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규제 샌드박스, 추격형 경제에서 선도형 경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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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구환 한남대 법정대학 행정학과 교수
대영제국이 인도를 지배하던 시절, 코브라를 싫어한 영국인 지사는 코브라를 죽여서 가져오는 사람에게 보상하는 제도를 시행했다. 처음에 사람들은 코브라를 사냥하여 보수를 받기 시작했으나, 보상에 대한 욕망으로 코브라 농장을 만들어 보상을 받기 시작했다.
대규모 코브라 사육시장이 형성되자 영국인 지사는 보상제를 철회하였다. 코브라 가치가 떨어지자 사람들은 코브라를 무단으로 버리기 시작했고 개체 수를 줄여보고자 했던 코브라는 오히려 더 증가하게 되었다.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정부의 규제가 오히려 역효과를 초래한 것이다. 흔히 이를 코브라 효과(Cobra Effect)라 한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 시절인 1865년 세계 최초의 도로교통법이 제정되었다. 정식 법령명은 The Locomotives on Highways Act(Locomotive Act)로 1865년에 제정돼 1896년까지 약 30년간 시행되었다. 산업혁명으로 증기 자동차가 등장함에 따라 기존의 마차 업주와 마치를 타는 귀족들을 보호하기 위한 정부 규제였다.
증기 자동차에 반드시 3명(운전사,기관원,기수)이 탑승하도록 하였고 시가지에서 자동차의 최고 속도를 3.2km/h로 제한했다. 기수는 낮에는 붉은 깃발, 밤에는 붉은 등을 들고 자동차 앞에서 걸어가도록 했다. 일명 붉은 깃발법(Red Flag Act)은 자동차 소비에 대한 욕구를 감소시켰고, 산업혁명의 발상지였던 영국의 자동차 산업은 오히려 쇠퇴하였다.
정부 규제와 경제와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다. 경제 활성화와 시장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정부 규제가 필요하지만, 오히려 반대 효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많다. 문제해결을 위한 규제가 혁신성장을 저해하고, 규제가 또 다른 규제를 발생시키는 구조는 사회 전체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미국은 규제 신설에 따른 비용만큼 기존 규제를 폐지해 규제비용 총량이 증가되지 않도록 관리하고 있다.
규제혁신과 관련된 법률이 시행되면서 규제 샌드박스 제도가 본격화되었다. 산업융합촉진법, 정보통신 진흥 및 융합 활성화 등에 관한 특별법(정보통신융합법)은 2019년 1월 17일부터 발효되었고, 규제자유특구 및 지역특화발전특구에 관한 규제특례법(지역특구법), 금융혁신지원 특별법(금융혁신법)은 2019년 4월부터 시행된다.
샌드박스(sandbox)란 모래 놀이터를 의미한다. 어린이들이 모래 놀이터에서 신나게 노는 것처럼 신산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규제를 면제 또는 유예해 주고 사업추진 속도를 앞당겨 주는 제도다.
도심지역 수소 충전소 설치, DTC 유전체 분석을 통한 맞춤형 건강증진 서비스, 디지털 사이니지 광고(버스나 오토바이에 LED 패널을 달아 광고), 전기차 충전용 과금형 콘센트 등이 규제특례 혁신 1호 사례로 선정되었다. 신기술, 신산업과 관련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저해하는 경우를 제한하고는 우선 허용하고 사후 규제하는 방식이다.
국회 수소충전소 조감도(안). 지난 11일 도심 수소 충전소 설치가 규제 샌드박스 1호 사업으로 선정됐다. 이에 따라 국회에 수소충전소가 들어서게 될 예정이다.
산업융합촉진법과 정보통신융합법에 의하면 신기술 및 신산업에 관련된 규제 사항을 정부에 문의하면 30일 이내에 회신하도록 되어 있으며, 만약 정부가 30일 안에 답을 주지 않으면 규제가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또한 규제가 있더라도 신기술 및 신서비스의 경우 제품,서비스를 시험,검증하는 동안 규제를 풀어주는 실증특례(실증 테스트)와 일시적으로 시장 출시를 허용하는 임시허가를 거치면 본격적인 사업추진이 가능해진다.
규제 샌드박스 제도는 신산업이나 지역별 전략산업에 대한 규제를 포지티브(원칙적 금지, 예외 허용) 방식에서 네거티브(원칙적 허용, 예외 규제)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첫째, 안 된다는 규제 일변도의 포지티브 규제정책에서는 기업의 투자를 촉진하기 힘들다. 투자를 통한 기술혁신이 기존 규제로 묶이면 기업 뿐 아니라 국가 발전도 기대하기 어렵다. 기존 규제에서 지대만을 추구하거나 회피적 성향만이 나타날 수 있다.
정부도 규제정책에 대한 일대 전환이 필요하다. 부처의 규제가 상호 얽혀서 긍정적인 결정을 도출하기 쉽지 않을 수 있다. 부처의 목표보다는 경제 활성화와 국가경쟁력 확보라는 상위 목표를 보고 전향적 의사결정을 신속히 도모할 필요가 있다.
둘째, 규제 샌드박스의 핵심 부처는 산업통상자원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중소벤처기업부이다. 정보와 산업이 각각 분리되어 관리된다면 융합적 혁신성장을 도모하기 어렵고, 또 다른 규제를 양산할 가능성이 있다.
샌드박스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자유로운 상상력이 실현되는 공간이어야 한다. 정부 부처는 놀이터를 만들어 주면 된다. 산업통상자원부의 산업융합규례특례심의위원회,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신기술,서비스심의위원회, 중소벤처기업부의 지역특화발전특구위원회는 부처 이기주의보다는 융합적 관점에서 운영되어야 한다.
셋째, 투자,소비,소득,고용구조가 함께 연동되는 규제 샌드박스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기업의 투자, 내수 진작 및 수출 활성화, 소득 증대, 일자리 확대 등이 상호 연계되는 네거티브 규제정책이 필요하다. 기업의 투자정책과 정부의 규제 정책의 합리적 조정과 연계는 국가경쟁력의 확보와 미래 세대의 지속가능한 발전의 시금석이 될 수 있다.
넷째, 샌드박스 규제의 전제조건이 있다. 신기술, 신산업과 관련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저해하는 경우를 예외로 하고 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 저해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는 원칙적으로 기존 규제를 면제 또는 유예해 준다는 의미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 관련 기준 정립은 중장기적 관점에서 코브라 효과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하며 지나친 확대 해석을 경계하고 지속적인 모니터링시스템의 구축,적용이 모색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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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구환 한남대 법정대학 행정학과 교수
2019.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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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먼지 특별법 시행…근본 해법은 이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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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수 서울연구원 초빙선임연구위원
서울 서쪽에 자리 잡은 우면산 전망대에서 직선거리 9.5㎞가 채 되지 않는 잠실 롯데월드타워를 바라보면 이따금 신기루(蜃氣樓) 현상을 경험하곤 한다.
미세먼지 심한 날에는 가시거리가 짧아 서울이 자랑하는 스카이라인은 고사하고 겨우 555m 고층건물 윤곽만 어렴풋이 보인다.
게다가 시민들은 건물높이 상한선 내외 경계로 박스형 미세먼지 연막탄에 갇혀 공기 재앙(災殃)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호흡하고 있다. 겨울철에 찾아드는 고농도 미세먼지 걱정이 앞서는 까닭이다.
미세먼지 특별법 제정으로 국민 생활환경 안전망 구축 기대
정부는 미세먼지가 국민건강에 미치는 위해를 예방하고 대기환경을 적정하게 관리,보전하여 쾌적한 생활환경 조성을 위해 미세먼지 저감 및 관리에 관한 특별법(이하 미세먼지 특별법)을 발표했다. 미세먼지 및 미세먼지 생성물질 배출을 저감하고, 그 발생을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미세먼지 특별법은 어렵게 2018년 7월 국회를 통과했으며2월 15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미세먼지 비상저감조치 법적 근거 마련과 함께 배출시설 가동 조정, 집중관리구역 지정, 친환경차 전환과 학교 공기정화시설 설치, 미세먼지 간이측정기 성능인증, 미세먼지 특별대책위원회 및 미세먼지 개선기획단 설치, 국가 미세먼지 정보센터 운영, 미세먼지 관리종합계획 및 시행계획 수립 등이 주요 내용이다.
이처럼 미세먼지로부터 안심할 수 있는 국민 생활환경 안전망을 총체적이며 촘촘하게 엮어 놓아 긍정적인 역할이 기대된다.
맞춤형 미세먼지 관리정책으로 전환 계기
미세먼지 특별법은 국가와 자치단체의 책무에서 환경부 등 정부부처가 함께 추진하고, 자치단체가 실제 이행하는 투 트랙 체계로 미세먼지 관리의 활력을 되찮을 수 있는 기폭제 역할이 주목된다. 또한 미세먼지 배출을 저감 관리를 위해 사업장 및 국민의 책무를 명기하여 역할분담을 강조하고 있다. 과거와 달리 맞춤형 미세먼지 관리정책으로 전환하고 있다는 논거이다.
