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피플

신중현, 살아있는 한국 록의 전설

“훗날 대중들이 ‘멋진 기타 플레이어’로 기억해주면 좋겠다”

[대중문화예술 거장을 만나다] ② 신중현 씨

<공감코리아>는 오랜 시간 동안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우리나라 대중문화예술 발전에 큰 획을 그은 공로로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을 받은 거장들을 만나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그들이 말하는 인생과 예술세계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자.

[대중문화예술 거장을 만나다] ① 아코디언 연주가 심성락 씨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띠 리리 리 딧 디리리리리…’ 신명나는 기타 선율과 구성진 장단이 우리나라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 노래는 한 번 들으면 또 듣고 싶어지고, 두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한국 대중음악의 대표 명곡이 됐다. ‘미인’의 신중현(73), 그는 이 노래로 대중음악의 새로운 역사를 썼다.

“우리나라는 미인의 나라예요. 제가 어찌 그냥 있었겠습니까. 미인은 우리 가락과 장단 등 우리의 멋을 살려 알기 쉽게 또는 재미있고 신나게 만들었죠. 님을 볼 때 마다 자꾸 보게 되고 몰래 훔처 보기도 하는 것을 느끼고 그것을 노래의 주제로 찾어낸 것이지요. 언제 들어도 제가 제일 사랑하는 곡입니다.”

지난달 21일 오후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내 올림픽홀에서 열린 2011 대한민국 대중문화 예술상 시상식에서 연주가 신중현 씨가 보관문화훈장을 수여받고 기뻐하고 있다.(사진=저작권자 (c) 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지난달 21일 오후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내 올림픽홀에서 열린 2011 대한민국 대중문화 예술상 시상식에서 연주가 신중현 씨가 보관문화훈장을 수여받고 기뻐하고 있다.(사진=저작권자 (c) 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음악과 함께 오롯이 겪은 세월이 50년이 넘었다. 1950년대 한국 최초의 록 그룹을 만들었고 1960~70년대 사이키델릭 록을 구현하며 대중음악계에 록 문화를 확산시킨 신중현 씨. 그는 얼마 전, 음악 인생 50년을 기념하는 ‘마스터피스 골드 시리즈’ 앨범을 발표했다. 그에게 이 앨범은 한 평생 음악인생을 돌아보는 중요한 작업이었다.

“젊은 시절 음악에만 열중하다 보니 그간 낸 음반들이 산발적으로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였어요. 노년기에 접어 들면서 비로소 살아 있는 동안 제 음악을 정리해 사람들에게 체계적으로 알려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하지만 아직도 정리할 것이 많아 제 모든 시간을 쏟고 있어요.”

길고 긴 그의 음악인생, 한국 대중음악계를 주름잡던 ‘히트곡 제조기’로 ‘한국 기타의 전설’로 큰 인기와 관심을 받기도 했고 노래가 금지당하고 동료들이 흩어져 혼자 남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외로운 길을 참아내며 꿋꿋이 한 길만을 걸었다. 음악인생의 굴곡을 거쳐가며, 신중현 씨는 ‘님은 먼 곳에’, ‘봄비’, ‘미인’, ‘미련’, ‘빗속의 여인’ 등 우리나라 대중음악계에 길이 남을 명곡들을 탄생시켰다. 그는 지난 2006년에는 자신의 삶과 음악을 조명하는 ‘내 기타는 잠들지 않는다’라는 저서를 내기도 했다.

“음악작업은 힘든 역경을 받아들이면서 인생을 그리는 작업과도 같아요. 그래서 힘들 때나 기쁠 때 쉬지 않고 미친 듯이 곡을 썼어요. 자나깨나 음악에 몰두했죠. 영감을 얻기 위해 이곳 저곳 찾아 돌아다니기도 했고요.”

신중현 씨는 2009년 미국 펜더(Fender)사에게서 맞춤 제작한 기타를 헌정받았다. 신중현 씨 이전에 기타를 헌정받은 이들은 에릭 클랩튼, 제프 백, 잉베이 맘스틴, 스티비 레이 본, 에디 반 헤일런 5명뿐이었다. 아시아에서는 신중현 씨가 처음이었다.

“펜더기타(Fender Guitar)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타이며 록 음악인들이 선호하는 기타입니다. 프로들만이 다룰 수 있는 이 기타를 얼만큼 다룰 줄 아느냐에 따라 기타 연주자에 대한 평가가 정해지기도 하죠. 이 기타는 세계적인 기타 연주자에게 헌정해왔는데 제가 6번째로 받게 됐어요. 아시아에서는 처음이었죠. 기타 연주자로서는 더 이상의 영광이 없어요.”

그는 지난 9월 미국 음반사 ‘라이트 인 디 애틱(Light In The Attic)’을 통해 ‘아름다운 강산: 대한민국 신중현의 사이키델릭 록 사운드’란 타이틀의 월드앨범을 냈다. ‘라이트 인 디 애틱’은 2009년 세계적인 기타 브랜드인 펜더(Fender)가 신중현 씨에게 헌정기타를 선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음악을 접하게 됐다고 한다.

