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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잃고 제비는 쌀을 물어오다

[김준의 섬섬옥수] 교동도

2017.12.21 김준 섬마실 길라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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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백평야가 한눈에 들어오는 ‘밤머리’ 허리에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 오른다. 그 뒤로 너댓명의 가족이 따른다. 방앗간에서 스쳤던 일행이다. 단순한 여행객이라 생각했는데 옷매무시가 그게 아니다. 작은 아이 손에 꽃이 들려 있는 것을 보니 저 노인도 부모님 손을 잡고, 형이나 누나 손을 잡고 ‘조강’을 건넜을 것 같다.

잠시 오르자 비석이 보이고 그 너머로 철조망이다. 피난민은 실향민이 되어, 지척에 고향을 두고 부모 형제 친지 친구를 그리며 1988년 망향단과 비를 세웠다. 연백 연안의 진산 비봉산과 남산을 뒤로 하고 세워진 비석 앞에 꽃다발이 놓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쇠기러기 한 무리가 연백으로 날아간다.

교동이라는 땅이름은 신라 경덕왕 때 ‘교동현’에서 비롯되었다. 그 전에 ‘대운도’라 불리기도 했다. 조선시대까지 교동도는 이웃한 강화도와 통합분리를 반복하며, 행정구역도 군과 읍을 오갔다. ‘교동면’으로 정착한 것은 일제강점기이다. 당시 교동군과 강화군이 합해지면서 동서남북 네 개 면을 화개와 수정, 두 면으로 통합하고, 1934년에 교동면으로 마저 합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바다에 철조망을 두른다고 물길이 돌아가지 않듯이 새들도 자유롭게 남북을 오간다.
바다에 철조망을 두른다고 물길이 돌아가지 않듯이 새들도 자유롭게 남북을 오간다.

바다와 섬에 철조망을 두르다

우리나라의 섬살이는 농사도 짓고, 바다에도 의지하는 반농반어 생활이 많다. 고기잡이를 못해도 바지락과 낙지를 잡고 해초를 뜯어 밥상에 올리는 정도는 하며 산다. 설령 산중해변으로 전혀 갯것을 접하지 못하는 마을도 바닷길을 오가며 소통하고 살아왔다.

그런데 사방팔방이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바다에 의지하지도 바닷길로 통하지 못하는 섬도 있다.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 교동도, 볼음도, 주문도, 강화도 등 서해 접경지역에 위치한 섬살이가 그렇다. 그 중에서도 바다와 갯벌 잃은 곳이 교동도다.

교동북쪽과 연백평야 사이에 3㎞ 남짓 수로 ‘조강’이 남북 경계를 이룬다. 경기만 최북단에 위치한 강화군에 딸린 섬이다. 한 때 교동군으로 조기잡이 등 어업은 물론 해상교통과 군사요충지였다. 조수간만의 차이가 매우 커서 물이 빠지면 배를 접안하기 어려워 직선으로 20분도 되지 않는 거리를 한 시간 넘게 돌아가야 했다.

1950년대 말, 교동도에서 인천으로 나가려면 7시간이 걸렸다. 당시 뱃길은 교동 남산포에서 석모도, 강화 외포리와 선수를 지나 장봉도, 시도(당시에는 살섬이라 함)를 거쳐 인천 만석동 괭이부리 선착장에 닿았다. 최근 교동대교가 개통되기 전까지 강화도 창후리와 월천포를 잇는 뱃길이 유일하게 뭍으로 잇는 통로였다.

격강천리라더니, 바라보고도 못가는 고향일세, 한강 임진강 예성강은 만나 바다로 흘러드는데 인간이 최고라더니 날짐승만 못하구나
격강천리라더니, 바라보고도 못가는 고향일세, 한강 임진강 예성강은 만나 바다로 흘러드는데 인간이 최고라더니 날짐승만 못하구나

처음 공자를 모시다

예나 지금이나 학교는 지역 구심점이다. 조선시대 향교가 성내동이나 교동이나 읍내에 위치한 것도 그랬고, 근대 들어 힘이 있는 마을에서 학교를 유치한 것도 다를 바 없다. 이렇다 할 공공기관이 없는 섬에서 학교는 말할 필요도 없다.

