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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가 되고 싶었던 섬, 친구 바다는 울었다

[김준의 섬섬옥수] 군산 비안도

2017.06.13 김준 섬마을 길라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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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촌계장의 방송소리를 듣고 조개를 파기 위해 나온 어머니들이 물이 빠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어촌계장의 방송소리를 듣고 조개를 파기 위해 나온 어머니들이 물이 빠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지금도 육지가 되고 싶을까.

창문만 열면 빤히 건너다보이는 고군산군도가 육지가 되었다. 그런데 후유증이 생각보다 크다. 여행객은 마구잡이, 상인은 바가지, 섬 생태와 문화는 무너지고. 난리다.

군산에서 배를 타고 비안도까지 징검다리처럼 건너오던 섬들이다. 사실 정말 육지가 되길 원했던 곳은 비안도다. 그래서 똘똘 뭉쳐 새만금사업을 응원했다. 그 덕에 다른 많은 섬은 육지가 되었지만 비안도는 뱃길만 끊겼다.

가깝고도 먼, 오지 섬

비안도는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에 속하는 섬이다. 기러기가 나는 모양을 하고 있다. 노비봉(191)과 남봉산(170) 두 봉우리를 양 날개로 삼고, 그 사이에 몽돌해변과 구릉과 습지가 몸통이다.  쌀농사와 밭농사를 짓던 습지와 구릉 그리고 선착장이 있는 곳이다.  

 언덕에서 바라본 마을과 초등학교.
언덕에서 바라본 마을과 초등학교.

비안도는 군산에서도 뱃길이 제일 불편한 오지다. 1970년대에는 80㎞ 불과한 뱃길이 장장 7시간, 새만금 사업 직전까지도 3시간 반이나 걸렸다. 지금은 그 객선도 끊겼다. 항로를 다시 열겠다는 소식이 들리지만 주민들은 무덤덤하다. 신뢰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1928년 동아일보 도서순례 ‘고군산열도’편에 비안도를 이렇게 소개했다.

비안도는 이럼처럼 나는 기러기 형상이다. 날개를 펼친 곳에 인가 약 칠팔십호가 있고 자급자족하는 부유한 모습이다. 땅이 다른 섬보다 넓어서 밭도 논도 많다. 이곳이야 말로 절해고도다. 어느 섬을 가든지 다 백리 거리에 있어 교통이 제일 불편하고, 문화가 제일 열악하지만 아름다운 풍속을 가지고 있다.

원래 칠팔십호로 나누어져 있으나 모두 한 가족이다. 한마을에서 서로 혼인을 하는 관계로 연줄연줄 인척관계로 해가 거듭하여 혈족관계가 깊어졌다. 원래 고도에 사는 사람들이라 외적을 방어하는 단결이 굉장하지만 서로는 단란하여 교도하고 충고하여 불량배가 없다. 무슨 일이든지 서로 도와주고 삭전을 주지도 받지도 않는다. 집을 지어도, 모내기를 하여도 서로 다투어 도와준다(동아일보. 28.6.30).

비안도만 아니다. 당시 섬살이는 대부분 이러했다. 돌담을 사이에 두고 사돈을 맺고, 내집 네집 없이 드나들고, 힘든 일은 함께 나누고, 법보다 마을관행이 우선이었다.

육지가 되고 싶었다

새만금 사업 찬성과 반대로 갈등이 심할 때 비안도 주민들은 대부분 찬성을 했다. 가장 큰 이유가 불편한 뱃길을 개선할 유일한 길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새만금 방조제가 막아지면 육지와 20리에 불과하다. 정부가 밝힌 새만금 청사진대로 된다면 육지와 연결도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에 당시 전라북도 도지사와 깊은 인연도 한몫 했다.

가력도에서 섬마을까지 일행을 데려다 준 김씨는 지금 다리를 놔준다고 해도 반대라고 힘주어 말한다. 섬이 낚시꾼 천지가 되고 쓰레기장으로 변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인근 고군산군도나 그보다 앞서 비응도 신시도가 반면교사가 된 듯싶다. 다리가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여기에 덧붙였다.