“미국 음반사 라이트 인 디 애틱이라는 회사가 제 곡들이 담긴 음반을 출시했어요. 모든 곡들이 음악적 가치가 있는 곡들만 선정했죠. 제 음악이 세계적 음악으로 평가 받은 것에 너무 기쁘죠. 그 음반의 음악들은 진짜(True)음악입니다.”

1958년 미8군 무대에 데뷔한 이후 ‘미인’, ‘빗속의 여인’, ‘아름다운 강산’ 등 한국적인 록 음악을 제시하며 한국 대중음악의 지평을 확대했을 뿐만 아니라 펄시스터즈, 김추자 등 수많은 스타 가수를 발굴해 대중음악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공로를 인정받은 신중현 씨는 지난달 21일 열린 ‘2011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시상식’에서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기쁜 소식을 나누기 위해 신중현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 너머로 들리는 그의 음성은 차분하면서도 따뜻했다.

스케쥴 상 시간이 녹녹치 않았던 그에게 묻고 싶었던 말을 정리해 이메일로 보냈다. 며칠 후 신중현 씨에게 받은 답변지에는 변함없이 한 길을 걸어온 그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대중문화 예술인으로 한결같이 살아온 그는 이제 따뜻한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오랜 시간 달려온 자신의 음악인생을 돌아보고 있었다.

마음 한 켠 담아둔 이야기 보따리를 꺼내놓기 쉽지 않을 줄 알았던 신중현 씨는 성심성의껏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을 추억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1970년대 활발하게 활동하던 당시 신중현 씨.
1970년대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으며 활발하게 활동하던 당시, 신중현 씨.

- 유년시절 음악을 처음 접한 계기는? 시대상황이 어려워 악기 구입이나 음악교습을 받기도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당시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신다면?

초등학교 2학년 때 악기를 직접 만들어 연주를 할 정도로 음악을 좋아했어요. 6.25 전쟁 당시라 버려진 군대용 전화줄을 이용해 악기를 만들곤 했어요. 전화줄을 벗기면 철사줄이 나오는데 그걸로 가야금 비슷한 악기를 만들었어요. 가야금이나 거문거를 보면 줄마다 고인목이 있는데 그걸 ‘고마’라고 해요. 제가 만든 악기에도 고마를 만들어 음을 조율해 동요와 민요 등을 연주하며 음악적 소질을 키워나갔죠.

- 선생님의 음악인생의 동반자라고 봐도 될 ‘기타’는 언제부터 잡게 됐나요?  

기타를 너무 갖고 싶어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고 돈을 벌었어요. 중학교 2학년 때 그간 모은 돈으로 기타를 구입했는데 너무 기뻤어요. 그렇게 기타와 만난 것이 제 음악인생의 시작이었죠.

- 1955년 미8군 쇼 무대를 통해 본격적으로 음악활동을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무대에서 별명이 ‘히키 신(申)’이라고 불릴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고 들었는데?

친척이 운영하던 제약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틈틈이 기타연습을 했어요. 고2때 학교를 중퇴하게 됐고 일하던 회사에서도 나와 기타 하나만 들고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어요. 1년 후, 미8군 무대에 진출할 기회가 주어지게 됐고 1950년대 말부터 미8군 무대에서 본격적으로 음악활동을 하게 됐죠. 미8군 무대 활동은 세계적인 음악을 접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됐어요. 프로 음악인이 되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나 다름 없었죠. 음악 공부를 열심히 해 좋은 음악을 할 수 있었고 1958년 저만의 독특한 색깔을 드러낸 ‘히키-신 기타 멜로듸’라는 한국 최초의 기타 솔로 음반을 발표했죠.

- 애드 훠(ADD4)의 ‘빗속의 여인’과 선생님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첫 히트작인 펄시스터즈의 ‘님아!’에 대한 작업 일화에 대해 당시 이야기를 전해주신다면?

1958년 이후 경음악 뿐만 아니라 우리말 가사가 들어간 현대적인 우리 노래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우리말 노래 음악’을 만들기 위해 연구를 시작했어요. 1964년, 그룹 ‘애드 훠’ 를 결성하고 ‘빗속의 여인’ 등 여러 곡을 발표했지만 당시 반응은 기대에 미치진 못했고 결국 다시 미군 무대로 복귀하게 됐죠. 이후 1968년, 펄 시스터즈에게 만들어 준 ‘님아!’ 등 여러 곡이 연달아 히트를 하며 대중음악 무대로 진출할 기회를 얻게 됐어요. 이때부터 신중현이란 이름 석자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죠.

- 펄시스터즈 ‘님아!’ 등 많은 히트곡을 제조하면서 많은 가수들이 선생님께 찾아왔고, 이른바 ‘신중현 사단’ 이라는 칭호도 붙기 시작했는데요. 신중현 사단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해주신다면?

