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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 강을 찬양한 슈만, 라인 강에 몸을 던지다

[정태남의 클래식 여행] 독일/뒤셀도르프

2018.07.31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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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 강이라면 독일 민요 ‘로렐라이’가 먼저 머리에 떠오른다. 로렐라이 전설을 머금은 라인 강은 스위스의 알프스 산맥에서 발원해 독일의 마인츠·코블렌츠·본·쾰른·뒤셀도르프 등 여러 도시를 지나 네덜란드를 거쳐 북해로 흘러들어 간다.

이 도시들 중에서 하류의 세 도시  본·쾰른·뒤셀도르프는 서로  매우 가깝다. 기차로 본-쾰른 구간, 쾰른-뒤셀도르프 구간은 모두 20분대 거리이다.  

뒤셀도르프는 현재 독일에서는 함부르크 다음으로 중요한 항구도시이며 국제적인 비즈니스 도시이다. 이곳에서 가장 매력적인 장소 중의 하나는 라인강 제방 산책로이다. 여름이 되면 이 산책로에서 사람들은 느긋하게 삶의 기쁨을 맛보는데 마치 지중해 도시 같은 분위기이다. 이 산책로는 1990년에서 1997년 사이에 조성되면서 옛 항구의 일부가 보존되었다.

라인강과 라인강 제방 산책로.
라인강과 라인강 제방 산책로.

700년 역사의 뒤셀도르프에서 라인 강과 관련해 낭만주의 시대의 중요한 두 인물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그들은 하이네(H. Heine)와 로베르트 슈만(R. Schumann)이다. 하이네는 1797년에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이 도시에서 15세까지 성장했고 1831년부터는 독일을 떠나 프랑스에서 그의 생애 마지막 25년을 보냈다.

전 세계에서 애창되는 민요 ‘로렐라이’는 그가 1824년에 쓴 낭만적인 서정시 ‘디 로렐라이(Die Lorelei)’에 질혀(F. Silcher)가 1837년에 곡을 붙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슈만은 40세 때 뒤셀도르프로 이주해서 많은 작품을 썼는데 그중에서 ‘라인 교향곡’이 가장 유명하다.

뒤셀도르프에는 이 두 사람과 관련된 건물이 공교롭게도 같은 거리에 있다. 라인강 제방 산책로 안쪽 구 시가지에 있는 널따란 광장 칼스플라츠의 남쪽은 빌커 거리(Bilker Strasse)와 연결되는데 이 길 12번지는 하이네 연구소, 15번지는 슈만의 집이다.

하이네 연구소의 2층 창문들은 ‘디 로렐라이’로 장식되어 있다. 이 시는 로렐라이가 바위 언덕 위에 앉아 황금빛 머리를 빗으며 노래를 부르면 뱃사공들은 그녀의 아름다움과 그녀의 노래에 홀려 결국 배가 물결에 휩쓸려 바위에 부딪혀 난파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로렐라이 언덕은 마인츠에서 코블렌츠 사이에 라인 강이 굽이쳐 흐르는 계곡에 있다.

빌커 거리. 오른쪽 흰 건물이 슈만의 집이다.
빌커 거리. 오른쪽 흰 건물이 슈만의 집이다.

한편, 하이네 연구소에는 슈만에 관한 자료도 전시되어 있는데 슈만의 연가곡집 ‘시인의 사랑’의 가사는 다름 아닌 하이네의 시이다.

하이네 연구소 건너편에 있는 슈만의 집 외벽에는 슈만이 이곳에서 1852년 9월 1일부터 1854년 3월 4일까지 살았다는 명판이 보인다. 슈만은 작곡가 겸 비평가로서 유명했고 그의 아내 클라라는 당시 가장 뛰어난 피아니스트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그가 뒤셀도르프 시의 음악감독으로 초빙 받고 1850년 9월에 가족과 함께 이곳으로 왔을 때 이곳 문화계 엘리트층으로부터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라인 강변을 산책했는데 당시에는 라인강 제방산책로가 없었으니 옛 항구를 보면 당시의 강변 모습을 조금이나마 상상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새로운 분위기 속에서 슈만은 먼저 새로운 교향곡을 작곡했다. 이것이 바로 교향곡 3번, 일명 ‘라인 교향곡’이다. 그는 1851년 2월 6일 뒤셀도르프에서 이 작품을 자신의 지휘로 초연해 아주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런데 그에게 서서히 어두운 그림자가 엄습하기 시작했다. 고질적인 정신분열증세가 가끔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슈만의 집 입구 벽에 붙은 슈만과 클라라의 부조.
슈만의 집 입구 벽에 붙은 슈만과 클라라의 부조.

게다가 그는 시 당국과 갈등을 빚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그가 생애 처음으로 공직을 맡았던 데다가 기질적으로 오케스트라와 같은 조직을 이끄는 일이 적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그는 결국 사퇴하고 말았다. 그런 후에는 가벼운 연주여행을 하거나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으면서 비교적 소강상태를 유지했다.

하지만 1854년에 접어들면서부터 급격히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2월 27일 아침 라인 강에 그대로 몸을 던졌다. 마치 로렐라이에 홀려 강물에 빠지던 뱃사공들처럼… 다행히도 그는 구조되었고 3월 4일에는 본(Bonn) 외곽 엔데니히의 정신병동으로 옮겨졌다.

슈만은 그곳에서 격리되어 투병하게 되는데 힘겹게 일곱 자녀를 홀로 키워야했던 클라라는 약 2년 5개월이 지난 다음에야 남편 문병이 가능했다. 병상의 슈만은 그녀를 알아봤는지 뭐라고 몇 마디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이틀 후인 7월 29일 오전 4시, 홀로 남겨진 채 영원히 눈을 감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그해 1856년, 하이네도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슈만보다 5달 먼저.

정태남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미술·언어·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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