<교동향토지>에 따르면 읍내리 성내동은 교동현감이 머물던 곳으로 감옥서, 대운관, 이사영, 교련관청, 포도관청 등 관아가 위치해 있던 곳이다. 하니 이곳에 교동향교가 위치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향교 외에도 교동읍성, 남문이 위치해 있어 옛 중심지였음을 짐작케 한다. 오늘날 면사무소, 파출소, 농협 등 각종 기관이 위치한 대룡리와 견줄만한 곳이었다.

교동도처럼 섬에 향교가 설치된 곳은 전라도 지도군(신안군 지도읍) 돌산군(여수시 돌산읍) 뿐이다. 조선시대 ‘1군 1교’ 원칙에 따른 것이다.

교동항교는 1127년(고려 인종 6) 국내에서 최초로 세워졌다. 향교는 공자를 모시는 대성전과 강학을 하는 명륜당, 그리고 삼문과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교동향교 대성전에 공자 초상은 1286년 안향이 원나라에서 들여와 처음 모셨다고 한다. 대성전은 지역에서만 아니라 전국 향교 중 각별한 곳으로 매년 전국에서 유림들이 찾아와 제향을 올린다.

일제강점기에는 교동항교는 안에 사립 ‘화개농업학교(1906)’를 설립했다. 이 사립학교는 후에 6년제 ‘교동공립보통학교’(1912)가 만들어졌다. 교동초등학교의 전신으로 지금은 학생 46명에 교사 6명이 근무하고 있다.  

교동향교, 대성전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공자를 모신 곳으로 전국 유림들이 찾고 배향하는 곳이다.
교동향교, 대성전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공자를 모신 곳으로 전국 유림들이 찾고 배향하는 곳이다.

향교와 함께 교동도에서 찾아 볼 유적지로 교동읍성과 연산군 유배지가 있다. 한양과 가깝지만 조류가 거칠어 쉬이 오갈 수 없어 고립된 교동도는 왕족 유배지로 유명하다. 이곳에 유배된 왕족으로는 연산군과 광해군이 대표적이지만, 이외 안평대군, 임해군, 능창대군, 숭선군, 익평군 등도 있다.

이들 중에는 궁궐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에서 사약을 받고 생을 마치기도 했다. 무덤은 물론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연산군 유배지도 정확한 장소를 알 수 없고, 유배지로 추정되는 곳에 표지석만 외롭게 서있다. 교동읍성은 1629년(인조 7)에 쌓은 것으로, 경기수영이 섬에 설치되면서 교동현도 도호부로 승격되었던 시기다.

자연스럽게 경기수사가 교동부사를 겸하면서 인근 도서를 관할하던 시기였다. 읍성 안에는 민가와 경작지가 들어서 있지만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대동지지>에는 성문이 4개에 치성 3개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현재는 유량루라는 남문만 복원되어 있다.

교동읍성 남문.
교동읍성 남문.


작은 섬에서 읽는 현대사

2016년 여름, 북한 주민 한 명이 부유물을 잡고 조강을 건너 교동도로 귀순해 왔다. 갯골은 직선거리로 3킬로미터 수심도 깊지 않다. 철책선이 드리워지기 전까지 연백과 교동은 수시로 오가며 식량과 소금과 해산물을 주고받고 혼사도 오가는 이웃이었다. 이를 입증하듯 교동 북쪽이나 북서쪽에는 말탄포, 밤머리, 북진나루 등은 모두 연백으로 오가는 포구였다.

조선시대 고, 인, 전, 안씨 등 세거씨족을 중심으로 7천여 명이 살았던 교동도는 한국전쟁기에는 인구가 2만9천7백여 명으로 늘었다. 이중 원주민은 1만여 명, 원주민보다 많은 1만9천여 명이 피난민이었다. 연백 지금 연안군에서 피난을 온 사람들이다. 연백은 쌀과 소금이 풍족했던 지역이다. 해방 당시 38선 이남 지역으로 교동과 교류가 잦았다.

