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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보다 해몽? 특별한 제목으로 걸작이 된 작품들

[변종필의 미술 대 미술] 로댕의 ‘대성당’ VS 마욜의 ‘지중해’

2015.11.30 변종필 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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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를 들춰보면 미술작품과 제목이 일치하지 않아 제목이 잘못 붙여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작품들이 있다.

특히 현대미술 작품은 제목이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가늠하는 결정적 요소가 되기도 한다. 이미지만으로 누구나 인지할 수 있는 제목이 아닌 전혀 생각하지 못한 단어나 문장으로 단순해 보이던 작품이 심오한 의미를 지닌 예술작품으로 재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근현대조각사의 거장으로 꼽히는 로댕과 마욜의 작품 중 <대성당>과 <지중해>라는 조각상도 특별한 제목 덕분에 작품성을 인정받은 대표적 사례에 해당한다.

<대성당>은 미켈란젤로 이후 최고의 조각가로 평가받은 프랑수아 오귀스트 르네 로댕(François-Auguste-René Rodin, 1840~1917)의 작품이다.

<지옥의 문>, <칼레의 시민>, <입맞춤> 등 대중에게 익숙한 명작은 대부분은 그 의미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유독 <대성당>이라는 작품만은 외형적으로 그 의미가 쉽게 파악되지 않는다. 이유는 작품제목과 형상의 불일치에서 오는 모호함 때문이다.

로댕, 대성당, 1908년, 돌, 64×29.5×31.8cm, 파리 로댕미술관
로댕, 대성당, 1908년, 돌, 64×29.5×31.8cm, 파리 로댕미술관

실물을 보면 <대성당>이라는 제목보다는 ‘두 손’이나 ‘마주하고 있는 손’, 아니면 ‘엇갈린 손’이라는 제목을 떠올리기 쉽다. 원래 이 작품은 분수 장식을 위해 제작한 것이었다. 서로 마주한 두 손 사이로 물이 솟아오르게 할 계획이었다. 제목 또한 처음에는 ‘언약의 궤’였다.

그렇다면 왜 <대성당>으로 바뀌었을까? 대성당은 사전적 의미 그대로 ‘교구의 중심이 되는 성당’을 가리킨다. 성당 같은 작은 예배당을 포함한 성당으로 규모나 성격상 대단히 중요한 장소이다. 무엇보다 기도하는 성스러운 장소로써 의미와 용도가 확실한 공간특성을 지닌다.

<대성당>은 언뜻 한 사람의 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두 사람의 손이다. 성별이 불분명한 오른손이 서로 마주하고 있다. 보는 이에 따라 사랑하는 연인들의 손일 수 있고, 예수와 성직자의 손일 수도 있다. 때로는 아버지와 아들이거나 어머니와 아들일 수도, 로댕 자신의 손일 수도 있다.

이토록 <대성당>의 두 손은 보는 사람에 따라 손의 주인공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익명의 손이다. 궁극에 인간의 손은 모든 창조물을 만드는 도구이다. 인간생활에 필요한 모든 사물은 손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완성된다.

대성당도 예외는 아니다.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손이 거대한 건축물인 대성당의 첨두형 궁륭(한가운데는 높고 주변으로 갈수록 낮아지는 아치형 곡면구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대성당>을 보면 ‘대성당’이라는 단어가 ‘마주하고 있는 손’과 같은 단순한 제목과는 사뭇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지극히 단순한 구성이 대성당과 같은 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로댕이 왜 ‘대성당’이라는 제목으로 바꿨는지 그 의도가 어렴풋이나마 읽힌다.

<대성당>은 제목의 독특함도 지녔지만, 신체 일부를 독립적인 예술작품으로 표현한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유의미하다.

사실 신체 일부가 몸체로부터 분리되어 작품으로 표현된 경우는 로댕 이전에는 찾아보기 힘들다. 일찍이 머리, 팔, 다리가 없는 ‘토르소’가 제작되었지만, <대성당>처럼 손을 하나의 독립체로 다루지는 않았다. 결과적으로 <대성당>은 독특한 제목과 함께 신체 일부를 독립적 예술작품으로 만든 조각 작품이라는 특별함도 지녔다.