자치단체는 미세먼지가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을 파악하고, 미세먼지로부터 국민 건강과 생명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정부 미세먼지 관리대책 수립,시행하는데 협력하도록 하고 있다. 특히 미세먼지 농도가 심각한 수준에 이를 경우 이를 저감하기 위한 권한과 조치를 자치단체에 부여하는 것이 핵심이다.
자치단체는 자동차 운행 제한과 대기오염물질 배출시설 가동시간 조정, 학교 휴업 권고 등의 조치를 내리고, 조례 제정 등을 통해 민간 사업장과 공사장의 비상저감조치 참여를 요청해야 한다. 다만 실질적인 추진방법과 절차 등이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아 조만간 정부와 자치단체 간, 자치단체 간 이행 수단별 합리적인 조정이 필요하다.
향후 수도권 미세먼지 비상저감조치의 내실 있는 시행과 시민의 호응을 얻기 위해 먼저 차량운행 제한에서 미세먼지와 질소산화물 배출이 많은 경유차를 대상으로 결정해야 한다. 또 자동차 배출가스 등급 조정 등을 고려하여 단계적으로 접근해야한다.
비상 저감 의도에 맞게 2.5톤 차량중량 한계를 벗어나 대상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서울, 수도권 차원을 넘어 전국적인 호흡공동체 인식을 바탕으로 비상저감조치 시행이 검토되어야 하겠다.
이처럼 미세먼지 저감 및 국민의 삶의 질 개선을 위해서는 정부와 자치단체 간 역할분담과 협력, 그리고 맞춤관리를 위해 긴밀하게 상호 협의하여야 한다. 정부 역할은 국가 간 대기환경 협약, 광역적인 배출원 관리, 자치단체 환경역량 확충 지원 등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 이와 달리 생활밀착형 미세먼지 관리 및 개선을 위한 일차적인 역할은 자치단체의 몫이다.
미세먼지 특별법은 환경자치 역량 확충의 필요조건
자치단체의 미세먼지 저감 및 관리에서 선도적 역할을 강화하고 추진역량을 확충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미세먼지 저감 및 관리 기본조례 제정이다. 시민 건강피해 예방과 환경복지 증진, 환경자치에 기반을 둔 실행능력 확보 등을 포괄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미세먼지 조례이다.
두 번째 단계로는 자치단체가 미세먼지 특별법 시행에서 예견할 수 있는 문제점에 일대일 대응하고 기본조례 법규의 추진방법과 절차를 구체화하는 개별 실행체계 마련을 서둘러야 한다.
핵심 내용으로 지역 내 미세먼지 집중 배출원 분포와 배출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 미세먼지 관리정책지원시스템 구축, 지역 대기질 예,경보 시스템 설치 운영, 운행자동차 배출가스 측정 및 관리, 고농도 재난관리와 비상저감조치 이행, 통합,융합의 미세먼지 관리 아카이브(archives) 운영, 민감,취약계층 건강영향 모니터링, 시민과의 협치 사업 전개 등 전 방위적 대응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
국내 미세먼지 문제의 근본해법은 이제부터이다. 미세먼지 특별법의 시행으로새로운 시작을 알렸다. 앞으로 이를 통해 국민의 생활환경 안전망을 더욱 세밀하게 정비하기 위해서는 지역단위 미세먼지 관리여건의 현장성을 파악, 자치단체의 미세먼지 관리역량을 확충하는 등의후속 과제가 수반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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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수 서울연구원 초빙선임연구위원
2019.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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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결실 광주형 일자리…‘일자리 혁신’ 마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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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일자리가 화두다. 중요한 건 단순히 일자리의 양적인 확대가 아니다. 현실의 일자리 질서에는 우리 사회 모순과 불평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문제적 구조를 그대로 두고 일자리의 양만 늘리는 정책은 이미 실패했다. 고용율 70%를 구호로 내 걸었던 박근혜 정부가 대표적이다. 비정규직이라도 감지덕지다라는 식의 사고는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다. 그 사이에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격차는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답은 일자리 질서, 일자리 구조, 일자리 관계를 다 포함해 한마디로 일자리 자체를 혁신시키는 일이다. 나쁜 일자리라면 가급적 없애거나, 발본적으로 개선해 가야 한다. 이미 괜찮은 일자리도 전체 구조의 전환 전망 속에서 새롭게 혁신돼야 한다. 무엇을 어떻게, 또 누구의 손에 의해 혁신시켜 가야 할지를 구체적인 조건 속에서 고민해 가야 한다.
일자리 혁신이라고 하는 사회적 실험(social experiments)을 위해 새로운 투자기회를 만들어 그 기반이자 계기로 삼을 필요가 있다. 이 절실한 과제의 수행을 도모하며 최근 주요 사회적 주체들간 획기적인 의기투합이 이뤄졌다. 이미 언론에 떠들썩하게 회자되고 있는 광주형 일자리 사업이 그것이다. 광주와 함평 사이에 막 조성된 빛그린 산단에 광주광역시와 현대자동차가 공동으로 출자해서 연생산량 약 10만대 규모의 경형 SUV를 생산하는 신규 완성차 공장 합작법인을 만들기로 합의한 것이 그 핵심이다.
합의의 성사를 위해 광주시는 지역노사민정협의회를 가동시켜 새로운 일자리 질서 형성을 위한 다양한 원리들을 노사상생발전협정서라는 제하에 결의했다. 현대차는 그러한 결의를 믿고 투자를 결정하면서 생산과 경영의 노하우를 아낌없이 제공하기로 했다. 합작법인의 투자주체로 대기업과 지방정부가 호흡을 맞춘다는 것도 흥미롭지만, 그것을 결정한 과정 자체도 독특하다. 이미 그 안에는 일자리 혁신의 상이 인상적으로 담겨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1월 31일 오후 광주시청 1층 시민홀에서 열린 광주광역시-현대자동차 투자협약식에서 윤종해 한국노총 광주본부장, 이용섭 광주광역시장, 이원희 현대자동차 대표이사(왼쪽부터)와 손을 잡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광주광역시 제공)
참신한 사회적 실험으로서 광주형 일자리 사업이 추구하는 혁신의 내용은 무엇인가? 세 가지를 짚을 수 있겠다. 첫째는 양극화를 극복하는 방향으로 노동시장을 혁신하는 일이다. 현재 한국의 자동차산업에는 한편으로 기존의 완성차 업체를 중심으로 형성된 장시간-고임금 노동을 기반으로 한 일자리군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 수직계열화된 하청구조 하에서 장시간-저임금 노동이 만연한 하청업체의 일자리군들이 고통스럽게 공존하고 있다. 중간지대에 적정임금을 설정하여 일자리 질서 전반의 상향균형화를 추구하는 광주형 일자리는 이러한 모순적인 구조를 혁파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신규 합작법인은 완성차 업체임에도 평균임금 3500만 원이라는 파격적인 길을 설정했다. 동시에 하청업체들에서도 그러한 노동시간과 임금의 적정성의 원리를 최대한 실현해 가기로 했다. 신설법인에 적용될 적정임금에는 일종의 사회임금의 옷을 입혀, 종래에 기업복지로 해결되어야 할 여러 혜택들 주택, 의료, 교육, 보육 등 - 을 사회복지로 충당되도록 정부가 지원키로 했다. 포용국가 일자리의 새로운 전형을 지향하는 것이다.
둘째는 노사관계의 혁신이다. 광주형 일자리에서는 지역노사민정협의회라고 하는 사실상 기능이 미약한 제도적 기구에게 새롭게 생명을 불어 넣어, 지역의 다양한 이해당사자들로 하여금 공동으로 신설법인과 산업단지의 노동시장의 원리를 설정(setting)하는 역할을 맡도록 했다. 그러한 원리가 단지 종이 위의 개혁에 머물지 않고 제대로 물화되기 위해서 향후 지역노사민정협의회의 역량을 크게 강화시켜 빛그린 산단의 노동시장질서 전반이 노사상생의 원리로 차도록 필요한 제도적 장치들을 주도적으로 구축해 가게 해야 한다.
나아가 신규 합작법인을 선두로 하여 권리주장과 시장형편 강변이 날카롭게 부딪히는 악무한적 노사관계가 아니라, 책임과 권한이 균형을 갖도록 하고, 그 토대 위에서 상생을 뿌리 내리게 해야 한다.