봄철에 바다에 넣어 두었던 그물을 걷어 갈무리한 후 다음 어기를 준비한다. 한 때 조기를 잡아 어깨에 매고 다닐 만큼 황금어장이었다.
봄철에 바다에 넣어 두었던 그물을 걷어 갈무리한 후 다음 어기를 준비한다. 한 때 조기를 잡아 어깨에 매고 다닐 만큼 황금어장이었다.
 

새만금 막고 비안도는 죽었다. 바지락도 죽고, 미역 뜸부기 해초도 하나도 없다. 민어, 농어, 돔, 삼치가 사라졌다. 장대도 일절 없다가 조금씩 잡힌다.

비안초등학교에는 학생이 한 명이다. 어장이 좋을 때 전교생 1백25명이었다. 1973년 6월 4일자 경향신문에 ‘장한 섬개구리들’이라며 비안국민학교가 소개됐다.

젊은 체육 선생님이 들어와 배구팀을 만들었다. 그리고 1년 만에 도시에 있는 팀들을 누르고 은메달을 차지했다. 당시 12명 선수 중 10명이 뭍에 처음 나왔고, 기차를 처음 타본 학생도 11명에 이르렀다. 헌 그물로 배구 네트를 만들어 연습을 했다. 섬에서 가장 큰 건물, 가장 넓은 터를 차지한 섬사람들의 자랑이자 정신적인 버팀목이었다.

새만금방조제 완공으로 뱃길만 끊긴 것이 아니다. 주민들 생계였던 김 양식도 심한 타격을 받았다. 김 양식은 무엇보다 조류 소통이 중요하다. 비안도 주민들만 아니라 개야도 주민들도 200여 가구가 비안도 앞 바다에서 김 양식을 했다. 부안 김의 명성은 사실상 비안도 앞 바다에서 시작된 것이다.

어깨에 조기를 지고 살다

“주민 여러분 이장입니다”

동이 틀 무렵 낯익은 듯 낯 설은 소리에 몸을 뒤척였다. 아침 물때에 바지락이나 동죽 등 조개를 판다는 안내다. 여름철은 비안도 섬 풍경은 한가하다. 김 양식도 끝났다. 그물도 걷어 올려 깨끗하게 세척해서 자루에 담는다.

물이 빠지자 어머니들이 호미를들고 갯벌로 나섰다. 여름철 섬밥상을 풍성하게 해주고 단백질을 공급해주는 고마운 갯벌이다.
물이 빠지자 어머니들이 호미를 들고 갯벌로 나섰다. 여름철 섬 밥상을 풍성하게 해주고 단백질을 공급해주는 고마운 갯벌이다.
 

그늘 아래서 그물을 깁고 새로 만들어 다음 철을 준비한다. 겨울에는 김 양식을 하지 않는 사람은 군산 등 뭍으로 나가서 겨울을 나는 사람이 많다. 여름에는 간간이 그물로 갑오징어, 민꽃게, 장대 등을 잡아 반찬으로 올린다.

그물을 손질하던 한 주민이 옛날이야기가 나오자 목소리가 높아졌다. 가력도 근처 바다에 메어 놓은 어살(전통 그물로 정치망의 일종)을 털면 조기가 가득했단다. 섬은 조그만 했지만 바다는 넓은 황금어장이었다.

교통이 불편하고 문화 혜택을 받지 못한 것 말고는 부족한 것이 없던 섬이었다. 큰 배를 가지고 있는 선주들은 연평도까지 안강망으로 조기잡이를 나갔다. ‘간 큰 놈이 부자된다’고 한계선을 넘어가 조업을 하곤 했다. 그중에는 쌀가마니에 돈을 가득 담아 온 사람도 있었다. 비안도 어장은 칠산바다와 연결되는 서남해 최고의 어장이었다.

조기너머 해변으로 가는 길목에 방목된 소 가족.
조기넘머 해변으로 가는 길목에 방목된 소 가족.

