시하는 표정에는 형언하기 힘든 진지함이 묻어난다. 해방 직후 혼란의 시대에 화가의 길을 걷는 자신의 앞날을 긍정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화가로서 추구해야 할 예술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굳게 결의하는 듯하다.

이는 그림 속의 여러 요소에서 감지된다. ‘서양식 중절모와 한국전통의 두루마기’, ‘유화물감과 동양화 모필’ 식으로 동서양의 문화의 차이를 이질감 없이 표현했다.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그림 전반에 한국적 정서를 짙게 가미했다.

풍경은 인물묘사와 다르게 적절한 생략과 자유로운 필치가 혼용되었다. ‘바람에 날려 벌어진 듯한 두루마기, 배경 속 물건을 이고 가는 아낙네들, 생명력을 담은 논과 밭, 꿈틀대며 피어오른 구름’ 등 그림 전체가 충천한 생기와 회화적 맛으로 가득하다.

이처럼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에는 격변의 시대에 화가의 역할을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실천하고자 했던 작가의 투철한 예술정신이 깃들어 있다.

두 화가는 유학에서 깨우친 예술의 모든 것을 고국의 미술에 적용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공통점이 있다. 푸생은 로마에서 활동하던 중 프랑스 고전주의 부활을 위해 루이 13세의 부름을 받고 고국으로 돌아와 궁정화가가 될 정도로 프랑스 미술계에 자신의 예술론을 곤곤히 세웠다.

이러한 변화는 프랑스미술계의 현실을 냉철하게 평가한 그의 비판의식이 밑바탕이 되었다. 프랑스 출신이면서도 프랑스인의 미술적 안목과 취향의 천박함을 솔직하게 꼬집고, 대중들의 교양과 취향을 고양시킬 수 있는 주제를 그림으로 그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계미술의 중심이었던 로마의 예술처럼 형태는 명확하고, 빛의 효과를 최대한 살린 조형감각을 중시했다. 무엇보다 그림은 단순히 눈을 만족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쾌대는 일본유학 시절 서양미술의 여러 장르를 습득하면서부터 한국적인 서양화법을 모색하는데 주력했다. 무엇보다 한국인의 정서와 시대를 담은 민족미술을 실현하고자 했다.

조선의 전통을 소재로 자신만의 회화적 구성을 탐구하고, 당대에는 찾아보기 힘든 장대한 스케일로 자신의 예술세계를 펼치는데 주력했다. 특유의 서사적 구조로 서슴없이 사회를 비판하고, 대중을 깨우치는 작품이 핵심을 이뤘다.

푸생, <Bacchanal before a Statue of Pan>1631-33, Oil on canvas, 100x142,5cm, National Gallery, London / 이쾌대. <군상1 - 해방고지> 1948,Oil on canvas, 181x222.5cm, 개인소장
푸생, 1631-33, Oil on canvas, 100x142,5cm, National Gallery, London / 이쾌대. <군상1 - 해방고지> 1948,Oil on canvas, 181x222.5cm, 개인소장

두 화가의 화풍은 예시한 위 그림에서 드러나듯 인물표현의 엄격한 데생, 역동적인 동세, 인물들의 중첩구성 등에서 유사한 점이 느껴진다.

그러나 내용적 측면에서 푸생이 신화와 같은 이상세계를 주제로 삼았다면, 이쾌대는 현실을 직시한 시대상황을 특유의 필치와 인물구성, 정확한 인체묘사(이쾌대는 직접 글과 그림으로 상세한 인체해부학노트를 만들만큼 인체의 사실적 표현에 심취함)로 담아냈다. 예컨대 이쾌대의 대표작인 <군상>연작을 보면 왜 그가 ‘리얼리즘 회화의 거장’으로 불리는지 이해할 만하다.

푸생은 리슐리외 추기경, 우리바누스 3세, 루이 13세 등 자신의 절대적 후원자들의 죽음과 프랑스 화단의 질시와 배척이 겹치면서 프랑스에 정착하지 못하고 로마로 돌아가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로마에서 이룬 화가로서 위상과 17세기 프랑스 고전주의적 바로크 양식을 정착시킨 공로에 대한 평가는 시간이 지날수록 높아졌다. 오늘날 그를 ‘프랑스 회화의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미술사에서 높아진 위상과 무관하지 않다.

변혁의 시대에 한국인의 정서에 바탕을 둔 동서양미술의 융합을 시도하고, 화가의 역할을 강조했던 이쾌대의 노력은 남북 간의 대립과 이데올로기의 갈등에서 월북을 선택함으로써 끝나고 말았다. 가족이 기다리는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북한에서 비운의 생을 마감했다.

화면구성, 그림스케일, 주제의식 등에서 누구보다 독자적인 자기 세계를 구축했던 이쾌대. 그의 예술작품이 오랫동안 대중과 단절되었던 아픈 시간이 있었지만, 그가 남긴 많은 작품은 이데올로기를 뛰어넘어 한국근대미술사에서 서양미술의 여러 양식을 가장 폭넓게 습득하고 구사한 뛰어난 화가임을 느끼게 해준다.

변종필

◆ 변종필 미술평론가

문학박사로 2008년 미술평론가협회 미술평론공모에 당선, 200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에 당선됐다. 경희대 국제캠퍼스 객원교수, 박물관·미술관국고사업평가위원(2008~2014.2) 등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회원 겸 편집위원, ANCI연구소 부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학출강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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