셋째는 생산방식의 혁신이다. 이미 현대차는 지난 20년간 해외공장에서 수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기술 및 생산방식상의 혁신을 다양하게 거둬 왔다. 그러나 국내 공장에서는 갈등적 노사관계와 고비용의 장벽에 막혀 그러한 혁신의 성과들을 제대로 실현해 갈 수 없었다. 이제 광주의 신설합작법인에 21세기를 지향하는 첨단공법들을 과감하게 적용해 탁월한 생산성을 자랑하는 공장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 일환으로 노동자들의 참여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숙련원리들이 학습조직(learning organization)의 틀에 담겨 구현돼야 한다. 기술과 인간의 유기적 조화가 극대화되면서도 노동자들이 소외되지 않고 혁신의 성과를 함께 누릴 수 있게 해, 궁극에 그것이 생산성 증진의 자양분으로 피드백(feedback)되도록 해야 한다.
광주형 일자리는 우리 사회 일자리 혁신의 마중물이 돼야 한다. 그러하기에 단순히 한 새로운 기업의 비즈니스 성공 여부로만 그것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초래할 이러한 복합적 혁신의 과제가 이 사회실험을 통해 얼마나 달성됐는지, 그 다음 과제는 또 무엇인지를 면밀히 진단하고 답을 찾는 논의와 실천이 이 사업을 통해 우리 사회에 얼마나 튼실하게 자리잡고 확산됐는지를 함께 놓고 판단해야 한다. 어렵고 막막하지만 우리 사회가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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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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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소 경제 세계 1위 가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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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철 산업연구원 산업통상연구본부 본부장
수소 경제 세계 1위 되기 위한 주요국의 전략
자동차로 유발된 친환경 에너지 문제로 수소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아직 수소자동차와 수소에너지가 자동차산업과 에너지산업을 주도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지만 적어도 에너지 다변화의 관점에서라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데는 대부분 동의하고 있다. 에너지 문제를 떠나 자동차의 이용이라는 차원에서도 대형 장거리 이동수단으로는 배터리 전기자동차가 불편하고, 수소자동차가 편리하며 효율적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에 따라 주요국은 수소 경제로의 전환을 위해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유럽은 신재생에너지로 에너지시스템을 전환하면서 섹터 커플링(Sector coupling)의 일환으로 수소를 활용하고 있다. 또한 유럽은 FCH JU(Fuel Cells and Hydrogen Joint Undertaking)를 통해 연료전지 및 수소에 관한 연구를 추진해왔다. FCH-JU은 수소 경제의 EU 공급사슬(Supply Chain)을 건설한다는 슬로건으로 연구개발을 지원하고 있다.
FCH-JU는 민간과 공공부문이 공동으로 설립한 기구로서 2008년 5월에 설립되어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수소관련 연구를 지원해오고 있다. 이의 결과로 유럽업체들이 미국, 일본, 한국 등의 수소충전소를 건설하는 데 참여하고 있다고 홍보하고 있다. 미국도 현재 H2@Scale이라는 제목 하에 에너지성의 주관으로 수소 경제로의 전환에 대한 연구를 추진하고 있다.
수소 경제에 가장 적극적인 정책을 펴고 있는 국가가 일본인데, 2014년 4월 각의를 통과한 에너지기본계획에서 수소이용계획을 명시화한 이후 같은 해 6월 수소,연료전지전략로드맵을 수립했고, 2017년 12월 수소기본전략을 확정,발표했다.
이 계획에는 수소의 공급 및 운송, 수소차, 발전 등에서의 수소 활용, 관련 기술개발 및 국제표준 등이 종합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중국은 수소 경제 전반에 대한 발전계획은 아직 없지만 최근 본격적인 논의가 이뤄지고 있고, 2015년 발표한 중국제조 2025에서는 연료전지자동차의 발전을 언급했다.
이를 기반으로 작성한 2016년 중국제조 2025 중점영역기술혁신로드맵에서는 2030년까지의 비교적 상세한 수소연료전지자동차 발전목표를 제시했다. 2017년 7월 중국자동차기술연구센터에서는 중국연료전지자동차발전로드맵을 발표했는데, 이에는 자동차 및 연료전지뿐만 아니라 수소인프라, 수소저장기술 등에 관한 비교적 상세한 발전정책이 나와 있다.
한국, 목표대로라면 수소 경제 세계 1위 될 수 있나?
우리 정부는 관계 부처 합동으로 지난 1월에 수소 경제 활성화 로드맵을 발표했다. 이 로드맵에서는 구체적인 목표로 2040년에 수소자동차는 누적 기준으로 생산 620만 대, 내수 290만 대, 수출 330만 대, 수소 충전소 보급은 1200개 이상, 수소 공급은 526만 톤/년 이상, 수소가격은 3000원/kg 등을 제시했다. 누적 기준을 연간 기준으로 환산하면, 2040년 연간 신규로 증가하는 수소차의 생산, 내수, 수출 등이 각각 133만 대, 55만 대 및 78만 대가 될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2018년 우리 자동차 전체 생산, 내수, 수출 등의 33%, 35.5%, 31.8%에 해당해 매우 도전적인 목표가 아닐 수 없다.
국가별로 2040년까지 아직 정확한 목표가 없어 우리와 비교가 쉽지 않지만 2030년까지의 목표를 기준으로 보면, 주요국들도 일반적인 전망에 비해 매우 높은 수치를 제시하고 있다. 수소차는 일본이 80만 대(수소 버스 1200대), 중국이 100만 대 등의 보급목표를 세우고 있고, 충전소는 일본이 900개, 중국이 1000개 등으로 우리의 2040년 수치와 비슷한 수준이다.
일본의 수소공급 목표는 2030년 30만 톤에 불과하지만, 그 이후 1000만톤 이상으로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수소 가격의 경우 일본은 2030년 3392원/kg, 이후 2262원/kg까지 떨어뜨린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있어 우리에 비해서는 다소 낮은 가격 수준이다. 이러한 목표나 각국의 정책을 기준으로 보면 누가 세계 수소산업을 주도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어떻게 해야 수소 경제 세계 1위가 될 수 있나
결국, 수소 경제 세계 1위가 되는 것은 경쟁력 있는 수소뿐만 아니라 수소자동차 등 관련 제품들을 공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데 있다.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수소자동차와 수소에너지로의 전환이 가능할 것이냐의 문제도 값싸며 친환경적인 수소자동차와 수소에너지가 생산되면 자연 해결될 수 있다.
이에 따라 수소 경제의 1위 대국이 된다는 것은 세계 전반적인 추세에 우리가 가장 앞서 나가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오히려 우리가 세계적인 추세를 주도해 나가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경쟁력 있는 수소 경제 생태계를 갖춰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수소 경제의 생태계는 수소의 생산 및 운송, 충전, 수소자동차뿐만 아니라 여타 활용부문 산업의 육성까지를 포괄하는 광범위한 영역이다.
다른 산업과 달리 이들 모든 부분이 다 초기단계에 있기 때문에 수소 경제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생태계 전반이 동시에 발전해야 한다. 이를 정부나 특정 기업이 모두 다 하는 것은 쉽지 않고, 정부, 다양한 부문의 기업 및 연구소, 대학 등이 동시에 공동으로 노력해야 한다. 모든 주체의 자발적인 참여가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수소 경제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형성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정부는 수소 경제로의 전환에 대한 확실한 비전과 실행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계획대로 수소차 및 수소충전소의 보급을 지속적으로 확대해나가야 할 것이다.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이 흠이지만, 수소의 수요가 많은 공공버스 등에 수소차 보급을 빠르게 추진하는 것은 유용한 정책수단이 될 것이다.
수소경제활성화로드맵에서는 2022년 2000대의 버스를 보급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일본의 2030년 목표보다 많은 수준이다. 공공부문을 중심으로 수소자동차뿐만 아니라 여타 운송수단, 발전 및 난방 등 다양한 분야에서도 수소의 활용을 확대해나가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많은 영역에서 수소 경제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형성되고 민간 스스로 차량뿐만 아니라 수소에너지의 생산 및 수송 등에 대한 기술개발을 추진하게 될 것이다.
주요국에 비해 수소 경제에 대한 정책 실시가 다소 늦었지만 우리나라는 기업주도로 이미 수소차의 경쟁력을 확보해왔다. 향후 수소공급의 경쟁력 향상도 민간 주도가 가능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산유국이 아니지만 정유나 석유화학을 수출산업으로 육성한 경험이 있다. 수소자동차뿐만 아니라 수소의 수출국으로 부상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대기업 차원에서 수소자동차의 성능 향상과 가격 인하를 위해 노력하겠지만, 부품 및 소재의 육성 없이는 쉽지 않다. 정부 차원에서 수소차 부품 및 관련 소재의 개발과 생산이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부품소재업체들을 육성해 나가야 할 것이다. 경쟁력 있는 수소 생산 방식이나 저장 등을 위한 용기 개발 등 많은 부분에 있어 관련 기업의 육성이나 연구개발 추진이 필요하고 연구기관 및 대학에서 이러한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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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철 산업연구원 산업통상연구본부 본부장
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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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언론 보도 분석을 통해 본 ‘동해 명칭’ 홍보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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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균 동북아역사재단 독도연구소 연구위원
오늘날 한일 양국은 바다 명칭을 놓고 치열한 외교전을 펼치고 있다.
