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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의 왕 슈베르트, 음악의 성지에서 태어나다

[정태남의 클래식 여행] 오스트리아/빈(Wien)

2018.05.21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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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서 빈(Wien)만큼 그토록 많은 음악의 천재들을 포용해온 도시는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빈은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음악의 성지’나 다름없는 도시이다. 빈에서 활동한 음악가라면 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슈베르트·브루크너·브람스·말러 등과 같은 대음악가들이 먼저 머리에 떠오른다. 그런데 그들 중 오로지 슈베르트만 빈 사람이었다.

슈베르트의 친구였던 화가 빌헬름 리더가 그린 슈베르트 초상화.
슈베르트의 친구였던 화가 빌헬름 리더가 그린 슈베르트 초상화.

빈의 거리를 걸으면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여행> 중 ‘보리수’의 청아한 선율이 가슴 속 깊이 파고드는 듯하다. 또 그의 피아노 곡 <즉흥곡 Op.142 No.2>는 빈 특유의 우아한 멜랑콜리와 명상적인 분위기로 인도하는 듯하다. 그런가하면 리스트(F. Liszt 1811-1886)가 슈베르트의 가곡을 피아노곡으로 편곡한 작품은 오묘한 시적인 세계로 인도하는 듯하다. 
 
슈베르트가 활동할 때의 빈은 중세의 도시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였다. 나중에 이 도시성벽은 철거되었고 1865년에는 그 자리에 길이 4킬로미터의 널찍한 순환도로 링슈트라세(Ringstrasse)가 완공되어 도로변에는 시청·의사당·궁정극장·미술사 박물관·자연사 박물관·오페라극장 등 많은 공공 건축물이 세워졌으며 숲과 공원이 조성되었다.
 
슈베르트 생가는 링슈트라세의 북쪽 쇼텐토어 지하철역에서 북쪽으로 약 2킬로미터 떨어져 있는데 37번이나 38번 전차를 타면 네 정거장이고 7분 정도 걸린다. 슈베르트가 살던 시절 이곳은 빈 외곽의 히멜포르트그룬트(Himmelpfortgrund)라는 마을이었다.

오스트리아 국기가 꽂혀있는 슈베르트 생가 건물. 슈베르트는 이곳에서 4살까지 살았다.
오스트리아 국기가 꽂혀있는 슈베르트 생가 건물. 슈베르트는 이곳에서 4살까지 살았다.

슈베르트 생가의 주소는 누스도르퍼 슈트라세(Nussdorfer Strasse) 54번지. 수수한 2층짜리 건물 입구에는 오스트리아 국기가 꽂혀있다. 건물 안에는 길쭉한 작은 중정을 중심으로 아파트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중정 한쪽에 재현해 놓은 물을 길어 올리던 펌프는 당시 이곳 생활상을 엿보게 한다.
  
슈베르트는 빈에서 태어나 빈에서 세상을 떠난 빈 토박이였지만 그의 부모는 외지 사람이었다. 아버지 프란츠 테오도어 슈베르트(1763-1830)는 모라비아 지방(현재 체코의 동부지방) 출신으로 보다 나은 삶을 찾아 21세가 되던 해에 제국의 수도 빈으로 왔다.

이곳에서 그는 슬레지아(현재 체코의 북동부지역) 출신의 엘리자베트를 우연히 알게 되어 결혼했고 히멜포르트그룬트에서 정식교사가 되었다. 이 건물에는 부엌이 딸린 아파트가 16개 있었는데 그는 그중 두 채를 세내어 1층은 학교로, 2층은 주거용으로 사용했다.

슈베르트 생가 건물의 중정.  한쪽 구석에 펌프가 보인다.
슈베르트 생가 건물의 중정. 한쪽 구석에 펌프가 보인다.

당시 교사들은 국가 보조없이 오로지 학부모들이 내는 수업료에만 의존했다. 그가 맡고 있던 아이들의 반가량은 무료로 수업을 받았기 때문에 학교 경영이 쉽지 않았다. 이 부부는 모두 14명의 아이들을 낳았는데, 그중 12명이 이 집에서 태어났고 그중 살아남은 아이는 다섯 명 뿐이었다. 12번째 아이 프란츠 슈베르트가 이 집의 좁은 부엌방에서 태어난 것은 1797년 1월 31일.

한편 그의 아버지가 좋은 선생이라는 소문이 나자 학생 수가 크게 늘어났다. 그는 더 넓은 학교가 필요했기 때문에 1801년에는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그러니까 슈베르트는 이 집에서 태어나 4년 반 동안 유아시절을 보냈던 것이다.
  
슈베르트 생가는 박물관으로 단장되어 그가 음악적으로 성장해가던 시기의 자료, 그의 친구들에 관한 자료,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했던 시기의 자료, 그의 초상화, 그가 쓰던 기타와 피아노 등 여러 가지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양적으로 좀 빈약하다.

슈베르트가 쓰던 안경.
슈베르트가 쓰던 안경.

하지만 방문객의 마음을 강력하게 휘어잡는 것이 하나 있다. 다름 아닌 슈베르트의 안경이다. 이것이야말로 슈베르트의 체취를 그대로 느끼게 해준다. 이 안경을 쓴 슈베르트의 초상화는 그의 친구였던 화가 빌헬름 리더가 1825년에 수채로 그렸던 것을 50년 후에 유화로 다시 그린 것이다.
 
슈베르트는 31살이란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가 남기고 간 작품은 다른 어떤 위대한 작곡가가 남긴 작품보다 더 많다. 특히 그는 독일 낭만가곡의 기틀을 세우고 그 예술적 가치를 무한히 높였기 때문에 가곡의 왕으로도 불린다.

그런데 그는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과 같이 전 유럽에 명성을 날렸던 그의 선배 음악가들과는 달리 그의 명성은 지역적으로만 한정되어 있었으며 그의 천재성은 그의 친구들 사이에서만 알려졌을 뿐이었다.

슈베르트의 초상화가 있는 전시실. 슈베르트의 음악도 감상할 수 있다.
슈베르트의 초상화가 있는 전시실. 슈베르트의 음악도 감상할 수 있다.

슈베르트가 죽은 지 5년 뒤인 1833년에 키제베터라는 독일 학자는 빈의 음악계에 대해 글을 쓰면서도 슈베르트에 대해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을 정도였으니… 오늘날 관점으로 보면 이런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슈베르트가 진정으로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은 죽은 후 상당한 세월이 흐른 다음이었다. 후세의 대음악가 리스트는 말했다. 슈베르트야 말로 전대미문의 가장 뛰어난 음악의 시인이라고.

정태남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미술·언어·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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