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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성락 “내 연주는 바람처럼 살아 온 인생 그 자체”

아코디언계의 살아있는 전설…“박춘석·길옥윤·이봉조 선생 가장 존경”

[대중문화예술 거장을 만나다] ① 아코디언 연주가 심성락 씨

2011.12.01 문화체육관광부 홍보지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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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코리아>는 오랜 시간 동안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우리나라 대중문화예술 발전에 큰 획을 그은 공로로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을 받은 거장들을 만나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그들이 말하는 인생과 예술세계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자.

반세기 동안 우리나라 대중음악을 관통해 온 아코디언계의 살아있는 전설 심성락 씨(75). 지난달 28일 오전 서울 광진구 건대입구 부근 한 카페에서 대중문화예술 발전 유공자로 선정돼 국무총리 표창을 받은 그를 만났다. 깔끔한 정장에 모자를 눌러 쓴 그의 모습은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였지만 흐트러짐 없이 단정했다. 얼굴 표정 하나하나에는 그가 겪은 대중음악의 산 역사가 또렷히 담겨 있는 듯 했다.

한결같은 고집으로 평생을 아코디언과 함께 살아온 그와 본격적인 인터뷰를 위한 첫 마디로 “대가를 만나 영광스럽다”고 전하려는데, 마른 체구에서 뿜어져나오는 거장의 풍모는 그 말 마저 무색케 만들었다.

이미자, 나훈아, 장윤정, 김건모 등 숱한 톱가수들의 앨범에 그의 이름은 늘 함께 해 왔다. ‘효자동 이발사’ ‘봄날은 간다’ ‘인어공주’ 등 영화에서도 그의 연주가 배경으로 깔렸다. 하지만 그는 지난 2009년에서야 생애 첫 음반을 냈다.

“데뷔한 이래 몇 십년 동안 앨범 한장 안내고 뭐했냐고 사람들은 말했지만 전 머릿 속으로 따지거나 욕심내고 살지 않았어요. 누구든 절 원하면 가서 연주하고 그렇게 지금까지 음악을 해왔죠.” 

대중음악의 산 증인으로 살아온 세월이 50년이 넘은 그에게 “음악이 선생님께 어떤 의미냐”고 묻자 기다렸다는 듯이 “음악에만 미쳐 살아온 내 인생이죠”라는 답이 돌아왔다. 

아코디언 연주가 심성락 씨.
올해 대중문화예술 발전 유공자로 선정돼 국무총리 표창을 받은 아코디언 연주가 심성락 씨.

그는 제대로된 정규 음악교육을 단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다. 오직 음악에 미쳐 살아온 지 한 평생, 그는 한국 대중음악계의 대가가 됐다.

“아코디언을 연주할 때 악기는 도구일 뿐이죠. 음악은 머리와 가슴, 온몸으로 하는 겁니다.”

그가 첫 앨범을 내기 까지 5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의 생애 첫 앨범의 타이틀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이다.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아온 그의 음악적인 정신과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앨범에서 프랑스 최고의 아코디언 연주자 리샤르 갈리아노와 호흡을 맞췄어요. 그는 정말 아코디언 연주의 대가예요. 갈리아노와 함께 연주한 곡은 ‘리베르 탱고’와 ‘꽃밭에서’인데, 특히 ‘꽃밭에서’는 갈리아노에게 내가 부탁했어요. 한국적인 정서를 담은 노래를 음반에 꼭 담고 싶었거든요.”

심성락 씨는 1936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 광복 이후 귀국, 부산에서 자랐다. 음악을 좋아하던 형님 덕에 그는 일명 돌판으로 불리는 SP판 시절부터 많은 음악을 들었다.

“당시 쉽게 구할 수 없었던 SP판이 집에 많이 있어 다양한 음악을 많이 들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이 모든 게 많은 음악을 듣고 자란 덕인 것 같네요. 제가 정식으로 음악교육도 받은 것도 아닌데 이만큼 할 수 있었던 건 많이 듣고 흉내냈기 때문이겠죠.”

이야기를 듣다가 ‘흉내내다’의 의미가 와닿지 않아 되묻자 그는 크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전 여태 아코디언을 연주한다고 한 적이 별로 없어요. 흉내내는 거죠. 인터뷰 하시는 선생님은 안 그러세요? 글쓰는 것도 흉내내는 게 반이지 않습니까? 우리 보다 먼저 간 대가들의 작품을 보고 좋은 것을 닮아가는 것이죠. 제 음악을 연주라고 칭하기엔 아직 너무 과분해요. 제 말뜻 이해 가시죠.”

뒤통수를 맞은 것 처럼 깨달음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려는 내 머릿 속에 ‘짐작했던 것 보다 훨씬 큰 분이구나’라는 생각이 스쳤다.

처음 아코디언을 접하게 된 계기에 대해 묻자 “많은 사람들이 내가 악기상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아코디언을 접한 줄 아는 데 악기상에는 친구가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부산 경남고 재학 당시 친구가 일하는 악기상에 자주 놀러간 것 뿐이고요. 그렇게 아코디언도 독학으로 익혔어요. 그걸 본 악기점 사장이 절 부산 KBS 노래자랑 대회 반주자로 추천했고요. 전문적으로 배워본 적도 없는데 반주를 맡게 된 거죠”라고 말하며 자연스럽게 음악인생에 대한 회고가 이어졌다.
 