한국 정부는 1991년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동해명칭(East Sea) 표기의 세계적 확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물론 일본해 단독 표기를 고수하는 일본 정부의 방해로 어려움도 많았다. 하지만 우리 정부와 민간의 노력으로 세계의 많은 국가들은 점차 한국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었고, 동해,일본해 명칭의 병기도 꾸준히 증가되고 있다.
그동안 우리 정부와 관계기관에서는 해외의 주요 지도제작사 관계자, 지명전문가, 교과서 집필진 등을 초청해 일본해 명칭 단독표기의 부당성을 제기했다.
아울러동해,일본해 명칭 병기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등 동해 명칭의 세계적 확산을 위해 노력했고, 표기명칭 오류시정을 위해 해외의 주요 기관 및 지도제작 관련 인터넷 사이트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있다.
그러나 투입되는 시간과 비용에 비례해 명칭병기의 결과가 언제나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며, 전파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보다 발전적인 전략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19~20세기는 통일성과 표준화가 강조되던 시기로, 해양명칭에 대해서도 정부의 입장이 중시되었으나 민간부문이나 대중의 목소리는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
하지만 21세기는 차이와 다양성, 그리고 개성이 존중되는 시기로 과거 제국주의의 유산이 반영된 명칭보다는 해당 수역에 인접한 국가의 정체성과 입장이 존중되는 상황으로 바뀌는 추세이다.
한편 동해명칭 표기의 전파와 확산을 위해 기존에는 주로 지도제작사에 관심을 갖고 표기명칭의 현황과 추이를 주시했는데, 동해명칭 전파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정적인 지도제작사보다는 훨씬 더 자율적이고 역동적으로 작동하는 언론매체로 관심을 돌릴 필요가 있다.
언론에서 다뤄지는 일상의 뉴스와 기사는 일반 대중들에게 가장 신속하게 전달된다. 일반인들도 방송과 신문을 통해서 국내외 최신 뉴스와 정보를 거의 실시간으로 접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모바일을 통해 언론과 대중의 거리가 훨씬 더 가까워지고 있다.
따라서 세계 유수 언론에서 한국 관련 뉴스와 기사가 어떤 방식으로 다뤄지고 있는가를 파악할 수 있다면 문제의 지점을 신속하게 찾아내고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최근 동북아역사재단에서는 <해외 언론의 동해 인식>이라는 연구를 수행했는데, 동해명칭 전파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숙고 과정에서 우리는 재단의 연구를 통해 어떤 영감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재단의 연구는 프랑스, 영국, 미국, 영연방, 불어권 지역의 대표적인 신문사와 방송사를 대상으로 동해명칭 표기 현황 및 언론사 내부의 의사결정 프로세스를 밝히고, 언어권별로 표기명칭 전파경로와 언어권별 동해명칭에 대한 선호도 등 표기명칭 특성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영어권인 캐나다에서는 동해명칭에 부정적인 반면 호주와 인도는 긍정적이고, 싱가포르는 호의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프랑스어권의 경우 벨기에와 캐나다 퀘벡은 긍정적이었으나 룩셈부르크와 알제리는 부정적으로 나타났다.
한편 영어권 캐나다와 프랑스어권 캐나다의 선호도가 확연히 다르게 나타난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다. 동해,일본해 명칭 병기에 호의적인 프랑스의 AFP통신은 프랑스어권 캐나다의 언론매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판단된다.
반면 일본해 단독명칭을 선호하는 AP통신은 영어권 캐나다의 언론매체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
요컨대 동해명칭은 언어권에 따라, 지역에 따라, 언론사의 방침에 따라, 언론사 관계자의 성향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이러한 자료를 근거로 맞춤식 홍보전략을 수립한다면 동해명칭 전파의 효율성은 극대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덧붙여 언론사 관계자의 성향과 의지가 동해명칭 표기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변수가 될 수도 있다는 가정 하에, 한국 정부와 관계기관에서는 해외 언론매체 관계자들을 초청해 울릉도와 독도를 탐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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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균 동북아역사재단 독도연구소 연구위원
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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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라임의 체계를 정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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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들어서며 한국힙합은 본격적인 기틀을 잡아가고 있었다.
미국에서 날아온 드렁큰 타이거가 충격을 선사했고, 클럽 마스터플랜은 언더그라운드 힙합을 형성했다. PC통신 동호회의 움직임도 있었다.
인터넷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 사진 1장을 다운하려면 몇 시간이 걸리던 PC통신 역시 한국힙합의 산파 중 하나였다. 예를 들어 가리온과 주석, 다이나믹 듀오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우리는 하이텔의 힙합 동호회 블렉스(Blex)와 마주칠 수밖에 없다.
SNP 역시 마찬가지다. SNP는 나우누리의 흑인음악 창작 동호회였다. 당시 SNP의 주축은 버벌진트, 데프콘, 피-타입 등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당시 힙합은 내 인생이라고 외치며 래퍼를 자처한 수많은 청년 가운데 가장 명석한 축에 속했다.
요즘은 콘서트보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더 자주 보이는힙합 비둘기 데프콘.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무엇보다 이들의 차별점은 학구적인 면모였다. 힙합을 진지하게 대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이들의 진지함에는 연구와 이해가 수반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이들이 각별히 문제의식을 가졌던 것은 바로 라임이었다. 당시 이들의 생각을 내 멋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지금의 한국어 랩에는 어떠한 고민도 들어 있지 않아! 랩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초보적이고 저질이란 말이다!
지금의 버벌진트(VerbalJint)를 떠올리면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긴 하지만 2000년대 초반의 버벌진트는 20대 초반의 혈기왕성한 청년이었다. 자신감 가득하고 약간 건방진 청년이었다고 보는 편이 더 맞을 수도 있겠다. 그리고 버벌진트의 말대로 당시 한국래퍼들의 라임은 대체로 초보적이었다.
끝말 맞추기나 완전히 똑같은 단어로 라임을 맞추기 급급했고,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상의 더 나은 방식에 대한 상상 자체가 없었다. 냉정하게 평가하면 드렁큰 타이거의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에 담긴 한국어 랩 역시 이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세(상), 이(상), 너무나도 괴(상), 너희가 최고라니 그건 너무 환(상)
물론 크게 보면 이것도 성취라면 성취였다. 하지만 한국어 라임은 앞으로 더 나아가야 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버벌진트는 새 앨범을 발표했다.
2009년 제6회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가수 버벌 진트가 랩힙합 음반부문을 수상했다.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앨범 제목은 Modern Rhymes EP, 즉 새 시대를 개막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진정한 한국어 라임의 시대 말이다. 앨범의 첫 곡 Overclass를 보자. 이 노래의 후렴 가사는 이렇다.
Suckers can't feel my rhyming / 어떻게 이런 놈들과 나란히 / 힙합을 얘기하니? / 아까워, 내 시간이
가사만 보면 언뜻 라임이 없는 것 같지만 실제로 발음해보면 라임이 있다. my rhyming과 나란히가 라임을 이루고, 얘기하니와 내 시간이가 라임을 이룬다.
같은 단어도 아니고, 한글과 영어를 넘나들며, 음절수도 다르다. 심지어 어떤 라임은 한 단어인 반면 어떤 라임은 어절과 어절 사이에 걸쳐 있다. 그럼에도 라임이 된다. 한국어 라임에 혁명이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또 다른 앨범 수록곡 사랑해 누나도 마찬가지다.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라임이 곳곳에 묻어 있다.
우중충했던 나의 아침 시간은 / 이제 그녀와 함께 할 / 수 없이 많은 일에 대한 설레임으로 가득하네 / 한 사람을 향해 이토록 기쁘고 / 또 야릇하게 떨리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니! / 거리를 함께 거닐며 / 시간이 흐르는 것도 모르고 긴 이야기 나누었네 / 누나 손 잡고 MP 가기 하루 전에
간은 이제와 많은 일에, 가득하네와 야릇하게, 있다니와 시간이와 이야기, 나누었네와 하루 전에가 각각 라임을 이룬다. 버벌진트의 Modern Rhymes EP는 끝말 맞추기 라임의 시대를 끝냈다.
버벌진트가 선보인 한국어 라임은 한국어에 깊은 전공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만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버벌진트의 성취는 중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졸지 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것에 가까웠다.
즉 자음동화나 구개음화의 기본 원리를 이해하고 있고, 거센 소리나 된 소리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출발점에 서는 것이 가능한 성취였다. 하지만 당시 한국 래퍼들은 랩의 특성인 라임을 한국어에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데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였)다.
반면 버벌진트는 그 과제를 인지하고 학구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결국 스스로 한국어 라임의 본보기가 되었다.
