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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조를 품은 여성, 그 얼굴 기억하고픈 유교정신

[변종필의 미술 대 미술] 채용신 <운낭자像> vs 김은호 <논개像>

2016.08.26 변종필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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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초상화와 서양의 초상화를 비교할 때 우리의 초상화에서 유난히 약세인 분야가 여성초상화이다.

시대별로 수많은 여성초상화를 지닌 서양미술에 견주어 우리미술에서 여성초상화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그 수가 적다.

미술사적으로 보면 한국의 여인 초상화는 안악 3호분, 매산리 사신총, 쌍영총의 부인상 등 고구려 고분벽화의 총주부부상(塚主夫婦像)까지 거슬러 그 원류를 찾을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 인물의 개성이나 특징을 뚜렷하게 인지할 수 있는 수준의 여성상을 찾아보기 어렵다.

 한마디로 사회적 지위나 신분상 여성이 작품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여성초상화제작이 미비했던 것에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무엇보다 조선시대 남녀유별이라는 유교사상의 경화된 관념이 초상화제작에 까지 확대된 것이 큰 이유이다.

그나마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은 조선후기에 이르러서이고, 이때도 풍속화의 한 요소로서 등장하거나 미인도 혹은 열녀도와 같은 특정한 목적을 두고 제작한 것이 전부다.

실질적으로 양반이나 우국지사 중심에서 점차 중인계급이나 상인, 여인의 초상화까지 표현대상의 폭이 확대된 것은 1910년대 이후다.

이 시기에 본보기로 삼을만한 특정 여성을 추모의 대상으로 그린 작품들이 등장하는 데 채용신(蔡龍臣,1850∼1941)의 <운낭자像>이나 김은호(金殷鎬, 1892∼1979)의 <논개像>이 여기에 해당한다.

채용신과 김은호는 문헌 기록 및 현존 작품으로 볼 때 한국 미술사상 가장 많은 초상작품을 남긴 화가이다.

두 사람의 작품 중 <운낭자像>과 <논개像>은 실존한 인물을 제작했다는 점과 표현 대상이 자신보다 가족이나 나라의 안녕을 걱정한 충절의 여인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어진화사라는 공통경력을 지닌 두 화가의 대표작품을 통해 한국의 여성상이 어떻게 그려졌는지 들여다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채용신 〈운낭자像〉1914년. 지본채색.  120×61.7cm. 국립중앙박물관
채용신 〈운낭자像〉1914년. 지본채색. 120×61.7cm. 국립중앙박물관
채용신이 65세 때에 그린 <운낭자像·1914년>은 ‘운낭자 27세상(雲娘子二十七歲像)’이란 관지에서 알 수 있듯이 27세의 여성상이다.

운낭자는 <순종실록>에 의하면 평안도 가산의 관청에 소속된 기생 최연홍(1785~1846)의 초명(初名)이자 기생때의 이름이다.

운낭자는 당시 가산군수 정시의 소실로 들어갔는데 1811년(순조 11년)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으로 남편과 시아버지가 목숨을 잃었다.

이때 두 사람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지니고, 부상입은  정시의 친동생을 숨겨두고 치료하여 살려냈다.

이러한 의로운 행동이 조정에 전해져 최연홍은 기적(妓籍)에서 이름이 삭제됐고 땅을 하사받았으며, 죽은 후 평양 의열사에 제향되었다.

채용신의 <운낭자像>은 바로 의기이자 열녀로 기록된 최연홍을 기리기 위해 사후에 제작한 그림이다.

이 그림의 특징은 열녀의 이미지를 일반적으로 연상되는 이미지에서 벗어나 자식을 양육하는 어머니상으로 이상화시킨 부분이다.

어딘지 성모자상을 연상시킨다. 채용신이 운낭자를 그린 제작 동기가 명확히 확인되지 않은 가운데 기생이었던 운낭자를 이상적인 어머니의 모습으로 그린 것에는 특별한 의도가 있어 보인다.

여기에는 ‘20세기에 들어선 직후 국권이 상실된 절박한 시기에 실력 양성과 교육 계몽을 구국의 중요한 수단으로 이해하면서, 어린이와 어린이의 양육을 담당하는 어머니의 존재가 부각되었다.’라는 김이순 교수의 견해처럼 운낭자의 실물보다 당시 여성의 역할에 서 하나의 이상적인 여인의 유형을 제시하는 데 무게를 둔 것으로 해석된다.

기법적 측면을 보면 얼굴을 포함해 전체적으로 전통 화법과 담채에 의한 음영법을 기본으로 삼고 옷 주름에 가해진 입체감처럼 서양화법의 부분적 활용이 엿보인다.

인물이 세로 화면에 꽉 찰 정도이고, 얼굴과 몸의 비례는 8등신에 가까운 서구적 체형이다. 그러나 전체적 분위기와 동세, 색채처리에서는 한국적 느낌이 강하다.

몸은 정면을 향하고 있지만, 얼굴은 살짝 왼쪽으로 돌려 딱딱함을 없앴고, 유난히 부푼 풍성한 치마폭은 그림 속 주인공이 푸근한 심성의 여인임을 연상시킨다.

여자다운 곡선이나 치마의 대칭적 주름이 물결치는 듯 리듬감을 준다. 밝은 주황색이 감도는 황색 저고리와 옅은 청색 치마가 소박함을 느끼게 한다.

한쪽만 하얀 동정과 치마 끝에 살짝 보이는 흰 버선 끝이 의도적 표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인물의 시작과 끝을 잇는 듯 눈길을 사로잡는다.