올해 대중문화예술 발전 유공자로 선정돼 국무총리 표창을 받은 아코디언 연주가 심성락 씨.
심성락 씨는부산 KBS에서 악사로 활동했던 당시의 사진 한 장을 꺼내보이며 지난날을 회상했다.
 
부산 KBS 노래자랑대회의 세션맨으로 활동하다 방송국 전속 악사로 발탁돼 본격적인 음악인생을 시작한 그는 이후 카바레에서 악단을 꾸려 일하기도 했다. 그는 인터뷰 중 갑자기 가방에서 사진 한장을 꺼내 보여주었다.

“경남고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본격적인 음악인생에 접어들게 됐죠. 집안 살림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에 벌이도 해야 했고요. 사실 그땐 전속악단이라는 개념도 없었어요. 이 사진 보이시죠. 기타 한명과 아코디언 한명, 달랑 두명으로 시작했어요. 제가 악사로 뽑힌 이유도 많은 음악을 다양하게 들었기 때문이죠.(웃음)”

그는 본명인 심임섭이란 이름을 두고 ‘심성락’이란 예명을 쓰게 된 연유도 함께 들려줬다.

“방송국의 한 관계자께서 제 이름을 소개하기 너무 어렵다며 소리 성, 즐거울 락을 써서 심성락이라 하자고 하셨죠. ‘심성락(瀋聲樂)’이란 예명은 ‘소리로 세상을 즐겁게 한다’는 뜻이예요. 이름을 바꾼 이후 저는 쭉 심성락으로 소리로 세상을 즐겁게 만들기 위해 참 부단하게 살았어요.”

그러던 1965년, 서울로 올라오라는 음반사 사장의 권유로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대중음악계는 서로 그와 함께 작업하고 싶다고 러브콜을 보냈다.

“그 당시 참 바빴어요. 여기저기서 함께 작업하자고 연락이 많이 왔거든요. 함께 작업한 가수들요? 차라리 함께 작업하지 않은 가수들 숫자를 세는 게 더 빠르겠어요. 누구든 절 원하면 연주하러 갔어요. 작업 후 가수의 음반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으면 저도 덩달아 기뻤어요. 그 중에 기억에 남는 가수를 꼽으라면 가수 이미자 씨 창법을 참 좋아했죠.”

그는 대중가요의 황금기인 1960~70년대 전성기를 누렸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 시절 청와대의 각종 행사의 악사로 활동해 ‘대통령의 악사’라는 별칭도 얻게 됐다. 

“당시 많은 행사에 초청돼 갔었는데 대부분 아코디언 대신 오르간으로 다양한 곡을 들려드렸어요. 공식 행사에 자주 참여하다 보니 그 인연으로 대통령의 악사라는 별칭도 얻게 됐는데 그런 별칭은 사실 부담스러워요. 그저 저는 음악하는 사람으로 연주하러 갔을 뿐인걸요.”
  
연주가 심성락 씨는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음악을 대했고, 이제는 그 마음을 주변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고 전했다.
연주가 심성락 씨는 욕심없이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음악을 대했고 ‘대가’라는 표현은 자신에게 과분하다고 전했다.

지난날을 회상하며 추억에 잠긴 그는 “실로 오랜만에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갔다”고 털어놓으며 음악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세 사람을 꼽았다.

“제가 존경하는 세 사람을 꼽는다면 박춘석 선생님, 길옥윤 선생님, 이봉조 선생님이예요. 세 분의 대가들을 통해 제가 배우고 얻은 게 참 많습니다. 길옥윤, 이봉조 선생님은 연주, 작곡 등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셨어요. 박 선생님도 마찬가지고요. 그분들이야 말로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거장이죠.”

인터뷰 내내 겸손함을 잊지 않으며 자신의 감정을 또박또박 전하는 그의 말투에는 올곧고 바르게 살아온 지난 세월이 묻어났다.

지난 6월, 후배들이 그의 대중음악계의 공로를 기리기 위한 헌정공연을 열어준 소감에 대해 물어보니 그는 쑥쓰러워 하며 “헌정공연은 정말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가치있는 것이죠. 장사익, 최백호, 주현미, JK 김동욱, 적우 등 후배들에게 참 고마워요”라고 말했다.

지난달 21일 대중문화예술 발전 유공자로 선정돼 국무총리 표창을 받은 소감에 대해 묻자 그는 고개를 흔들며 “내가 받을 상이 아닌데 내게 온 것 같아 굉장히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예요. 대중적으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음악의 대가들도 참 많은데 제가 받게 돼 감사하고 또 감사할 따름이죠. 우리나라 대중음악 발전에 대한 책임감도 더 들고요”라고 답했다.

소리로 세상을 즐겁게 만들어 온 남자, 심성락 씨에게 마지막으로 음악에 대해 못다한 이야기가 있다면 전해달라고 했다.

“한 평생 음악만을 위해 살았어요. 돈에 대한 욕심도 없었고 그저 음악이 좋아 살아온 게 50년이 넘었어요. 당연히 계획을 갖고 ‘이걸 해야겠다’ 혹은 ‘저걸 해야겠다’ 이런 생각도 없었지요. 그저 마음이 시키는 대로 음악에만 빠져 지냈어요. 혼자 좋은 자리를 독식한 적도 없고요. 돈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개런티 없이 무료로 연주해 준 적도 많아요.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억되길 원하는 지 생각해본 적도 없고요. 다만 먼 훗날 후배들이 절 떠올렸을 때 ‘그런 선배가 없었다’고 가끔 기억해준다면 참 좋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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