로댕의 <대성당>만큼 이질감이 있는 제목을 지닌 조각 작품이 마욜의 <지중해>이다. 아리스티드 마욜 (Aristide Maillol, 1861~1944)는 시각장애로 40세에 조각가로 변신한 늦깎이 작가지만 누구보다 열정적인 태도로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했다.

마욜은 로댕처럼 천부적 조각술을 지니지 않았지만, 하나의 작품을 위해 오랜 시간 탐구하는 끈기와 열정을 지녔다. 현재의 <지중해>를 완성하기 전 ‘회화(실물 크기 데생)→태피스트리→부조’의 과정을 거칠 정도로 작품 제작과정을 중시했다.

마욜, 지중해, 1923~1927년, 대리석,117.5×68.5×110.5cm, 파리 로댕미술관
마욜, 지중해, 1923~1927년, 대리석,117.5×68.5×110.5cm, 파리 로댕미술관

오늘날 <지중해>는 마욜의 대표작으로 그를 근현대 조각사에서 거장의 반열에 오르게 한 일등공신이지만, 1905년 가을 살롱(야수파를 탄생시킨 전시회)에 청동으로 제작하여 <여인>이란 제목으로 출품했을 때 사실적 재현과 동떨어진 조각술로 심사위원과 관객들에게 혹독한 비난을 받았다.

아카데미화풍이 여전히 프랑스 미술계를 지배하던 시기인 만큼 마욜의 둥글둥글한 덩어리의 집합체처럼 보이는 인체상이 대중에게는 미완성처럼 느껴져 미적 만족감을 주지 못했다.

그런데 그토록 차갑고 냉정한 비판을 받던 작품이 대중에게 의미 있는 예술작품으로 재인식된 계기가 된 것이 <지중해>라는 제목으로 바뀐 이후부터이다.

사실 마욜은 <지중해>를 완성하기 전부터 친분이 있는 문인들에게 작품의 제목을 의뢰했는데 살롱전시 이후 제목을 다시 정하게 되었다. ‘그림자 진 정원을 위한 조상’, ‘여인’, ‘라틴적 사고’ 등 여러 제목이 물망에 올랐지만 최종적으로 선택한 제목이 <지중해>였다. 특별한 의미를 주지 않던 작품이 전혀 다른 의미로 평가된 것은 <지중해>라는 제목을 얻고 난 후부터 이다.

실제 ‘여인’과 ‘지중해’라는 제목을 번갈아 상기해보면 그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지중해>라는 제목이 주는 무게감과 상징성이 단순히 웅크리고 앉아있는 여인을 뛰어넘어 거대하고 풍요로운 자연을 품고 있는 여신상을 떠올리게 한다.

만약에 <대성당>과 <지중해>가 지금의 특별한 제목 대신 처음에 사용했던 평범한 제목 그대로 불렸다면 어찌 되었을까? 지금처럼 여전히 위대한 작품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지 의문이다.

현대미술은 개연성 없는 모호한 제목이나 상징적 의미를 지닌 특별한 제목들이 갈수록 많아진다. 이는 작품제목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크다는 방증이다.

현대미술에서는 작품의 성공 여부가 제목에서 판가름 날 정도로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는 <대성당>과 <지중해>처럼 은유와 우의를 내포한 제목 하나가 평범한 것을 특별한 것으로 탈바꿈시키는 수사학의 힘을 경험한 결과이다. 현대 미술가들이 철학적 사고를 유도하는 작품 제목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이 같은 맥락에서이다.

변종필

◆ 변종필 미술평론가

문학박사로 2008년 미술평론가협회 미술평론공모에 당선, 200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에 당선됐다. 경희대 국제캠퍼스 객원교수, 박물관·미술관국고사업평가위원(2008~2014.2) 등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회원 겸 편집위원, ANCI연구소 부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학출강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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