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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섬에 가면 신(神)도 신을 벗는다

[김준의 섬섬옥수] 신안 우이도

2017.05.17 김준 섬마실 길라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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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양길에 겸하여 산을 오르는 즐거움을 누린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즐기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마 마음과 기운을 상실하여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리라. 금성(나주) 관아 서쪽에서 백 리 쯤 떨어진 영광 다경포에 이르러, 물길을 따라 뒤섞인 듯 떠 있는 많은 섬 사이를 이리저리 지나면 비금도의 내해에 도착하게 되는데, 여기서부터 대해가 된다.

면암 최익현은 병자수호조약 폐기를 주장하며 도끼를 들고 궁궐로 들어가 상소를 올린 죄로 우이도로 유배되었다. 우이도에 도착해 지은 글이다.

면암이 건넜던 바다, 더 앞서 손암 정약전이 동생을 강진으로 보내고 건넜을 뱃길을 따라 우이도에 도착하니, 홍어장수 문순득이 선창에서 반긴다. 진리마을이다.

섬으로 들어가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에 돌로 쌓은 아담한 작은 선창이 기다린다. 조선시대 증축했다는 기록이 새겨진 비석(1745년 기록)이 오롯이 남아 있는 ‘우이도 선창’이다. 매우 이례적이다. 게다가 지금도 태풍이 불면 작은 배들이 피항을 하는 안전지대다. 옛날에는 배를 건조하고 수리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기록에는 마을주민 25명이 참여해 선창을 중건했다고 한다. 

우이도선창. 조선시대 선창이 오롯이 남아 있는 곳은 매우 드물다. 게다가 당시 세운 중수비도 있다. 선박 건조와 수리를 했던 곳으로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우이도 선창. 조선시대 선창이 오롯이 남아 있는 곳은 매우 드물다. 게다가 당시 세운 중수비도 있다. 선박 건조와 수리를 했던 곳으로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선창을 지나 곧장 손암 유배적거지를 찾아가는 길에 마늘종을 뽑는 어머니를 만났다. 안부를 묻자 ‘비가 더 와야 할 텐데, 먼지만 날리고 말았어’라며 가랑비를 탓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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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도선창 중수비,
우이도 선창 중수비.

 어머니 뒤로 하얀 팻말이 반짝였다. 10여 년 전 한 노인이 정약전(1535-1587)이 거처한 자리며 알려준 곳이다. 이곳에서 문순득에게 표류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두 집 사이는 한 호흡지간이다.

흑산도와 우이도 사이 바다는 거칠다. 손암은 흑산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 ‘현산’이라 부를 정도였다. 현산바다에 비하면, 목포에서 비금도초까지 이어지는 뱃길이 호수다.

주민들도 그 길을 강이라 부른다. 진짜 바다는 그곳에서 흑산으로 가는 길이다. 손암은 흑산으로 들어가면서 매심(每心)이란 호를 대신에 손암(巽菴)으로 바꿨다. ‘섬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란다. 생전에 나올 수 없음을 직감했던 것일까. 그곳에서 동생 다산을 기다리다 눈을 감았다. 1816년 6월6일이다. 그렇게 16년간 바다에 갇혀있다 눈을 감고 현산바다를 건너 뭍으로 건넜다.

손암, 문순득을 만나다

손암은 신유사옥으로 전라도 완도군 신지도로, 동생 다산 정약용(1762-1836)은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 같은 해 겨울 ‘황사영 백서사건’이 더해져 문초를 받고 각각 강진과 흑산도로 다시 유배되었다.

 정약전 서당터, 흑산도에서 처럼 우이도에도 서당을 만들어 아이들과 주민들을 가르쳤다. 진리에서 돈목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다.
정약전 서당터, 흑산도에서 처럼 우이도에도 서당을 만들어 아이들과 주민들을 가르쳤다. 진리에서 돈목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다.