교동에서는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강화나 인천이 아니라 연백이나 개성으로 상급학교를 진학하기도 했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작은 섬에서 ‘인공정치’와 ‘우익정치’가 반복되면서 학연과 지연 그리고 크고 작은 연결망은 오히려 수많은 피해로 이어졌다.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교동에 주둔했던 유엔군유격대의 의해 부역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183명이 학살된 것으로 조사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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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도 포구도 잃다

연백과 이어지는 네 개의 포구 외에도 강화도나 인천을 잇는 죽산포, 빈장포, 남산포, 동진나루, 월천포, 호두포 등이 있다. 이중 교동 서남쪽에 위치한 죽산포는 한국전쟁 직전까지 매우 활발했던 선창이다.

연평도 조기잡이가 파시를 이룰 때 한강 마포나 인천어시장으로 나올 때 하루 쉬는 곳이요. 식고미를 챙겨 어장으로 나갈 때 갈무리를 하는 곳이다. 그곳에 뱃사람을 위한 술집도 있었고 여자들도 있었다. 배들이 포구로 들어서면 돛대가 대나무처럼 많아서 죽산포라 했다고 한다. 지금 그곳에는 건어물과 젓갈을 판매하는 집만 달랑 한두 채 있을 뿐이다.

또 주목해야 할 곳이 남산포다. 고려 때 송나라 사신이 일을 마치고 돌아갈 때 날씨를 살피고 무사 귀국을 기원하며 제사를 지내던 ‘사신당’이 있었던 곳이 남산포다. 한국전쟁으로 없어진 당집은 복원되어 있다. 당집 옆에는 경기도 일대에서 볼 수 있는 소실된 것을 다시 건립하였다.

그 옆에 잘 만들어진 터줏가리와 막걸리 두 병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터줏가리는 경기도 일대에서 볼 수 있는 가신으로 택지 안전을 관장한다. 장독대 근처에 모시기도 하는데 항아리 안에 곡식이나 동전을 넣고 ‘짚주저리’를 틀어서 씌워 신체로 모신다. 집 밖에 모신 경우는 드물다. 남산포는 삼도수군통어영이 설치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 인조 7년(1629) 한강 조운과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나들목인 교동도에 남양 화량진에 설치되어 있던 경기수영 옮기고 교동현을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그리고 몇 년 후 경기, 황해, 충청 삼도수군통어영을 이곳에 설치해 수군을 총괄했다. 작은 배 한척 졸고 있는 자그마하고 한적한 포구에 새겨진 역사가 크기만 하다. 

고려 때 송나라 사신이 머물기도 했다는 남산포는 한가롭고, 복원한 사신당만 덩그렇게 졸고 있는 배를 지킨다.
고려 때 송나라 사신이 머물기도 했다는 남산포는 한가롭고, 복원한 사신당만 덩그렇게 졸고 있는 배를 지킨다.

해방무렵 교동도 인사리를 종착포구로 지금은 개풍군에 속하는 고미포, 당머리, 영정포를 거쳐 서울 염창(염창동) 선이봉(영동포) 마포로 이어지는 한강선이 운항을 하기도 했다. 전쟁 후 간첩선이 자주 출몰하여 시끄러워지자 강화도 창후리에서 교동도 남산포, 미법도 서검도 볼음도 주문도 등으로 이어지는 어로저지선을 그었다.

명칭은 후에 ‘어로허용선’으로 바뀌었지만, 내용은 그어진 선 북쪽으로 조업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교동 어장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더 이상 고기잡이를 할 수 없게 되면서 포구도 기능을 잃었다. 교동을 둘러싼 10여개의 포구 중에 민간에게 열린 포구는 유일하게 월선포 뿐이다. 이마저 교동대교 개통으로 기능을 잃었다.

바다를 잃고 ‘교동쌀’을 얻다

수확을 끝낸 논에는 큰기러기와 쇠기러기가 무리지어 먹이를 줍고 있다. 새들이 많이 찾는 섬은 생태계가 건강하여 먹을 것이 풍부하며 인간의 간섭이 적은 곳이다. 새의 눈으로 보면 풍요롭고 편안한 곳이다. 난정저수지나 고구저수지에서 개리나 오리류도 발견할 수 있다. 이들 겨울철새외에도 노랑부리백로, 저어새 등 여름철새도 갯벌에서 발견된다.

