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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과 백래시(Backlash)

2018.07.09 한기봉 언론중재위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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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에 대한 반격은 여성들이 완전한 평등을 달성했을 때가 아니라 그럴 가능성이 커졌을 때 터져 나왔다. 이는 여성들이 결승선에 도착하기 한참 전에 여성들을 멈춰 세우는 선제공격이다.”

미국 저널리스트 수전 팔루디가 1991년에 쓴 책 ‘백래시(Backlash)’에 나오는 말이다. 27년 전의 이 구절을 상기하는 건 한국의 2018년과 들어맞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해 논픽션 부문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받았고, 페미니즘의 영원한 문제작이자 고전으로 통한다. 뉴스위크는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과 비견된다고 서평을 썼다. 더뉴요커는 “전적으로 설득력이 있고 대단히 불온하다”고 했다. 국내에는 2017년 12월에 매우 뒤늦게 출간됐다.

‘백래시’는 국내에선 매우 생소한 단어였다. 그런데 올 들어 이 단어의 사용 빈도가 급속히 높아졌다. 언론도 대학도 여성학계도 백래시를 말하고 있다. 요즘의 ‘불꽃같은’ 페미니즘 운동에서 키워드로 떠올랐다.

‘백래시’는 본디 사회·정치적 변화로 영향력이나 권력이 줄어든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반발하고 반격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사회학 용어다. 팔루디는 책에서 1980년대 레이건 정부의 신보수주의 물결이 미국을 덮치면서 여성을 상대로 어떤 공격이 시작됐는지를 수많은 예를 들어 분석했다. 정치, 미디어, 대중문화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일관된 공격이 벌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런 현상에 ‘백래시’라는 용어를 차용했다.

책을 요약하면 이렇다. 1970년대는 미국에서 페미니즘이 꽃을 피웠다. 남성들도 지지했다. 이 시기에 여성해방은 일종의 유행이었다. 80년대에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집권(1981~1989)하면서 상황은 돌변했다. 정치경제적 상황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보수 성향의 정부는 세출을 줄였고, 노조를 탄압했다.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경제 중심이 이동했고 남성 노동자 수백만 명이 일자리에서 쫓겨났다. 레이건의 주된 지지 계층은 젊은 남성들이었고 이들은 점점 보수적 성향을 띠었다. 그 공격의 대상은 바로 페미니즘이었다.

레이건 정권 창출에 공헌한 극우 성향의 러시 림보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은 당시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 됐다. 그는 “페미니즘은 매력 없는 여자들이 어떻게든 한 자리 끼고 싶어 만든 것”이라고 조롱했다. 정신적으로 극히 비정상적인 싱글 여성의 비참한 최후를 그린 영화 ‘위험한 정사’(1987)와 ‘미저리’(1990)는 크게 흥행했다.

저자는 당시 언론이 동조해서 발표한 연구들이 얼마나 왜곡됐는지를 구체적 수치로 밝혔다. 연구 결과는 대체로 “성공한 여성은 비참한 삶을 산다. 동등한 교육은 여성을 노처녀로 만들고, 동등한 고용은 여성을 불임으로 만들며, 동등한 권리는 여성을 나쁜 엄마로 만든다. 여성이 가정을 버리고 일과 독립을 선택했을 때는 응당 대가를 치른다”는 메시지였다.

뉴스위크는 잘못된 연구 결과를 갖고 ‘결혼 부족 사태’라는 커버스토리를 보도하면서 40세 미혼 여성은 결혼보다 테러리스트에게 살해당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도했다. 이 잡지는 20년이 지난 2006년 같은 주간에 ‘20년 전 우리는 왜 틀렸는가’라는 제목으로 팔루디의 백래시 비판을 언급하며 잘못을 인정했다.

한국의 여성계는 2018년 한국 사회에도 드디어 백래시가 시작됐다고 주장한다. 모바일 게임을 하는 남성들이 게임 작가가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퇴출을 요구했고 결국 그 작가는 계약이 해지됐다. 섹스칼럼니스트 은하선씨는 5월에 서강대 총학생회 초청으로 “섹스, 많이 해봤어?”라는 제목으로 강연할 예정이었으나 일부 남학생들의 거센 반발로 취소됐다. 이에 대한 항의표시로 여성학자 정희진씨는 ‘미투를 다시 생각한다’라는 제목의 강의를 스스로 취소했다. 은씨는 이어 연세대에서 논란과 반대집회 속에서 페미니즘 강연을 했으나 그를 초청한 총여학생회를 폐지하라는 남학생들의 서명이 이어졌다. 캠퍼스 안에선 페미니즘 대자보가 찢겼다.