1801년 섣달 나주 율정에서 동생과 헤어진 후 흑산도 사리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초막을 짓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때때로 어부들에게 물고기 공부를 했다. 얼마간 세월이 흘러 동생이 해배되어 찾아올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형은 ‘아우가 나를 보려고 험한 바다를 건너게 할 수 없으니 내가 우이도에 가서 기다리겠다’라며 거처를 우이도로 옮겼다. 다산이 쓴 「선중씨묘지명」에 손암을 우이도로 보내지 않으려는 사리 주민들의 이야기와 함께 실려 전한다.

10년 전, 필자는 진리에서 한 노인을 만났다. 작은 키에 온화하고 강직한 얼굴을 간직한 분이었다. 홍어장수로 알려진 문순득의 6대 현손 문채옥(1920-2011)이다.

고 문채옥의 생전의 모습. 당시 필자에게 우이도선창과 손암유배적거지를 안내해줬다.
문채옥 씨 생전 모습. 필자에게 손암유배적거지를 안내해줬다.

손암이 머물렀던 거처를 알려주었던 그 노인이다. 집안으로 안내하더니 오래된 책 두 권을 보여줬다.

문순득이 1801년 12월 흑산면 태도 일대에서 홍어를 사서 돌아오다 표류해 1805년 1월까지 3년 2개월까지 겪은 일을 기록한 ‘표해시말’이란 문집이었다. 문순득 일행은 오키나와, 필리핀 등을 표류하다, 마카오, 베이징 등을 거쳐 의주를 돌아 우이도로 귀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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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이도에서 유배살이를 하던 손암이 문순득 표류이야기를 듣고 기록한 문집이다. 이를 다산 제자 이강회가 다시 문순득을 만나 정리해 ‘유암총서’에 실었다. 이 문집은 ‘운곡잡저’와 함께 전라남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동생을 만나기 위해 우이도로 거처를 옮기지 않았다면 문순득의 표류이야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성을 쌓아 바람을 막다

진리마을에 가면 정약전유배적거지와 함께 꼭 찾아보아야 할 곳이 주민들이 ‘성재’라고 부르는 우실이다. 바람과 모래와 갯물이 마을이나 밭으로 넘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나무를 심거나 돌을 쌓아 막는 돌담이나 숲을 말한다. 남해 물건리 어부림처럼 숲을 조성한 경우도 있지만 안좌, 암태, 도초, 조도 등 서남해 어촌마을에는 돌을 쌓아 대신하는 경우가 많다.

우이도에는 쌀농사를 지을 땅이 없다. 곡식이 귀해 한 시간여 거리에 있는 도초에서 마른생선과 미역을 주고 사왔다. 이때 쌀만 아니라 볏짚도 구해야 했다.

 어렵게 구해 초가에 지붕을 얹어 나면, 늘 같은 해 겨울 하늬바람을 걱정했다. 칠발도 큰 바다에서 불어오는 북서풍이 띠밭너머 해수욕장을 지나 성재를 타고 골을 따라 마을로 내려오면서 말썽을 부리기 때문이다.

어촌이나 섬마을에서는 나무숲을 만들거나 돌담을 쌓아 북서계절풍이나 파도, 소금바람 등을 막았다. 이를 서남해에서는 ‘우실’이라 불렀다.
어촌이나 섬마을에서는 나무숲을 만들거나 돌담을 쌓아 북서계절풍이나 파도, 소금바람 등을 막았다. 이를 서남해에서는 ‘우실’이라 불렀다.
 

옛 마을 사람들은 성난 바람을 다스리기 위해 재에 돌담을 쌓았다. 그 뒤로 주민들은 돌담이 쌓아진 고개를  ‘성재’라고 불렀다. 골을 따라 마을로 내려오는 양쪽으로 7부 능선은 모두 밭이다.