버벌진트가 2015 멜론뮤직어워드에서 무대에 올라 공연을 펼치고 있다.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버벌진트가 이룩한 한국어 라임의 혁명은 곧 메시지의 해방을 불러왔다. 버벌진트 이전의 한국어 라임, 그러니까 끝말 맞추기나 완전히 똑같은 단어로 라임을 맞추던 방식의 진짜 문제는 메시지가 라임에 종속되어 개연성을 잃고 어수선해지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었다. 이를 테면 이런 것이다.
좋은 세(상), 나의 공(상), 넌 너무 진(상), 박정희의 동(상), 엄마의 밥(상)
라임은 맞췄지만 내용은 산으로 가버렸다. 하지만 버벌진트의 방식은 메시지의 흐름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라임의 배치를 곳곳에 가능하게 했다. 그렇기 때문에 버벌진트의 가사는 눈으로 읽기만 할 경우엔 랩 가사인지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실제로 사랑해 누나의 가사는 텍스트만 보면 언뜻 에세이나 짧은 소설처럼 보인다. 하지만 소리 내어 읽어보면 숨어(?) 있던 라임들이 살아나며 랩 가사가 된다. 이것은 분명 더 진화한 결과물이었다.
Modern Rhymes EP의 발매 후 십 수 년이 지난 지금, 버벌진트의 한국어 라임 방법론이 더 이상 특별하지는 않다. 이제는 모두가 이런 방식으로 라임을 맞춘다. 그러나 이 사실은 역설적으로 아직도 한국어 랩이 버벌진트가 정립한 체계의 연장선 위에 존재한다는 점을 깨닫게 한다.
버벌진트의 방법론이 유일한 진리라거나 최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앞으로 더 설득력 있는 방법론이 등장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분명한 사실이 있다.
20여 년에 가까운 지난 세월 동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 김봉현 힙합 저널리스트/작가
대중음악, 특히 힙합에 관한 다양한 활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책을 쓰고 강의를 하고 영화제를 만들고 가끔 방송에 나간다. 시인 및 래퍼, 시와 랩을 잇는 프로젝트 포에틱저스티스로도 활동하고 있다. 랩은 하지 않는다. 주요 저서로 한국 힙합, 열정의 발자취, 한국힙합 에볼루션, 힙합-우리 시대의 클래식, 힙합-블랙은 어떻게 세계를 점령했는가, 나를 찾아가는 힙합 수업 등이 있고, 역서로는 힙합의 시학, 제이 지 스토리, 더 에미넴 북, 더 스트리트 북, 더 랩: 힙합의 시대 등이 있다. murdamuzi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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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현 힙합저널리스트/작가
2019.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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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형 일자리, 침체된 지역경제 ‘희망의 등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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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호 무등일보 경제부장
기해년 황금돼지 해도 벌써 두 달째 중순을 지나고 있다.
풍요를 상징하는 돼지해에 팍팍한 가정 경제가 조금이나마 나아지질 바라는 서민들의 소망이 어느 해보다 간절하지만. 실물경제에서 이런 희망의 기운을 찾기는 아직 쉽지 않다. 서민들이 체감하는 경기는 지금의 날씨 만큼 차갑고 일자리 문제 또한 심각하다. 청년들은 수백장의 원서를 내지만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비정규직과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있다. 취업을 아예 포기하는 청년들도 늘고 있다.
연초 부터 우울한 소식만 넘쳐나고 있는 가운데 우리에게 반가운 소식이 찾아왔다.노사상생과 사회적 합의의 새로운 모델인 광주형 일자리 사업이 광주시가 공약을 내건 지 4년 7개월만에, 현대자동차가 투자의향서를 제출한 지 7개월 만에 결실을 맺었다.
광주시와 현대차는 지난달 31일 투자 협약식을 맺고 빛그린산단에 공장 설립을 위한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이번 합의는 지역 노동계의 결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동안 노사상생협의회 결정사항의 유효기간 조항을 거부해 왔던 지역 노동계가 이를 전격 수용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인 노사 상생형 일자리 창출 모델로 광주형 일자리를 적극 추진한 것도 큰 힘이 됐다는 분석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이용섭 광주광역시장, 이원희 현대차 대표이사 등이 지난달 31일 오후 광주시청 1층 시민홀에서 열린 광주광역시-현대자동차 투자협약식에 참석해 행사를 마친 뒤 지역특성화 고교생들과 기념촬영을 하며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사진=광주광역시)
독일 모델을 벤치마킹한 광주형 일자리 사업은 사회적 합의를 통해 대립적인 노사관계를 상생적인 구조로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치단체가 직접 투자자로 나서 기반시설과 복리후생 비용을 지원하는 상생의 일자리 창출 프로젝트라는 점에서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실험적 모델이다. 그만큼 어렵고 힘든 여정이었지만, 광주가 이뤄냈다.
독일 실업률이 10%를 넘었던 1999년 폭스바겐은 노조에 공장을 새로 지어 월급 5천 마르크에 실업자 5천명을 채용하겠다는 아우토 5000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5천 마르크는 기존 임금보다 20% 낮지만 1인당 국민소득보다는 30% 높은 수준으로 노조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2002년 독립법인으로 문을 연 공장은 히트작 투란과 티구안 생산기지 역할을 한 뒤 2009년 폭스바겐에 편입됐다.
광주형 일자리 사업은 근로자는 일반 완성차 업체의 절반 수준 연봉을 받는 대신 정부와 자치단체가 주택, 의료, 교육 등을 지원해 실질 소득을 높여주는 새로운 모델로 추진됐다. 광주시가 1대 주주, 현대차가 2대 주주로 참여해 연간 10만 대의 경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생산 공장을 세우면 직접고용 1천여명, 간접고용 1만1천여명 등 1만2천개의 신규 일자리가 창출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광주형 일자리 사업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의미가 크다.
그동안의 대립적이고 소모적인 국내 노사관계에서 새로운 노사상생 관계를 구축했다.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지만, 노사민정이 대화와 양보로 사회적 대타협을 이뤄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극한 대결로만 일관했던 국내 노사 문화에서 상생 정신을 바탕으로 합의를 이끌어내 향후 노사관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수도권과의 극심한 격차로 갈수록 침체되고 있는 지방경제에도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란 점도 긍정적이다. 일자리만 1만 2천개가 창출되고 부품 등 연관 산업 파급 효과까지 고려하면 광주형 일자리는 지역 발전의 새로운 기회가 될 것이다.
또 청년층 고용 창출과 제조업 활성화에도 긍정적 영향을 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고비용,저효율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는 국내 제조업의 새로운 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광주형 일자리 협상 타결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그동안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다. 그 만큼 가야 할 길이 멀고 험난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성공 모델로 정착되면 침체의 늪에 빠진 지역 경제와 일자리 창출에 새로운 희망의 등불이 될 것이다. 광주형 일자리 사업이 황금돼지의 기운을 받아 광주를 넘어 동병상련의 다른 지방으로 확산돼 일자리 창출과 지역 균형 발전에 활력소로 작용했으면 하는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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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호 무등일보 경제부장
2019.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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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범의 초대, 평화와 공존의 바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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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이 머리를 맞대고 한반도의 평화와 미래를 디자인하고 있다. 이에 답하듯 작은 소식이 들렸다. 작년 백령도를 찾았던 점박이물범 300여 마리 중 세 마리가 10년 전에 조사한 물범과 동일한 개체라는 것이다.
300여 마리 중 세 마리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할지 모른다. 그런데 그게 그렇지 않다. 지속적으로 백령도를 찾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서식지로서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물범은 개체마다 사람의 지문처럼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또 무리별로 좋아하는 서식지가 있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물범은 멸종위기 야생동물이자 천연기념물이다. 작년 백령도에서 316마리가 확인되었다. 이제 과제는 섬주민의 삶과 물범의 삶이 백령도와 바다에서 공생할 것인가 방법을 찾아야 한다.
백령도 하늬바다에 서식하는 점박이물범.
살아남은 것이 다행이다
물범은 해양포유류이다. 해양포유류는 바다소류, 물범류, 족제비류, 고래류 등이다. 물범류는 백령도를 점박이물범을 포함해 바다사자, 바다코끼리 등 식육목 기각상과에 속한다.
포유류는 육상에서 진화한 동물로 척추뼈가 달리기에 적합하도록 위 아래로 발달했다. 어류가 헤엄치기 적합한 좌우로 움직이는 것과 다르다. 대신에 물범류는 네 개의 다리에 있는 다섯 개의 발가락 사이에 물갈퀴로 연결되어 있고, 꼬리지느러미가 세로인 어류와 달리 가로로 놓여 있어 헤엄을 칠 때 상하로 움직인다.
백령도 물범은 10월 말이면 번식지인 동중국해 발해(Bohai Sea)의 리아오동만(Liaodong Bay)로 이동한다. 겨울 동안 그곳 빙하에서 출산하고, 춘삼월이면 다시 백령도를 찾는다. 출산여행을 위해 백령도에서 충분한 영양분을 섭취해야 한다.