여성 연예인은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공격받았다. 페미니즘에 연대하는 글을 올리는 여성은 ‘꼴페미’ ‘메갈X’(여성들의 남성혐오 커뮤니티 ‘메갈리아’)이라는 욕설을 들었고 그 직장에는 댓글 공격이 시작된다. 페미니즘 행사라는 이유로 장소 대관이 취소되고, 페미니즘 셔츠를 입었다고 아르바이트에서 해고된 사례 등도 나왔다.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한 신지예 녹색당 후보의 선거벽보는 많은 곳에서 훼손됐다.

급기야 성균관대 여학생들은 6월 5일 ‘백래시 박살대회, 결국엔 우리가 이긴다’는 집회를 가졌다. 이들은 “미투로 뜨거웠던 캠퍼스는 이내 백래시와 마주했다”며 “미투 이전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외쳤다. 여성민우회는 ‘페미니즘 백래시, 그런 이유로 멈추지 않겠다’를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다.

반격에는 재반격이 따랐다. 여성들은 더 모였다. 포털사이트 다음의 여성 카페인 ‘불편한 용기’가 5월부터 서울 혜화역에서 주최한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 시위’는 7월 7일 3차 집회까지 ‘생물학적’ 여성만의 시위로는 매번 최대 규모 기록(주최 측 집계, 2만-4만5천-6만)을 세웠다. 건국 이래 여성만 모인 시위로는 최대다. 한국의 페미니즘 사전은 당연히 ‘역사적’이라고 기록할 것이다.

여성에 대한 집단공격은 (일부) 남성이 먼저였다. 인터넷 커뮤니티 일베(일간베스트)가 시작이었다. 여성들은 한참 후에 메갈리아를 만들어 반격하기 시작했다. 남성에게 받은 피해를 같은 방식으로 돌려준다는 이른바 ‘미러링’(mirroring·반사하기)이다. ‘된장녀’는 ‘한남충’으로 되돌아갔다. 원본이 없으면 카피도 없는 것이지만, 침묵했던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니 성대결로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2016년 5월 17일 강남역 10번 출구 살인사건이 촉발한 전국의 여성 시위는 페미니즘의 몸체가 비로소 처음 드러난 사건이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제대로 이해하려들지 않았다. 올해 우리는 비로소 그 거대한 실체를 목격하고 있다. 미투 운동, 홍익대 누드모델 몰카 사건과 경찰수사 논란, 스튜디오 성추행과 불법촬영 사건이 이어지며 페미니즘은 비로소 모두가 한 마디 하는 정치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다. 한 여성학자는 “이제 한국 여성들은 페미니즘을 생존기술로 습득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의 페미니즘은 미투와 몰카를 벗고 더 나가고 있다. 강력한 20대가 주축인 영페미니즘은 탈코르셋과 낙태법 폐지를 외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페미니즘의 본질을 보려는 노력보다는 우선 그 혐오와 갈등과 대결의 장을 우려한다. 서울교통공사는 7월 5일 지하철 역내에 의견광고를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민원과 갈등이 많다는 이유다. 페미니스트를 지지한다는 버스정류장 옥외광고도 해당 구청에서 허가 여부를 두고 말이 많다. 구청 관계자는 이렇게 말한 것으로 보도됐다. “페미니즘은 어느 한쪽이 가진 신념이며 반대하는 사람도 존재한다. 불필요한 사회적 갈등이 발생할 우려가 있다.” 아예 논란의 소지 자체를 없애겠다는 것이다. 미투에 대응했던 남성들의 펜스룰(Pence Rule) 방식과 같은 인식이다.

최초로 페미니스트임을 선언한 문재인 대통령은 “우리에게도 대전환이 요구되는 시점”이라고 말했다. 이 세상 절반이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건 영원불멸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페미니즘은 저절로 온 게 아니고 투쟁의 산물이었다는 것도 분명히 맞다. 한 가지 유감.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생물학적 남성들도 혜화역 길바닥에 함께 드러눕고 싶다.

한기봉

◆ 한기봉 언론중재위원/칼럼니스트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부국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글쓰기와 한국 언론에 대해 강의했다. 언론보도로 피해를 본 사람과 언론사 간 분쟁을 조정하는 언론중재위원이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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