1970년도 전후엔 신중현 시대라고 자칭할 수 있었던 시대였어요. 그 당시 어딜 가나 제가 만든 곡이 쏟아져 나왔고 곡을 받은 가수는 이미 스타가 됐다는 분위기였어요. 그런 움직임은 식을 줄 몰랐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신중현 사단이 이뤄졌던 것이죠. 가수 뿐만 아니라 연주자를 비롯한 작곡, 작사가 등 모든 음악인들이 제 음악의 영향을 받게 됐어요.

- 1973년에는 4장의 앨범을 발표, 한국적 록사운드가 담긴 ‘미인’ 등의 대표작들을 남긴 3인조 ‘신중현과 엽전들’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신다면?

1973년 초 신중현 사단이 해체되면서 노래도 직접 불러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죠. 그래서 3인조 그룹 신중현과 엽전을 결성해 노래를 하게 됐어요.
 
기타리스트 신중현 씨가 지난 9월 26일 오전 서울 강남구 신사동 펜더커스텀샵 쇼룸에서 열린 월드앨범 발매기념 기자 초청 간담회에 참석해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사진=저작권자 (c) 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지난 9월 26일 오전 서울 강남구 신사동 펜더커스텀샵 쇼룸에서 열린 월드앨범 발매기념 기자 초청 간담회에서 신중현 씨. (사진=저작권자 (c) 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님은 먼 곳에’, ‘미인’, ‘빗속의 여인’ 등 주옥같은 명곡을 만드셨는데, 긴 시간 곡을 만드시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점은 무엇입니까?

곡을 작곡하는 것은 이 세상에 처음으로 탄생시키는 일이기에 마음가짐이 늘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이후에 음악의 주제를 찾는 것이죠. 이 과정이 쉽진 않지만 그간 지내온 모든 일들을 감각으로 느끼며 주제를 찾아 음악으로 탄생시켜야 해요. 물론 시대 상황과 개인의 이야기도 반영하기도 하죠. 음악은 말로써 다 표현하긴 어려워요. 자신이 직접 음악을 듣고 느끼는 수 밖엔 없어요.

- 신대철, 신윤철, 신석철 등 세 아들도 대를 이어 록 음악계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아버지 신중현으로써 세 아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으시다면?

부모는 자나 깨나 자식 걱정한다고 말도 있잖아요. 힘든 과정에서 음악이 탄생되기 때문에 어렵겠지만 열심히 하길 바라고 응원하고 있어요. 음악에 대한 이론도 가르치기도 했지만 그것 보다는 실질적으로 아들들에게 라이브 음악을 직접 들려주며 가르쳤어요. 아버지 입장에서 정통 음악의 길을 걸어가는 세 아들을 보면 더할 나위 없이 기뻐요.

- 얼마 전 ‘라이트 인 디 애틱(Light In The Attic)’ 회사가 출시한 선생님의 ‘아름다운 강산: 대한민국 신중현의 사이키델릭 록 사운드’란 타이틀의 앨범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말씀해주신다면? 이 앨범이 선생님께 어떤 의미입니까?

음악은 두 분류로 나누는데 하나는 상업적인 요소가 가미된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음악이 있고, 다른 하나는 ‘음악을 위한 음악’이 있어요. 음악을 위한 음악은 예술성을 추구하는 면도 있지만 대중적인 면도 같이 생각하거든요. 다만 음악의 깊이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쉽게 대중에게 다가가지 못할 때도 있어요. 싸이키델릭 록도 그래요. 외국에서는 이런 음악들은 높게 평가 받고 있어요. 제 음악 역시 그런 차원에서 높게 평가를 받게 된 것이죠. 제 음악을 세계적으로 인정해준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해요.

지난 2009년 서울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열린 ‘신중현 펜더 헌정 기타 증정식’에서 신중현 씨가 헌정받은 기타로 연주를 하고 있다. (사진=저작권자 (c) 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지난 2009년 서울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열린 ‘신중현 펜더 헌정 기타 증정식’에서 신중현 씨가 헌정받은 기타로 연주를 하고 있다. (사진=저작권자 (c) 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지난달 21일, ‘2011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시상식에서 대중문화예술 분야 최고의 영예인 보관문화훈장을 받는데, 소감이 어떠셨나요?

대한민국은 저를 안아 주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저를 품어줬어요. 생각치도 못했던 상이라 무엇으로 표현 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해요. 이 고마움을 제 남은 시간 동안 대중들에게 전달하도록 노력해야죠.

- 록의 전설, 한국기타의 거장 등 선생님을 일컫는 수식어에 대해 부담스럽진 않으신지?

‘록의 전설’ ‘한국기타의 거장’ 등으로 불리는 데에 만족하지만 이에 따른 책임도 져야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대중들에게 보답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 선생님 인생에 있어서 ‘록, 그리고 음악’은 어떤 의미인지 궁금합니다.

록 음악은 20세기가 낳은 위대한 음악입니다. 록 음악이 탄생하지 못했다면 지금 세상은 암흑이겠죠. 제 음악성을 록을 통해 알리게 된 것에 대해 정말 기쁘게 생각해요. 훗날 대중들이 저를 ‘멋진 기타 플레이어’였다고 기억해준다면 좋겠죠.
2011.12.09 문화체육관광부 홍보지원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