세계적으로 40만 마리가 있으며, 우리나라는 1940년대에 8천 마리까지 서식했지만, 지금은 2천여마리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집단적으로 서식하는 곳은 백령도가 유일하다.
점박이물범이 무리를 지어 있는 모습.
지난 10여년 동안 백령도에 꾸준히 300여 마리가 관찰되고 있다. 점박이불범은 백령도에서는 까나리와 멸치를 즐겨 먹지만 청어,명태 등 물고기와 대형 플랑크톤을 잡아먹는다. 중국의 해양오염과 보신용 남획으로 백령도를 찾는 물범개체수가 많이 감소했다.
1970년대까지 물범 외에도 물개와 바다사자 등이 한반도 주변에 서식했다. 역시 잘못된 보신문화와 남획 그리고 서식지 훼손으로 사라졌던 경험이 있다.
지난 10년, 탐색의 시간
물범을 처음 만난 것은 10여년 전이다. 물범 프로젝트를 시작한 환경단체와 인연이 계기였다. 그때 만난 백령도 주민들은 물범을 쫓아내야 주민들이 살 수 있다며 그 프로젝트를 노골적으로 반대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10년 동안 백령도를 오가며 물범을 보호하는 일을 해온 박정운 국장(녹색사회연구소)은 요즘처럼 신이 난 적이 없다.
박정운 녹색사회연구소 국장, 10여년 간 물범 모니터링을 하면서 주민들과 가까워져 백령도 아가씨로 통할 정도로 친화력이 좋다.
지난 연말에 박 국장은 점사모의 초대를 받고 겨울바다를 뚫고 백령도를 다녀왔다. 점박이물범을 사랑하는 모임에서 송년모임을 한다며 초대한 것이다. 이들은 모두 백령도 주민들이다. 이 자리에서 이제 주민들이 주체적으로 물범을 지키는 일을 해보자는 당찬 결의도 내놓았다.
그뿐이 아니다. 중고등학생들도 점박이물범 생태학교 동아리를 만들어 물범을 지키는 일에 나서고 있다. 물범에서 시작해 해양쓰레기모니터링을 비롯해 생태여행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 정도면 남북관계에 버금가는 변화다. 주민들이 쫓아내려 했던 물범을 이제 주민들 중에 사랑하고 지키자는 변화가 생긴 것이다.
작년에는 주민들의 동의를 얻어 물범 쉼터를 어업활동을 하는 어장 안에 물범쉼터를 조성하겠다고 결정했다. 어민들이 자신들의 생계 터전에 물범이 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이 결정이 나오기 까지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간다.
백령중,고등학생으로 이루어진 점박이물범 생태학교 학생들.
백령도의 생태와 문화자원들
백령도에도 작은 변화가 일고 있다. 우선 여행객들이 늘고 물범의 안부를 묻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용기포 선착장에는 백령도를 상징하는 물범 조형물이 만들어졌고, 섬 곳곳에 물범 그림과 상표를 확인할 수 있다.
백령도는 두무진이라는 명승과 콩돌해변 그리고 사곶해변 등 관광지가 제법 많다. 오는 길에 스치는 연평도는 어장을 먹고 살지만 백령도는 농사를 지어 산다고 한다. 인천에서 가장 멀리 있는 섬, 북한과 더 가깝고 남북이 나뉘기 전에는 무시로 오가는 생활권도 해주였다.
사곶해변.
사곶해변에서 비가 오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라이딩을 하는 외국인을만났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엄지척이다. 사곶은 천연활주로 알려져 있다. 해수욕장이 규조토로 이루어져 단단하다. 해변을 따라 조성된 해송과 모래언던에 심어진 해당화가 잘 어우러진다.
한국전쟁 때 활주로 이용되었고, 1970년대까지 비행기가 오르내렸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문화재이다. 콩돌해변도 역시 천연기념물이다. 콩알처럼 동글동글한 작은 돌이 길게 이어져 있다. 몽돌해변은 동서남해안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콩돌은 백령도뿐이다.
두무진은 국가지정 문화재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장산곶과 마주보고 있는 두무진은 백령도에서 어업이 가장 발달한 마을이다. 이곳 주민들은 유람선도 운영하고 있다. 형제바위를 비롯해 두무진의 명승을 보는 것도 인기지만 최근에는 바위에 올라와 있는 물범을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
명승 두무진.
1896년 세워진 중화동교회는 한국교회선교사를 잘 읽을 수 있는 곳이다. 이처럼 섬은 한국기독교 선교의 교두보이자 순교지였다. 교회 앞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무궁화가 있다. 예전 같지 않고 시름시름 앓고 있다.
백령도의 아픔이자 우리 민족의 아픔인 천안함 46용사 위령탑도 주목해야 한다. 반면교사로 삼아 물범을 평화생태여행의 상징으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이다.
콩돌해변.
백령도, 새 희망을 꿈꾼다
두무진에는 특산물 판매장이 있다. 주민들이 운영하는 유람선도 운항 중이다. 짠지떡, 메밀칼국수, 메밀국수, 백령굴 등 백령도를 대료할 만한 음식들도 없지 않다. 여기에 광어, 조피볼락, 노래미, 까나리, 톳, 다시마, 홍합 등이 수산물과 백령도 쌀, 약쑥도 유명하다.
아쉽다면 백령도의 브랜드를 높일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쩌면 물범이 그 해법을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주민들 힘만으로는 어렵다. 인천과 옹진, 해양수산부도 적극 나서야 한다.
메밀꽃, 직접 심은 메밀로 만든 모밀과 칼국수가 유명하다.
점사모는 물범을 자원으로 생태관광을 준비하고 있다. 기존에 명승지를 돌아보는 여행을 넘어 백령도의 가치를 높이는 여행을 꿈꾸고 있다. 쉽지 않는 길임을 안다. 앞으로도 이해당사자인 어민들 논의과정에서 고비가 많을 것이다. 첫술에 배부르지 않지만 방향을 찾은 것 같다.
하늬바다를 풍성한 바다숲으로 만들어 더 많은 어류와 수산동식물이 자라게 하고, 물범과 어민이 공생하는 바다로 만들어야 한다. 다시마와 바지락과 까나리가 있는 하늬바다는 물범만 아니라 어민들도 좋아한다. 물범과 주민이 공존하는 방식이다. 백령바다가 건강하고 평화로울 때 가능하다. 벌써 봄이 기다려진다.
◆ 김준 섬마실 길라잡이
어촌사회 연구로 학위를 받은 후, 섬이 학교이고 섬사람이 선생님이라는 믿음으로 27년 동안 섬 길을 걷고 있다. 광주전남연구원에서 해양관광, 섬여행, 갯벌문화, 어촌사회, 지역문화 등을 연구하고 정책을 개발을 하고 있다. 틈틈이 섬살이를 글과 사진으로 기록하며 섬문화답사기라는 책을 쓰고 있다. 쓴 책으로 섬문화답사기, 섬살이, 바다맛기행, 물고기가 왜, 김준의 갯벌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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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 섬마실 길라잡이
2019.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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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자원 선진국에서 지속가능한 목재이용 선진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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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호 경상대학교 산림환경자원학 교수
우리 아빠는 지구를 지켜요. 미세먼지를 줄이고 나쁜 연기를 없애서 공기를 맑게 해주고, 소나무를 많이 심어 북극곰을 살려 준대요.
어느 보일러회사 CF의 한 장면을 볼 때면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누가 봐도 지나친 비약이지만 어린이의 순수한 상상력에 딴죽 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공기청정기가 가정의 필수품이 되고, 외출할 때 마다 마스크를 챙기며, 기상뉴스에서 미세먼지 농도를 챙겨 듣는 시대가 되었다.
기업들이 미세먼지를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한다는 부정적인 시각도 있지만 숲의 중요성을 국민이 재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나름 긍정적이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이례적으로 산림녹화의 기적을 이룬 국가다. 1970년대 ha당 11㎥이던 입목축적은 현재 154.1㎥으로 약 15배 증가했다. UN산하 FAO가 발표하는 36개 OECD 회원국의 산림현황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산림률은 63.2%로 핀란드, 일본, 스웨덴에 이어 4번째로 높고, ha당 입목축적은 OECD 평균인 116.6m3보다 훨씬 높다. 산림자원량만 가지고 우리나라를 평가한다면 임업선진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높은 임목축적에도 불구하고 국내 목재자급률은 1517% 수준으로 연간 국내 목재수요량 약 3000만 톤 중 국산 목재는 약 484만 톤에 불과하다. 게다가 국산 목재는 부가가치가 낮은 보드,펄프,바이오매스용의 저가재 활용 비중이 매우 높은 실정이다. 이는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조림사업에서 목재공급보다는 산림녹화가 급선무였기 때문에 장기적인 목재자원의 공급 및 활용은 고려되지 못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나라 임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산림청이 2019년 미세먼지 저감 조림에 357억, 미세먼지 저감 숲가꾸기에 707억을 투입하는 것도 시의 적절하지만, 근본적으로 산림경영시스템과 산림산업을 임업선진국 수준으로 육성하고 사회전반에 목재이용문화를 확산해 가는 것이 필요하다.
