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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혼밥과 혼술을 두려워하랴

2016.09.19 한기봉 국민대 초빙교수/언론중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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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어울리는 술자리를 감정낭비, 시간낭비, 돈낭비라고 생각하는 남자 주인공. 이어폰을 끼고 클래식을 들으며 킹크랩을 안주로 럭셔리한 ‘혼술’을 즐기는 스타강사다. 반지하 자취방에서 통통한 꽃게 과자를 안주로 캔맥주를 마시며 스트레스를 푸는 신참내기 강사, 여자 주인공이다.
‘혼밥’과 ‘혼술’이 드디어 드라마로도 진출했다. 노량진 학원가의 강사와 공시족(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그린 tvN 드라마 ‘혼술남녀’. 케이블TV로서 3%대 시청률은 꽤 높은 편이다.

#코인노래방에서 나홀로 노래한다(‘혼곡’). 혼자 영화를 보면서 행복하고(‘혼영’), 혼자 쇼핑을 즐기고(‘혼쇼’), 놀이공원서도 혼자 잘 놀고(‘혼놀’), 혼자 클럽에 가면 뭐 어떠랴(홈클).
책맥(책을 읽으며 맥주를 마시는)을 위한 ‘맥방’도 생겼다. 편의점 도시락을 혼자 먹는 ‘편도족’도 많아졌다. 원룸을 알선하는 ‘O방’ 같은 이름의 부동산앱들이 성황이다. 혼자 사는 연예인의 일상을 다큐멘터리로 보여주는 MBC TV ‘나 혼자 산다’는 4년째 장수 프로그램이다.
 
#얼마 전 신문에서 ‘관태기’라는 신조어를 알았다. ‘관계의 권태기’라는 의미라고 한다. ‘관태기에 빠진 한국’이라는 제목으로 인간관계에 대한 한국인의 이중적 인식을 다루었다.
이 신문이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90%가 “인맥관리가 중요하다”고 답했다. 그러면서도 70%는 “인맥관리가 피곤하다”고 말했다. 휴대전화에 저장된 번호는 평균 222개. 그중 15%(35명) 정도만 편하게 연락하는 사람이었다.
더 놀란 건 ‘인간관계’란 키워드의 연관어 조사 결과였다.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는 ‘무섭다’였다. ‘힘들다’ ‘심하다’ ‘외롭다’ ‘스트레스’ 같은 부정적 의미의 연관어가 상위 10개 중 7개를 차지했다. 긍정적 연관어는 ‘편하다’ 등 3개뿐이었다.
 
#8월 7일 통계청이 발표한 ‘2015년 인구 주택 총조사’는 한국인의 거주 형태가 울타리에서 칸막이로 옮겨가는 변화를 숫자로 증명했다. 1인 가구 수가 전체의 27%인 520만 가구로 조사돼 처음 2인 가구(26%)를 넘어섰다. 1975년 이전에는 5인 가구, 2005년까지는 4인 가구, 2010년까지는 2인 가구가 대세였다. 전체 가구의 53%가 1~2인 가구다.

#책들도 혼자 사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미움 받을 용기’, ‘상처 받을 용기’,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고독이 필요한 시간’,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 ‘혼자 있는 시간의 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등등 제목만 봐도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다. 남이 미워하든 상처를 주든 남의 눈에 비친 자신에 신경 쓰지 말고, 외로움의 자양분을 키워 자아를 숙성시키라고 설득한다. 여러 권이 장기 베스트셀러에 들었다.
 
#얼마 전에 4년 된 휴대폰을 바꾸었다. 연락처를 새 폰에 옮기며 잠시 갈등에 빠졌다. 저장된 번호가 너무 많았다. 그 중에는 업무적으로 만났거나 모임에서 우연히 인사를 나눈 사람들이 상당수를 차지했다. 지울까 말까. 그들이 나를 기억하기나 할까. 다시 볼 일이 생길까. 나는 과감하게 100개 이상의 번호를 딜리트했다. 휴대폰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그들과의 공적 관계 유효기한은 종료됐다.

나는 인맥이 곧 경쟁력으로 통하는 사회에서 살아왔다. 학연, 지연, 혈연, 업연, 심지어 우스갯소리로 흡연까지 인연을 강조했다. 혼자 밥 먹으면 사회 낙오자로, 혼자 술집에 앉아있으면 무언가 문제 있는 사람으로 보던 시대였다. 하지만 사회와 직장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면 막상 속내를 털어놓고 소주 한 잔 편하게 주고받을 수 있는 친구는 별로 없는 불행한 세대다.

시대가 변했다. 요즘에는 혼밥, 혼술을 흔히 본다. 대학가에는 그런 이름을 내건 집들이 많이 생겨났다. ‘속상해’ ‘얄미워’ ‘부끄러’는 대학로 어느 혼술바의 메뉴 이름이다. 일본을 닮아간다. 나만의 오롯한 시간을 갖고 싶어 자발적으로 혼자 먹고 마시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1인 가구가 많아지고 공부나 취업준비나 알바에 바빠서 빠른 시간 안에 혼자 식사를 해결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진 건 팍팍한 현실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하지만 자발적 혼밥은 다른 것 같다. 인간관계에 지친 사람들이 감정낭비나 시간소모를 하고 싶지 않은 것이며, 나름으로로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이 되었다.

이제 혼자 살기는 인구통계학적 관심을 넘었다. 삶의 문제, 철학의 문제, 자기관리의 문제이다. 외로움의 역기능은 순기능으로 반전됐다. 사회에서의 소외와 고립이 아니라 다른 삶을 모색하려는 홀로서기이다. 고독해서, 연인과 헤어져서, 친구가 없어서 혼술을 하지 않는다.

혜민 스님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해지는가를 문득 깨달았다고 책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에서 말씀하셨다. 스님의 깨달음의 요체는 이렇다. ‘내가 상상하는 것만큼 세상 사람들은 나에 대해 그렇게 관심이 없고,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해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 삶의 많은 시간을 남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을 걱정하면서 살 필요가 없다고.

부산한 명절도 지나고 사색의 계절이다. 진짜 자유란 타인의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며, 고독에 익숙한 자만이 타인과의 진정한 소통을 안다고 한다. 이 계절, 가끔은 격하게 외롭지 않더라도 혼밥, 혼술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불편한 회식의 방조자보다는 차라리 고독한 미식가가 정신건강에도 좋다. 남을 “위하여”보다는 나를 위한 건배를!

한기봉

◆ 한기봉 국민대 초빙교수/ 언론중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언론보도로 피해를 입은 사람을 구제하는  언론중재위원이며, 국민대 언론정보학부에서 한국 언론과 글쓰기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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