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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보르작의 선율 따라 프라하 산책하기

[정태남의 클래식 여행] 체코/프라하(Praha)

2018.08.20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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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 시내를 관통하며 흐르는 블타바 강변에는 체코의 역사가 시작된 비셰흐라트 언덕이 솟아있고 또 체코에서 가장 중요한 공연장인 루돌피눔과 국립극장이 세워져 있다. 1881년에 개관한 국립극장은 원래 가설극장이 있던 자리에 체코국민의 성금으로 세워진 오페라 연극 발레의 전당이고 1885년에 개관한 루돌피눔은 음악과 미술을 아우르는 예술의 전당이다.

블타바 강변의 루돌피눔. 체코 최고의 예술의 전당이다.
블타바 강변의 루돌피눔. 체코 최고의 예술의 전당이다.

루돌피눔에는 체코를 대표하는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상주한다. 이 오케스트라가 처음으로 이곳 무대에서 선보인 것은 1896년 1월 4일. 그때 지휘자가 바로 드보르작이었다. 그가 연주했던 홀은 지금 그의 이름을 붙여 ‘드보르작 홀’이라고 부른다. 루돌피눔 앞 광장에는 그의 동상이 루돌피눔을 바라보며 세워져 있다.

드보르작은 체코를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 그의 대표작은 미국에서 작곡한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이다. 이 교향곡의 제2악장의 선율은 ‘Going Home’이라는 제목의 노래로도 널리 불려지는데 그 속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인간적인 따스함이 녹아져 있다.

그는 1891년 9월에 미국 뉴욕 음악원 학장으로 초빙받아 3년 동안 ‘신세계’에서 활동했는데 대서양을 건너기 전에 이미 유럽에서 확고한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즉 런던과 모스크바로부터 초청 연주 뿐 아니라 1890년 체코 과학 아카데미 정회원으로 추대받았고 1891년 미국으로 떠나던 해에 프라하 카렐 대학교에 이어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도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던 것이다.

루돌피눔 앞에 세워진 드보르작의 동상. 강 건너편 멀리 언덕 위에 성 비투스 성당과 프라하 성이 보인다.
루돌피눔 앞에 세워진 드보르작의 동상. 강 건너편 멀리 언덕 위에 성 비투스 성당과 프라하 성이 보인다.

이처럼 그는 체코출신 작곡가로는 처음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음악가였다. 그가 살던 시대의 체코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며 공용어는 독일어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드보르작은 체코 국민주의 음악파의 선구자 스메타나가 못다 이룬 체코 음악의 다양한 가능성을 꽃피우고 그것을 세계의 음악으로 승화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것이다.

이렇게도 유명했던 드보르작은 ‘금수저’ 출신은 아니었다. 그는 1840년 프라하 근교의 작은 마을 넬라호제베스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작은 여관과 정육점을 경영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12세 때 가까운 소도시 즐로니쩨에서 기본적인 독일어와 음악교육을 받은 다음, 16세가 되던 해에 프라하에 와서 오르간 학교에 입학했다.

수줍은 시골 소년이 이곳에서 이겨내야 할 어려움은 많았다. 학교에서는 독일어가 서툴러서 왕따 당하기 일쑤였고 친척집에 얹혀살면서 돈이 없이 이곳저곳에서 비올라를 연주하며 생활비를 마련해야 했으며 학교 수업이 고루타분 했기 때문에 혼자서 음악을 깨우쳐나가야 했다.

지트나(Zitna)거리 14번지 드보르작이 마지막으로 살던 아파트 건물 외부에 세워진 드보르작 흉상.
지트나(Zitna)거리 14번지 드보르작이 마지막으로 살던 아파트 건물 외부에 세워진 드보르작 흉상.

1860년 19세 때 학교를 마쳤을 때, 마침 비올라 연주자를 구하고 있던 카렐 콤자크 악단에 입단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제국내의 여러 피지배 민족들에게 유화정책을 쓰기 시작했는데 체코 사람들에게는 체코의 연극과 오페라, 체코어로 번역된 외국 오페라를 상연할 국민극장의 설립을 허가했다.

그리하여 국립극장이 세워지기 전 임시로 사용할 가설극장이 세워졌고 카렐 콤자크 악단은 바로 이곳에 전속됐다. 드보르작은 1862-1871년까지 9년간 가설극장에서 공연되는 수많은 작품의 초연에 참여함으로써 유명한 음악가들의 새롭고 흥미 있는 곡들을 폭넓게 접해볼 기회를 가졌다.

하지만 급료가 낮아 피아노 개인 레슨도 했는데 이때 제자의 동생과 눈이 맞아 1873년 11월 결혼했다. 결혼 후에는 성 보이테흐 성당의 오르가니스트 자리를 맡으면서 작곡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게 되었고 1873년 3월에는 애국적인 내용을 담은 칸타타 <빌라 호라의 후예들>을 초연하여 대호평을 받아 작곡가로서 처음으로 프라하에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가설극장이 있던 자리 세워진 국립극장. 드보르작의 오페라는 이곳에서 초연됐다.
가설극장이 있던 자리 세워진 국립극장. 드보르작의 오페라는 이곳에서 초연됐다.

이어서 1875년부터는 오스트리아 정부가 주는 장학금을 받게 되어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나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그는 <현을 위한 세레나데>, <교향곡 5번> 등과 같은 뛰어난 작품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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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셰흐라트 국가유공자 묘지에 있는 드보르작의 묘소.

그의 음악의 특징은 자연스럽고 억누를 수 없는 선율의 흐름, 기악의 색채감에서 느껴지는 섬세한 감각, 본능적으로 절제된 표현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 작품들은 브람스의 관심을 끌어 그의 도움으로 유럽에 소개됐다.

그의 호소력 짙은 작품은 곧 열렬한 환호를 받게 되고, 이어 여러 곳에서 수많은 초청을 받았고 미국으로부터도 초빙을 받았던 것이다.

미국에서 돌아온 후 약 9년 동안 그는 오페라 <자코뱅>, <루살카>를 비롯 새로운 작품을 쓰는 데 전념하며 왕성하게 활동하던 중 1904년 4월 18일 독감에 걸려 회복하지 못하고 5월1일 62세의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모든 체코국민들의 애도 속에서 5월 5일 따스한 봄 향기가 블타바 강변에 퍼질 무렵 그의 유해는 블타바 강이 내려다보이는 비셰흐라트 언덕에 조성된 국가유공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는 주어진 삶을 살아가면서 좌절과 실패를 맛보았지만 성공의 절정에서도 겸손했고 분별력이 있었고 순리에 따랐으며 늘 소박했고 또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다. 이 기쁨은 그의 모든 작품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정태남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미술·언어·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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