교동도는 본래 동쪽에 화개산, 남서쪽에 수정산, 서북쪽에 율두산을 중심으로 세 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 섬 사이로 한강, 예성강, 임진강에서 흘러온 토사들이 쌓여 섬 주변으로 하구갯벌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고려 대몽항쟁을 위한 강화천도 때 군량미 확보차원에서 비롯된 간척과 매립은 조선을 거쳐 일제강점기에 대규모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교동평야는 강화군 전체 경지면적 22%, 교동도 면적 70%에 이르며, 이곳에서 생산한 ‘교동쌀’이 명성을 얻게 되었다.

논이 이렇게 많지만 한국전쟁기에는 내리 이어진 흉년과 밀려드는 피난민으로 섬사람은 굶어죽기도 했다. 겨우 마른 쇠비름을 뜯어다 세들어 사는 피난민이 가져온 쌀 한 줌 얻어 죽을 쒀서 나눠 먹으며 허기를 면했다. 당시 마마와 홍역이 창궐했지만 이것보다 무서운 것이 배고픔이었다. 대룡시장에서 만난 노인들의 이야기다.

대룡시장은 여행객들이 가장 즐겨 찾는 교동도 명물이다. 몇 백미터 되지 않는 좁고 짧은 골목길에 많은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대룡시장은 여행객들이 가장 즐겨 찾는 교동도 명물이다. 몇 백미터 되지 않는 좁고 짧은 골목길에 많은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제비를 기다리는 사람들

교동동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는 대룡시장이다. 대룡리에 시장이 생긴 것은 한국전쟁 후 일이다.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니다. 황해도 연백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마을을 이루고,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사고 나누면서 시장이 만들어졌다. 이들에게 대룡시장은 잠시 잠깐 머물다 전쟁이 끝나면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마련한 임시거처였다.

그래서 남의 땅에 임시로 기둥을 세우고 얼기설기 초막으로 바람을 피했다. 원조품으로 덧대고 새마을운동 시절 배급된 목재와 슬레이트로 모양을 냈지만 지금도 그대로 60년대 70년대 풍경이다. 따로 영화세트장을 만들 필요도 없다. 미장원, 분식집, 통닭집, 전파사, 신발가게, 이발관, 다방, 식당, 철물점, 잡화상 등. 자동차 한 대 겨우 지날 수 있는 폭에 길이도 4백 미터 남짓이다. 이곳저곳을 구경하다 할머니와 눈이 마주쳐 가게 안으로 들어가 장갑 한 켤레를 샀다. 4천원이란다. 5천 원짜리 한 장 드리고 거스름돈 대신 시장이야기나 해달라고 했다.

남편 여덟 살에 온 어머니 손을 잡고 전쟁을 피해 연백에서 섬으로 들어왔다. 끝나면 돌아가겠다는 생각으로 겨우 ‘쌀 한 말’ 들도 나와 50여년을 눌러 앉았다. 남편처럼 하나 둘 피난민들이 모여들면서 움막을 지었다. 떡 장사도 하고 국수장사도 했다. 전쟁이 끝나자 움막은 집이 되었고, 속은 바뀌지 않고 초가만 슬레이트에서 인조기와로 바뀌었다.

좁은 시장골목에 해마다 봄이면 어김없이 제비가 날아든다. 농촌마을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제비들이다. 농촌도 예전 같지 않고 제비들이 좋아하는 벌레도 많지 않고, 둥지를 틀만한 처마도 없다. 여기에 비하면 대룡시장은 제비들에게 최적의 장소다. 눈높이의 낮은 처마가 흠이지만 그래도 따뜻하게 살펴주는 시장사람들과 오염되지 않는 섬에 먹을거리도 풍족하다. 이제 시장사람들이 제비를 기다린다.

김준

◆ 김준 섬마실 길라잡이

어촌사회 연구로 학위를 받은 후, 섬이 학교이고 섬사람이 선생님이라는 믿음으로 27년 동안 섬 길을 걷고 있다. 광주전남연구원에서 해양관광, 섬여행, 갯벌문화, 어촌사회, 지역문화 등을 연구하고 정책을 개발을 하고 있다. 틈틈이 ‘섬살이’를 글과 사진으로 기록하며 ‘섬문화답사기’라는 책을 쓰고 있다. 쓴 책으로 섬문화답사기, 섬살이, 바다맛기행, 물고기가 왜, 김준의 갯벌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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