보리와 고구마를 심어 식량을 삼았다. 밭농사를 짓기 위해서도 반드시 갯바람을 막아야 했다. 바람과 함께 갯물과 염기가 날아들어 농사를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 흔적이 오롯이 남아 있다. 폭은 1미터 가까이 되게 돌을 쌓았다. 마치 성과 같은 위용이다. 뒤에서 오는 바람은 성재로 막고 앞에서 오는 파도는 크고 작은 많은 섬들이 파도를 막았다. 덕분에 진리마을에 배가 들고나며 마을을 이루고 번창할 수 있었다. 

‘몰랑’을 넘다

돈목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첫 들목에서 밭을 매는 최씨부부를 만났다. 손암이 서당을 짓고 아이들을 가르쳤다는 자리다.

어촌도 아니고 농촌도 아니라 먹고 살기 너무 힘들다며 나그네를 붙잡고 섬살이 한을 풀었다. 국립공원으로 묶이고 젊은 사람은 뭍으로 나가고 학교가 문을 닫아 노인들뿐이란다.

빨랫줄에서 꾸덕꾸덕 마르고 있는 우럭, 돔, 갑오징어, 아귀, 숭어는 풍성한 섬밥상을 만들고, 미역과 함께 주민소득에도 큰 도움이 된다.
빨랫줄에서 꾸덕꾸덕 마르고 있는 우럭, 돔, 갑오징어, 아귀, 숭어는 풍성한 섬 밥상을 만들고, 미역과 함께 주민소득에도 큰 도움이 된다.

망망대해 외롭고 고달픈 사람살이와 다르게 상산봉으로 가는 산길은 제비꽃, 반디지치가 반기고 휘파람새가 노래한다.

진리에서 돈목까지 가려면 진리몰랑과 성촌몰랑 두 고개를 넘어야 한다. 몰랑은 고개를 의미하는 전라도말이다.

몰랑 사이에 옴팡진 골에 대초리 마을이 있다. 쓰러져가는 빈집과 우물과 돌담만 남아 있지만 한 때 10여 가구가 살았다. 오가는 등산객이나 여행객만 간간이 기웃거릴 뿐이다. 지금은 뱃길로 오가지만 옛날에는 유일한 통로였다. 목포에서 가져온 생필품을 지게로 지고 오르내렸다.

우이도 섬밥상, 민박집마다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시장이 멀어 대부분 우이도 바다와 산과 텃밭에서 얻은 것으로 밥상을 차린다.
우이도 섬 밥상, 민박집마다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시장이 멀어 대부분 우이도 바다와 산과 텃밭에서 얻은 것으로 밥상을 차린다.

대초리에 못미처 진리몰랑 삼거리에서 ‘상산봉(362m)’으로 가는 길과 돈목해변으로 가는 갈래 길로 나뉜다. 우이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다. 시간에 쫓겨 늘 오르지 못했다. 옛날에는 정상에서 진리나 돈목으로 가는 길이 있었는데 사람이 다니지 않아서 가시덩굴로 길이 막혀 다닐 수 없다. 작지만 깊은 골짜기다.

동쪽으로는 진리선창 너머로 멍섬, 흰섬, 동리, 서리(이상 우이도), 대야도, 신도, 하의도(이상 하의도), 도초도 등이 흐릿하다. 서쪽으로는 돈목과 솔치끝 그리고 도리산 등 우이도 서쪽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손암도 이곳에 올라 다산이 타고 올 배를 기다렸을까. 한 두 주 후면 참나리나 원추리가 예쁘게 필 것 같다.

돈목해변, 이생진 시인이 맨발로 즐겨 걷던 해변으로 배후에 풍성사구와 연결된 우리나라 대표적인 모래언덕이 발달해 있다.
돈목해변. 이생진 시인이 맨발로 즐겨 걷던 해변으로 배후에 풍성사구와 연결된 우리나라 대표적인 모래언덕이 발달해 있다.
 

모래밭에 피어난 사랑

바람은 파도를 만들고 모래를 가져와 그곳에 띠밭너머해변, 성촌해변, 돈목해변 등 섬 북쪽과 서쪽 가장자리에 쌓는다. 우이도처럼 먼 바다에 북서풍을 제대로 받는 섬은 더욱 그렇다.  남쪽은 해식애가 발달했다. 온통 바위해변이다.