김은호〈논개像〉비단에 채색. 1955년. 154×82.8cm. 국립진주박물관
김은호〈논개像〉비단에 채색. 1955년. 154×82.8cm. 국립진주박물관
 김은호의 <논개像>은 병마절도사 최경회의 후처인 주논개(1574~1593)를 그린 초상화이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전투에서 왜장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한 논개의 이야기는 진주백성들의 입을 통해 전해져오다 그가 순국한지 32년 뒤 투신한 바위에 정문부의 둘째 아들이 의암이라는 글씨를 새겼고, 후일 촉석루에 의암기가 지어지고, 의암사적비가 세워지며 알려졌다.

그동안 논개는 <어우야담>의 기록을 근거로 진주의 관기(官妓)로 알려졌는데 최경회 문중의 연구조사에서 후처로 밝혀졌다.

논개의 신분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었지만, 그녀의 의로운 행위는 세월을 초월해 추모의 대상이 되었다.

<논개像>은 김은호가 제작한 1955년 당시까지 관기로 알려졌다는 점에서 화가의 제작 의도는 지금과는 다르게 읽힐 수 있다.

외적으로 보면 채용신의 <운낭자像>보다 훨씬 색채가 강하고, 전체적으로 정교함을 유지하고 있다.

인체비례에 서도 치맛자락에 감춰진 발의 위치를 고려할 때 7등신 정도이다.

전체적으로 운낭자의 풍만하고 건강함에 비해 가냘파 보인다. 그러면서도 한 손은 내려뜨리고 치맛자락을 잡은 손이 마치 뒷짐을 진채 당당히 정면을 응시하는 모습으로 다가온다.

연약한듯함 속에 의연함이 은근하게 배어있다.

채용신의 <운낭자像>이나 김은호의 <논개像>은 전체적인 동세나 표현기법이 다른 작품의 여인상과 기본적인 구도가 비슷하다.

채용신의 <운낭자像>은 <팔도미인도>의 여인상과 김은호의 <논개像>은〈춘향像>과 형태와 동세가 닮았다.

두 화가가 초상화를 제작할 때 주안점을 둔 표현기법이나 구도, 의복 등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채용신의 <운낭자像>과 <팔도미인도>는 여러 부분에서 비슷한 형태가 감지되지만, 특히 오른팔의 자세, 저고리와 치마의 처리기법, 한쪽 버선발을 내민 동작 등 전체적인 구도와 분위기가 매우 닮았다.

김은호의 <논개像>역시 자신이 1939년(6·25 중 훼손되어 1961년에 다시 그림)에 그린 <춘향像>과 기법이나 구도 등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 인물의 생김새가 동일인처럼 닮았다. 이는 논개나 춘향의 모습을 여성스러우면서도 의기(義氣)를 지닌 이상적 여인상으로 정형화시키려 한 의도로 볼 수 있다.

좌-傳 채용신〈팔도미인도〉(부분)  20세기초. 비단에 채색. 130.5×60cm. 송암미술관 / 우-김은호 <춘향像> 1939년,
좌-傳 채용신〈팔도미인도〉(부분) 20세기초. 비단에 채색. 130.5×60cm. 송암미술관 / 우-김은호 <춘향像> 1939년,
 채용신과 김은호의 초상화에 대한 평가는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다.

 탁월한 묘사력, 어진화사라는 경력을 앞세워 두 사람이 이룬 성과는 한국 근대 사실적 초상화를 이끈 화가와 더불어 초상사진을 토대로 정형화한 구도와 의복 등으로 자신들만의 초상화풍을 정립한 화가라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초상화 제작 시 전통(배채법)을 유지하면서도 사진이라는 신문물을 수용·활용하여 사실적 재현에 주력한 점은 유사하다.

다만, 채용신의 초상화가 전통적 분위기를 유지하는 가운데 사진적 효과를 적절하게 살리는 쪽이었다면, 김은호는 사진적 효과를 살리는 데 한층 주력했다고 할 수 있다.

예로부터 우리는 초상화를 그릴 때 일호불사 편시타인(一毫不似 便時他人-터럭 한 올이라도 같지 않으면, 이는 다른 사람이다)과 전신사조(傳神寫照-표현대상의 외형 모사보다 대상 속에 숨겨져 있는 정신을 그려내는 것)를 절대명제처럼 여겨왔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것은 기본이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림 속 주인공의 정신을 그림에 그대로 담아내는 것이었다.

이는 입체적인 표현을 위하여 명암이나 빛의 흐름을 강조하면서 구체적인 표정을 그려내는 것에 초점을 둔 서양의 초상화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우리의 초상화를 보면 기쁨이나 분노 같은 감정 표현이 최대한 배제되어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운낭자像>과 <논개像>처럼 실존 인물을 직접대면하고 그리지 않은 상상화의 경우 ‘일호불사 편시타인’ 보다 ‘전신사조’의 의미가 더욱 각별하게 다가온다.

*김은호의 〈논개像〉은 화가의 친일문제(친일파 영정을 많이 그림)와 영정의 복식 문제 등으로 논란의 대상이 된 이후 새로운 영정이 국가표준영정(윤여환 화가)으로 지정되었고 김은호의 <신사임당> 그림 역시 새로운 인물상(오만원권 화폐 초상화-이종상화가)으로 대체됐다.

변종필

◆ 변종필 미술평론가

문학박사로 2008년 미술평론가협회 미술평론공모에 당선, 200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에 당선됐다. 경희대 국제캠퍼스 객원교수, 박물관·미술관국고사업평가위원(2008~2014.2) 등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회원 겸 편집위원, ANCI연구소 부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학출강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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