동진강과 만경강 하구에 고군산군도와 위도 등 섬들이 모여 있어 펄과 모래가 적당하고 섬그늘이 좋아 봄철이면 물고기들이 산란을 위해 고향처럼 찾았다. 화수분으로 알았던 조기어장도 1965년 무렵에 끝이 났다. 꿩 대신 닭이라고 그래도 일부 주민들은 외줄낚시로 농어를 잡았다. 그것만으로도 쏠쏠한 소득을 올릴 정도로 어장이 아직은 괜찮았다.

그 후로 ‘낭장망’이라 부르는 그물을 놓아 멸치를 잡았다. 멸치잡이에서 김 양식으로 바뀐 것은 1990년대 초반이다. 새로운 소득자원을 발굴하려는 한 어촌계장 노력으로 김 양식을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 양식은 완도를 비롯해 서남해 연안에서 이루어졌다.

먼 바다에서 양식을 하기 위해서는 내파성이 있는 시설과 깊은 바다에서 양식하는 기술개발이 필요했다. 멸치어장과 김 양식은 힘든 일이지만 그래도 주민들은 가장 풍요롭던 시절로 기억한다. 여기에 새만금이라는 광풍이 불어 닥쳤다. 직접 피해는 아니지만 간접 피해로 비안도 주변 어업권은 모두 취소되었다. 보상을 받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뭍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할 자본도 되지 못했고, 기술도 없었다. 목돈을 보상받은 집은 자식들 분란으로 탕진하고, 이래저래 삼베바지 방귀 새듯 빠져나갔다. 군산으로 나갔던 주민들은 다시 섬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한정면허를 얻어서 김 양식을 하고 있다. 언제라도 국가에서 철거를 요청하면 철거해야 하고, 자연적이든 인공적이든 재해로 인한 어장피해가 발생해도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 다는 것이 조건이다.

조기넘어 몽돌해수욕장.
조기넘머 몽돌해수욕장.

바람과 파도가 만들어낸 시간들

오후가 되자 아이들이 수영복으로 갈아 있고 ‘조기넘머’ 몽돌해수욕장으로 달린다. 아이들은 어떻게 해수욕장이 있다는 것은 알았을까. 해안을 따라 걷다보면 마을 반대편 그러니까 서쪽 몽돌해변에 이른다. 비안도 서쪽으로는 더 이상 섬이 없다. 중국까지 이어지는 망망대해다. 작은 몽돌은 거센 파도와 시간이 만들어낸 작품다.

파도를 피할 수 있는 해변에 앉아 들고 나는 바닷물에 몸을 맡기며 해수욕을 즐기는 아이들의 함성소리가 몽돌과 함께 구른다. 약 700m에 이르는 몽돌해변이 인상적이다. 몽돌해안을 따라 데크길이 놓여있다.

평생 섬에서 생활하며 굳은 일을 도맡아 해온 김씨와 그 부인의 손. 눈썰미가 좋아 새 배를 보면 그대로 짓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 군대 가기 전에 마을일을 보고 다녀와서도 마을을 봤다. 독학으로 의학서를 독파해 약국도 없는 섬에서 민간요법으로 아픈 사람을 치료했다. 조기 어장도 하고 김 양식도 했다. 그래도 아내에게는 힘든 일을 시키지 않으려 했다.
평생 섬에서 생활하며 궂은 일을 도맡아 해온 김씨와 그 부인의 손. 눈썰미가 좋아 새 배를 보면 그대로 짓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 군대 가기 전에 마을일을 보고 다녀와서도 마을 일을 봤다. 독학으로 의학서를 독파해 약국도 없는 섬에서 민간요법으로 아픈 사람을 치료했다. 조기 어장도 하고 김 양식도 했다. 그래도 아내에게는 힘든 일을 시키지 않으려 했다.
 

2012년 행정자치부 ‘찾아가고 싶은 섬’ 가꾸기 사업에 선정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 주제는 ‘물과 돌이 아름아운 비밀의 섬’이다. 벌써 데크길 군데군데 뜯겨 나갔다. 강한 파도나 바람을 견딜 시설이 어디 있겠는가.