장성 편백숲.(사진=산림청)
그렇다면 임업선진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산림산업 육성 방안은 무엇인가? 대표적인 임업선진국인 스웨덴과 핀란드의 산림률은 우리나라보다 높지만 입목축적은 106㎥과 104㎥로 높은 편이 아니다. 이들 국가는 입목축적은 적지만 산림소유자협회 등을 통한 전문경영과 지속 가능하게 목재자원을 이용,활용하는 산림자원순환체계로 지역산업과 연계해 발전하고 있다.
생활 속의 목재문화를 기반으로 스웨덴은 세계적 가구회사인 이케아를 만들어 냈고, 핀란드는 첨단 목재가공 기계,설비와 산림조사장비를 수출하고 있다. 이 뿐만 아니라 독일, 오스트리아 등 유럽국가와 가깝게는 일본도 산림자원순환체계를 확립해 발전하고 있다.
우리도 그동안 심고 가꾼 숲을 지속 가능하게 이용할 시점에 와 있다. 정책방향도 목재이용을 활성화 할 수 있는 체계 확립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그 출발점이 경제림육성단지와 선도산림경영단지와 같은 규모화 된 산림경영이다. 우량 목재생산을 위한 경제림육성단지는 전국에 약 234만ha가 지정되어 있다. 선도 산림경영단지는 경제림육성단지 내에서도 경영여건이 우수한 1000ha이상의 산림으로, 지역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 등을 위한 산림자원순환형 이용모델을 실현하는 대상지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몇 년간 산림청은 산림경영여건이 우수한 경제림육성단지에 산림사업의 70%를 집중하고 있다. 규모화 된 경영을 통해 집약적 시업이 가능해지고, 효율적 임도망 구축, 기계화 운반 등 저비용,고효율 산림경영이 가능해져 국내산 목재의 자급률이 높아질 것이다. 대규모 단지에서 품질 좋은 목재가 안정적으로 공급됨에 따라 지역중심 목재가공산업의 발전을 기대할 수도 있다. 대리경영 등 경영전문가를 통한 산림경영 활성화로 산주의 소득도 늘어날 것이리라.
김재현 산림청장은 취임일성으로 산림자원순환경제 구축을 통한 지역중심의 산림산업활성화와 일자리창출을 내세우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선도 산림경영단지의 역할을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2017년 말 기준으로 임업가구의 평균 소득은 3459만원으로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으나, 농가(3823만원)와 어가(4901만원)에 비해서는 아직 낮은 수준이다. 규모화된 단지경영과 소규모 산주의 경영참여가 확대되고, 다양한 소득사업을 발굴해 산림경영에 부가가치를 더해 간다면 조만간 농어가에 버금가는 소득창출과 지역 활성화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임업은 단순히 심고 가꾸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숲에서 임산물을 지속가능하게 생산,공급하고, 지역 내에서 가공,이용하도록 선순환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 선도산림경영단지와 같은 규모화된 단지경영에 거는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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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호 경상대학교 산림환경자원학 교수
2019.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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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에서 유혹하는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 인형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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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 거리에서 파는 여러 가지 기념품 중에는 익살스런 모습의 인형들이 유별나게 눈길을 끈다. 이 인형들은 실로 조정하는 꼭두각시 인형이다. 체코에서는 이것을 프랑스어를 그대로 받아들여 마리오네트라고 하고, 인형극을 전문적으로 공연하는 전용극장도 있다.
체코에서 인형극 공연 전통은 체코가 합스부르크 왕조 지배하에 있던 시대인 약 1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상류층은 독일어를 썼으며 이탈리아 오페라와 독일 오페라를 즐겼다. 이러한 공연에 접근할 수 없던 일반 시민들이나 시골 사람들에게는 가족이 경영하는 소규모 마리오네트 극장이나 떠돌이 극단이 체코어로 공연하는 인형극을 보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인형극 돈 조반니의 막이 오르기 전 국립 마리오네트 극장 내부.
현재 체코의 인형극 전문 상설극장 중 가장 유명한 곳은 프라하의 국립 마리오네트 극장(NDM, Nrodn divadlo marionet)이다. 1991년에 설립된 이 극장은 인형왕국이라고 하던 기존의 마리오네트 극장이 전신이 되는데, 1929년에 바로 이곳에서 처음으로 국제 인형극협회가 창립되었다.
국립 마리오네트 극장은 고전 문학작품이나 유명한 오페라를 각색하여 무대에 올리는데 그 중 가장 성공한 작품은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이다. 이 작품은 1991년 이래, 지금까지 약 4000회 이상 공연하고 있으니까 거의 매일 저녁 공연하고 있는 셈이다.
인형극 돈 조반니의 한 장면. 무대 뒤로 인형을 조종하는 손이 보인다.
인형극 돈 조반니는 지휘봉을 든 모차르트 인형이 익살스럽게 등장하면서 시작된다. 서곡과 함께 막이 오르고 바람둥이 돈 조반니가 돈나 안나를 유혹한다. 그녀의 아버지 기사장은 돈 조반니에게 결투를 신청하나 오히려 그에게 살해당한다.
돈 조반니가 아버지를 죽인 범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돈나 안나는 약혼자 돈 오타비오에게 아버지의 복수를 부탁하게 된다. 돈 조반니는 그 이후에도 한 여자에게 접근하다가 그녀가 한때 결혼을 미끼로 유인해 정을 통했던 돈나 엘비라임을 알고는 줄행랑친다.
돈 조반니의 하인 레포렐로는 돈 조반니를 잊지 못하는 돈나 엘비라에게 그가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등지의 수많은 여자들을 울렸다며 그를 잊으라고 종용한다. 그 이후에도 돈 조반니는 마제토와 결혼하는 체를리나를 유혹하고, 또 돈나 엘비라의 하녀를 유혹하기 위헤 레포렐로와 옷을 바꿔 입는 등 상황이 복잡하게 전개된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묘지에서 돈 조반니는 그곳에 세워진 기사장 석상에게 저녁 식사에 초대한다. 기사장 석상은 그에게 부도덕한 생활을 그만두라고 호령 하지만 돈 조반니는 아랑곳없다. 그러자 땅이 열리고 돈 조반니는 지옥으로 떨어진다.
인형극 돈 조반니중 기사장 석상 유령이 돈 조반니 앞에 나타난 장면. 기사장 유령은 인형이 아닌 실제 사람이 연기한다.
신사적 매너로 여자들을 유혹하는 돈 조반니가 지옥에 떨어지기까지 모차르트의 음악은 극의 전개에 따라 인형들의 일사불란한 움직임과 함께 경쾌하고 장중하게 흐른다. 이 인형극은 극의 전개는 흥미진진하고, 기발한 연출은 연신 웃음을 자아내게 하며, 무대 뒤에서 인형을 조종하는 노련한 장인들의 신기에 가까운 손놀림은 놀라움을 자아내게 한다.
공연 시간은 중간에 쉬는 시간을 포함하여 한 시간 반 정도. 단,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가사가 모두 이탈리아어인데 영어자막도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탈리아어를 모르면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으니 내용을 미리 완전히 숙지하고 봐야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스타보프스케 디바들로.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가 초연된 극장이다. 돈 조반니 인형극은 이 극장에서 공연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가 초연된 곳이 바로 프라하다. 모차르트는 프라하의 흥행사로부터 초청받고 1787년 초 처음으로 프라하를 방문하여 청중들로부터 뜨거운 환호를 받았다. 신바람 난 흥행사는 그에게 다음 시즌용 오페라를 의뢰했다.
선금까지 두둑하게 챙긴 모차르트는 빈으로 돌아가 이탈리아 출신 대본작가 다 폰테와 함께 전설적인 스페인의 난봉꾼 돈 후안 이야기를 다룬 오페라를 만들기로 했다. 돈 후안(Don Juan)의 이탈리아식 표기가 바로 돈 조반니(Don Giovanni)이다.
마침내 이 오페라는 10월 29일 프라하 중심가에 있는 스타보프스케 디바들로(Stavovsk Divadlo)에서 초연되었는데 이 극장은 유럽에서 지금도 원래의 형태를 거의 그대로 보전하고 있는 몇 개 안되는 공연장 중 하나이다. 참고로, 돈 조반니인형극은 이 극장에서 공연하지 않는다.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미술,언어,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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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2019.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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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바 도시치’와 ‘가나야마 마사히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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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일본인이다. 한일 관계에 관심이 많은 이들은 기억하는 이름일 수 있지만,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그다지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다.
그간 보여 준 친절을 마음 속 깊이 고맙게 생각하오. 동양에 다시 평화가 찾아와 두 나라 사이에 우호 관계가 회복될 때 다시 태어나 반갑게 만나기로 하세.선생님, 진심으로 용서를 빕니다. 죄송한 마음에 가슴이 저립니다. 앞으로 선한 일본 사람이 되도록 생을 바쳐 정진하겠습니다.