겨울철 강한 북서계절풍으로 성촌해변에 쌓인 가는 모래가 완만한 북서경사면을 따라 올라온 산 정상에 쌓인다. 이어지는 바람과 중력으로 쌓인 모래는 남쪽급경사면을 따라 돈목해변으로 내려온다. 이렇게 만들어진 모래사막을 풍성사구라고 부른다. 주민들은 모래가 산처럼 쌓였다해 ‘산태’라 했다. 겨울에는 산태가 많이 쌓지만 봄여름에는 모래가 바다로 흘러가 언덕을 이루고 농어, 민어, 숭어들 사랑의 삶터로 바뀐다. 물고기만 그런 것이 아닌 모양이다.

풍성사구, 바람이 만든 모래언덕으로 주민들은 ‘산태’라고 부른다. 옛날에는 놀잇감이 없는 섬마을 아이들 놀이터였지만 지금은 보전을 위해 정상진입을 막고 있다.
풍성사구. 바람이 만든 모래언덕으로 주민들은 ‘산태’라고 부른다. 옛날에는 놀잇감이 없는 섬마을 아이들 놀이터였지만 지금은 보전을 위해 정상진입을 막고 있다.

옛날 돈목에 사는 총각과 성촌 아가씨가 사랑에 빠졌다. 둘은 주민들 눈을 피해 모래산에서 사랑을 나누었다. 그러던 어느 날 총각이 약속한 모래언덕에 나타나지 않았다. 고기 잡으러 갔다 풍랑에 목숨을 잃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크게 실망한 성촌 아가씨가 바다에 뛰어들었다. 총각은 죽어서 바람이 되었고, 처녀는 모래가 되어 모래언덕에서 만난다고 한다. ‘돈목 큰 애기 모래를 서 말 먹어야 시집간다’고 한다.

모래언덕이 있어 돈목과 성촌 주민들은 물 걱정 없이 겨울을 날 수 있었다. 모래가 상산봉 자락에서 내려오는 지하수를 가두고 바다에서 들어오는 짠물을 막았던 것이다. 또한 주민들에게는 풍성사구가 놀이터였다. 모래썰매를 타며 해수욕을 즐겼다. 지금은 풍성사구를 보전하기 위해 정상에 오르는 것을 금하고 있다.

보리숭어, 혼을 빼놓다

산에서 내려오니 아귀탕에 숭어구이 밥상에 올랐다. 마당과 옥상 빨랫줄에는 막 잡아서 손질한 숭어, 장대, 갑오징어, 서대, 아귀, 농어 등이 걸렸다. 우이도에서는 잡은 생선을 바로 내다 팔 수 없다. 그렇다고 그날 소비할 수도 없어 햇볕에 말린다. 깊고 오염되지 않는 바다에 잡은 생선이라 맛도 깊이가 있다. 그래서 여행객들 중에 마른 생선을 구입해가는 사람들이 꽤 많다. 깊은 맛을 알고 주문을 해서 먹는 사람들도 있다.

박사님, 저녁때 이것 한번 잡사볼쇼. 보리숭어가 맛이 정말 좋아라.

민박집 안주인 한씨가 잡아온 생선을 손질하며 던진 말에 입안에 침이 고인다. 저녁까지 기다릴 수 없을 것 같아 된장을 가져다 몇 점 찍어먹었다. 숭어는 가숭어와 숭어로 나뉜다. 가숭어는 겨울철에 맛이 좋지만 숭어는 보리가 필 무렵에 맛이 좋다. 그래서 보리숭어라고도 한다.