주민들은 이곳을 ‘조기넘어’라고 부른다. 이곳 몽돌 중에 수석애호가들이 좋아하는 돌이 많아 찾는 사람이 꽤 많다. 몽돌해변을 걷는 것은 수월치 않다. 그런데 길을 만들어 놓았으니 오가기 편리하다.

견물생심이라고 여행객이나 약초꾼이나 낚시꾼들이 오가다 해삼, 홍합 등 갯것에 손을 대는 모양이다. ‘마을어업 공동 면허지로 어촌계원만 채취할 수 있다’며 ‘불법 채취를 하지 말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다. 경고가 무색하게 아이들 옆에 물놀이를 하는 중년 여행객들은 바위를 뒤적이며 갯것을 잡고, 그 옆에는 나물을 뜯은 보자기가 놓여 있다.

고려인의 꿈, 비안도에 묻히다

2002년 4월 어느 날이다. 비안도 인근 바다에서 소라를 잡던 잠수부가 소라 대신 청자 243점을 발견했다. 이를 계기로 십이동파도, 야미도 등 인근 바다에서 15년간 대대적인 수중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도자기, 닻 돌, 철로 만든 솥, 시루, 밧줄 등 1만 5천여 점 유물이 빛을 보게 되었다.

비안도 밖으로는 중국으로 이어지는 큰 바다가 펼쳐져 있다. 안쪽으로 고군산군도로 이어져 개경과 한양 밑으로는 남쪽 다도해로 이어져 일본으로 오가는 고대 뱃길이었다. 침몰한 배는 고려시대 국제 상업중심지이자 도읍지였던 개경으로 향하다 고군산군도 인근 바다에서 침몰한 무역선이다. 그 배안에는 당대 최첨단 기술로 만들어낸 청자가 3,000여 점 실려 있었다. 동진강과 만경강에서 내려오는 흙과 모래에 묻혀 오롯이 보관되었다.

갑오징어를 잡는 통발이다. 대나무로 틀을 만들고 그물을 올려서 만든다. 봄철에서 여름까지 제철이다. 어장에서 건져온 통발을 갈무리해 보관하기 위해 운반하고 있다.
갑오징어를 잡는 통발이다. 대나무로 틀을 만들고 그물을 올려서 만든다. 봄철에서 여름까지 제철이다. 어장에서 건져온 통발을 갈무리해 보관하기 위해 운반하고 있다.

영영 다시 빛을 보지 못할 줄 알았던 유물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이러니하게 새만금사업 덕분이다. 방조제가 만들어지면서 물길이 바뀌어 갯벌이 씻겨나가면서 침몰선과 도자기 등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이보다 앞서 1990년대 발굴조사 된 신안앞바다 해저유물에 이어 크게 주목을 받아 ‘보물선’이라는 명칭까지 얻었다.

육상문화재와 달리 해양문화재는 발굴도 어렵지만 지표조사가 이루질 수 없기 때문에 어부나 잠수부의 신고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당시 발견된 고려시대 유물은 전남 해남과 전북 부안 유천리에서 구운 가마들도 포함되어 있다. 비안도에서 발굴된 유물은 전주국립박물관에서 특별전시되고 있다.

마을 안녕과 풍어를 빌었던 팽나무가 번개를 맞아 쓰러지자 그 은공을 기리기 위해 주민들이 정자를 만들어 ‘만금정’이라 불렀다.
마을 안녕과 풍어를 빌었던 팽나무가 번개를 맞아 쓰러지자 그 은공을 기리기 위해 주민들이 정자를 만들어 ‘만금정’이라 불렀다.
 

김준

◆ 김준 섬마실 길라잡이

어촌사회 연구로 학위를 받은 후, 섬이 학교이고 섬사람이 선생님이라는 믿음으로 27년 동안 섬 길을 걷고 있다. 광주전남연구원에서 해양관광, 섬여행, 갯벌문화, 어촌사회, 지역문화 등을 연구하고 정책을 개발을 하고 있다. 틈틈이 ‘섬살이’를 글과 사진으로 기록하며 ‘섬문화답사기’라는 책을 쓰고 있다. 쓴 책으로 섬문화답사기, 섬살이, 바다맛기행, 물고기가 왜, 김준의 갯벌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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