한 사람은 사형수, 한 사람은 간수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중국 뤼순(旅順)감옥. 수의를 갈아입고 형장으로 가기 직전 안중근 의사와 간수 치바 도시치가 주고받은 마지막 대화다. 안중근은 31세, 치바는 25세였다.
나도 죽으면 이곳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 당신과 이 세상에서 한일 관계에 대해 못다 한 이야기를 죽어서라도 나누고 싶다.정말인가. 그럼 내가 여기에 묏자리를 만들어 줄 테니 나중에 오시겠나?
1975년 4월, 경기 파주시 조리읍에 있는 천주교 공원묘역 하늘묘원. 한국 땅에 묻히길 바란 사람은 제2대 주한 일본 대사를 지낸 가나야마 대사다. 부탁받은 사람은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이다. 이 약속은 23년이 지난 1998년 이뤄진다. 가나야마 대사는 사후 1년 만에 이곳에 안장됐다. 그의 묘 바로 옆에는 최 원장의 가묘가 나란히 있다. 가나야마 대사의 묘비에는 고인의 유언이 구상 시인의 글로 새겨져 있다. 나의 시신은 한국 땅에 묻어 달라. 나는 죽어서도 일한 간의 친선과 친화를 돕고 지켜보고 싶다.
1910년 안중근 의사가 처형 당일 간수 치바 도시치에게 써준 유묵. 유족이 남산 안중근기념관에 헌납했다.
치바 도시치(千葉十七, 1885~1934)와 가나야마 마사히데(金山政英, 19091997). 한 사람은 일본군의 말단 헌병이었고, 한 사람은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일본이 파견한 거물급 외교관이었다. 앞 이야기는 한국인 열사를 인간적으로 숭배한 한 일본인의 개인적 감정이고, 후자는 일본 정부를 대신하는 공인이 지녔던 한일 우호의 신념이었다.
110년 전인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서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하고 뤼순 감옥에 수감된다. 당시 치바 도시치는 형무소를 지키던 헌병이었다. 치바에게 안중근을 감시하는 임무가 떨어졌다. 그의 인생을 바꾼 몇 개월의 짧은 운명적 만남이 시작된 것이다. 치바는 처음에는 일본의 위인을 암살한 안중근에게 적개심을 가졌다. 그러나 안 의사 거사의 대의명분과 동양평화 철학, 사형을 판결하는 재판정에서도 꺾이지 않는 의연한 지조와 인간적 품위를 곁에서 접하면서 그를 존경하는 마음이 깊어졌다.
사형이 집행되는 날, 안 의사는 치바를 불렀다. 그리고는 자신을 정성으로 돌봐준 답례로 爲國獻身軍人本分(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이라는 글씨를 써준다. 치바도 한 나라의 군인으로서 할 일을 한 것이니 미안한 마음을 갖지 말라는 의미였다.
눈물로 안 의사를 보낸 치바는 제대를 자청하고 고향 미야기현 센다이로 돌아왔다. 그리고 철도원과 경찰로 일하며 49세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의 삶은 안 의사와 떨어질 수가 없었다. 존경을 넘어 숭배였다. 집안에 불단을 만들어 의사의 초상과 위패와 필묵을 모시고 하루도 빠짐없이 절하며 기렸다. 아내 치바 기츠요도 그의 유언을 받들어 1965년 74세로 죽을 때까지 위패를 모셨고 이는 자식으로까지 이어졌다.
그의 고향에는 대림사라는 절이 있었다. 절의 주지인 사이토 다이켄은 치바와 안중근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했다. 스님은 두 사람을 기리는 현창비와 기념관을 세웠고 둘의 영정을 모셨다. 그는 일본인의 살해 위협을 받으면서도 매년 안중근을 숭모하는 일본인들과 함께 지금까지 한 해도 빠짐없이 안 의사 추모제를 열고 있다.
안중근과 치바의 속세 인연은 슬프도록 아름답고 운명적이어서 가슴 아프다. 마치 영화나 소설 속 이야기 같다. 사형수와 간수로 만난 두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재회해 반갑게 포옹했을 것이다. 안중근의 조국인 한국에는 그토록 평생 그를 가슴에 품고 기리며 살아간 사람이 있을까.
그로부터 50여 년을 뛰어넘어 가나야마 마사히데 대사 이야기로 넘어간다. 그는 한일 국교 정상화 3년 후인 1968년 제2대 주한 일본 대사로 부임해 1972년까지 4년간 재직했다. 외교관임에도 한국에 대해 늘 미안한 마음을 지녔다 하고, 재임 중 한국의 산업화와 양국 관계 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다.
여러 일화가 전해진다. 그는 부임 후 첫 3,1절 기념식에 전례를 깨고 일본 대사 자격으로 참석했다. 본국의 질책을 받자 과거를 청산하고 한국과 잘 지내기로 해놓고 한국의 기념일을 축하하는 것을 문제 삼으면 안 된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날 박정희 대통령이 술이나 먹자며 그를 불렀다. 박 대통령은 그에게 대한민국의 주일 대사 역할을 해달라고 주문하며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일본 총리에게 포항제철소 설립에 필요한 기술 협력을 요청하는 친서를 전달해 줄 것을 부탁했다. 가나야마 대사는 일본 외무성에도 알리지 않고 도쿄로 건너가 사토 총리를 만나 이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한일 관계는 끝장이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그리고 기술 지원에 부정적이었던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寬) 신일철 회장 겸 일본 경단련(經團連) 회장을 집요하게 설득해 포철 설립의 길을 열어줬다고 전해진다.
귀국한 가나야마 대사에게 일본 외무성은 유럽 일본관장 자리를 대사급으로 격상해 맡기려 했으나 그는 사양하고 은퇴한다. 그리고 바로 도쿄에 있던 최서면 한국연구원장을 찾아갔다. 그는 1988년 최서면과 나라는 글에서 한국에서 대사로 있으면서 양국 관계가 중요하다는 신념을 품었고 제2의 인생을 한일 친선을 위해 바칠 것으로 결심했다고 썼다. 최 원장은 가나야마 대사는 일본이 아무리 주변 강국과 외교를 잘 해도 한국과의 관계가 좋지 않으면 일본 외교의 실패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파주 천주교 공원묘원에 있는 제2대 주한 일본 대사 가나야마 마사히데의 묘소.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다. 최 원장은 한국연구원에 국제관계공동연구소를 만들어 가나야마 대사에게 초대 소장을 맡겼다. 천주교 신자인 두 사람은 세례명(아우구스티노)까지 같았는데, 이후 두 사람은 형제처럼 서로를 아끼고 존중했다. 가나야마 대사는 재일동포 고령자 복지시설인 고향의 집 네 곳을 세우는 모금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의 딸은 한국 남자와 결혼했다.
가나야마 대사가 한국 땅에 묻힌 곡절은 무얼까. 1975년 가나야마는 최 원장의 모친 3주기를 맞아 파주 하늘묘원에 갔다. 그리고 최 원장에게 나도 이곳에 묻히게 해달라고 깜짝 제안을 한다. 최 원장은 가족 묘지 공간에 그의 가묘를 만들어줬다. 그 후 가나야마 대사는 가끔 자신의 가묘를 찾아 영혼이 쉴 집이 한국에 마련됐다고 기뻐하면서 성묘했다고 한다. 그는 1997년 죽어서도 한국에 사과하고 싶다. 나의 뼈 절반은 한국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이듬해인 1998년 그의 안장식은 수원교구장 김남수 주교가 집전했고 일본 성악가가 그의 애창곡 그리운 금강산을 불렀다. 그의 후배 대사들은 부임하면 이곳을 참배하며 선배 대사를 모셔준 데 감사를 표한다고 한다.
앞의 이야기에도 최서면 원장(91)이 관련이 있다. 안 의사가 치바에게 써준 유묵은 치바 가문이 대대로 가보로 모시다 안 의사 탄생 100주년인 1979년 남산에 있는 안중근기념관에 헌납했는데, 안중근을 연구해온 최 원장이 이 유묵의 존재를 알게 됐고 반환 과정에 역할을 했다. 연희전문을 나온 최 원장은 1958년 일본에 건너가 1969년 도쿄에 한국연구원을 설립해 근대 한일 관계를 연구하고 임진왜란 북관대첩비 같은 희귀 사료를 발굴한 사학자다.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한일 관계는 냉각됐다. 이 두 일본인의 이야기가 새롭게 다가온다. 한국과 일본의 과거사와 외교, 양국 친선을 풀어가는 데 작은 단초가 될 수 있지는 않을까.
◆ 한기봉 칼럼니스트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부국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글쓰기를 가르쳤고, 언론중재위원을 지냈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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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봉 칼럼니스트
2019.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