어제 밥상에 오른 숭어구이에 모두 감탄을 했다. 그렇게 맛있는 숭어구이는 처음이었다. 굵은 천일염을 뿌려 반쯤 말린 숭어였다. 숭어회는 또 얼마나 맛이 좋을까. 겨울철에는 곧잘 숭어를 먹지만 여름으로 가는 길목에서 숭어는 개도 쳐다보지 않는다고 했는데. 아무리 보리숭어라도 그렇지.

돈목해변에서 호미로 캔 백합과에 속하는 이매패 민들조개
돈목해변에서 호미로 캔 백합과에 속하는 이매패 민들조개.

‘이게 무슨 회야. 정말 맛있다’ 아이들이 맛을 먼저 알아차렸다. 농어 옆에 놓인 회가 단연 인기다. 쫄깃하는 식감과 달콤한 뒷맛이 좋다. 안주인이 숭어라고 알려 주지 않았다면 맛으로는 숭어라 상상할 수 없었다. 부드러운 깊은 맛은 겨울철 방어 못지 않고 씹히는 식감은 귀족 생선 참돔을 능가했다.

돈목해변은 맨발이다

돈목해변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달랑게다. 정신없이 먹이를 찾던 녀석들 인기척도 없이 나타난 인간들에 놀라 혼비백산 구멍으로 숨는다. 그리고 내가 주인이라는 듯 주저앉아 호미질을 한다.

점심을 먹고 호미를 들고 돈목해변으로 나섰다. ‘엄마 나도 캤어’ 셋째가 캔 조개를 들고 활짝 웃는다. 모래해변에는 민들조개가 곧잘 나온다. 백합과에 속하는 이매패류로 백합보다 좀 덜하지만 국물이 시원하고 담백하다. 무엇보다 조개껍질이 정말 예쁘다.

우이도가 좋은 이유는 또 있다. 시인 이생진과 인연 때문이다. 서산이 고향인 그는 ‘성산포’를 배경으로 쓴 시로 사랑을 받았다. 섬을 끔찍하게 사랑했고 시로 남겼다. 성상포만큼이나 사랑한 섬이 우이도다. 특히 돈목해변을 맨발로 걷는 것을 정말 좋아했다.

무엇보다 민박집 주인이 해주는 밥상을 좋아했다. 몇 년 전 시인과 동행해 우이도를 간 적이 있다. 그때도 민박집 주인이 차려준 밥상을 받고 난 후 맨발로 돈목해변을 걸었다. 그때 시인이 말했다. ‘작은 섬은 뒤 돌아볼 수 있어서 참 좋다’고. 시인이 쓴 ‘맨발’이라는 시에 우이도 이야기가 나온다.

맨발로 시를 읽는다
시도 맨발이다
우이도에 오면 신발이 귀찮아
신(神)도 신을 벗는다
신과 사람이 맨발이다
자연을 껴안듯 신을 껴안는다
신이 시(詩) 같고
시가 신(神) 같다

또 시인은 ‘우이도로 가야지’라는 시집에 ‘목포에서 세 시간 반/우이도 돈목/갔다 오면 다시 가고 싶은 곳/다시 가도 외로움은 여전히 남아 있고/발가국은 이미 지워지고 없는데/그사람이 그리운 것 있잖아요/다시 가서 발자국을 찾아보세요/그리움은 땅속에 묻혀도 보인다구요’라며 우이도를 노래했다.

우이도를 끔찍이도 좋아했던 이생진 시인과 다시 우이도로 가고 싶다.

김준

◆ 김준 섬마실 길라잡이

어촌사회 연구로 학위를 받은 후, 섬이 학교이고 섬사람이 선생님이라는 믿음으로 27년 동안 섬 길을 걷고 있다. 광주전남연구원에서 해양관광, 섬여행, 갯벌문화, 어촌사회, 지역문화 등을 연구하고 정책을 개발을 하고 있다. 틈틈이 ‘섬살이’를 글과 사진으로 기록하며 ‘섬문화답사기’라는 책을 쓰고 있다. 쓴 책으로 섬문화답사기, 섬살이, 바다맛기행, 물고기가 왜, 김준의 갯벌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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