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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역사 과거, 현재…그리고 새로운 관계를 향하여

2019.09.06 정재정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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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정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명예교수
정재정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명예교수
2012년 8월 이래 나빠진 한일관계가 지금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특히 문재인 정부와 아베 신조 정부의 충돌은 민간 부문에까지 악영향을 미쳐 국민 상호의 감정도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나빠졌다. 1965년 한일 국교재개 이래 가장 험악하다.

한일관계가 파탄 난 원인은 여러 가지지만,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합의 이행을 둘러싼 대립과 전시 노무동원 피해자(이른바 ‘징용공’)에게 일본의 해당 기업이 배상하라는 한국 대법원 판결을 둘러싼 충돌이 결정적 요인이다.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의 더디고 느슨한 대응에 잔뜩 화가 나서 마침내 핵심 부품 소재 등의 수출관리를 강화하는 조처를 취했다.

한국 정부는 이것을 경제보복으로 받아들여 격렬한 반일 자세로 응수했다. 국민도 서로 원색적인 비난 공방을 되풀이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한일관계는 원래부터 잘못 관리하면 언제든지 깨질 수 있는 유리그릇처럼 불안했다. 곧 사소한 부주의로 불똥이 튀면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가스탱크와 비슷했다.

다만 이번 경우는 위기관리 책임자인 양국의 수뇌가 오히려 대결을 부추겨 파열이 넓고 깊게 퍼질 수밖에 없었다. 양국 수뇌의 강경 자세는 지지 세력의 상당한 호응을 받고 있기 때문에 한일관계가 정상으로 복귀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 듯 하다.

◆ 한일관계사를 보는 시각

한국과 일본은 1965년 ‘기본조약’과 이에 관련된 ‘부속협정’을 체결함으로써 1910년 ‘한국병합’(대한제국의 폐멸)으로 단절된 국교를 재개했다.

그 사이 35년 동안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다. 그리고 일본의 패전과 한국의 해방 이후 20년 동안 두 나라는 정식 외교관계를 맺지 않았다. 반면에 두 나라는 미국과 각각 안보동맹을 맺음으로써 동아시아에서 반공 보루의 역할을 담당했다. 

한국과 일본은 해방과 패전 이후 70년 이상, 곧 근대 한일관계(1875~1945년, 강화도사건부터 식민지 지배 종료까지 70년)보다 더 긴 현대 한일관계를 공유하게 되었다.

또 1965년 국교재개 이후 어느덧 국교단절 기간(1910~65년)보다 더 긴 세월이 흘렀다. 이런 시간을 함께 사는 동안 한국과 일본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공유하면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에서 아주 밀접한 관계를 형성했다. 

제3자의 시각에서 보면 한국과 일본처럼 인종이나 문화 등의 면에서 서로 닮아 있는 나라도 드물다.

웅장한 스케일로 세계문명의 흥망성쇠를 탐구한 미국 UCLA의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총·균·쇠>에서 한국과 일본을 ‘유년기를 함께 지낸 쌍둥이 형제’와 같다고 규정했다.

한국과 일본이 세계사의 수준에서 보면 ‘쌍둥이 형제’와 같이 밀접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의 관계는 왜 이런걸까?

지난 30여년동안 한국과 일본의 역사대화를 이끌어온 나로서는 “양국 국민은 어떤 선입관과 편향성을 가지고 한일관계를 보아오지 않았는가, 그 과정에서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틀린 것을 맞는 것처럼 확신하고 떠들어온 게 아닌가”라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

한일관계는 우역곡절과 다사다난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한 면만을 도드라지게 보아서는 전체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현대 한일관계만 하더라도 세계사 속에서 장기적·거시적으로 파악해야만 원래 모습을 그려낼 수 있다. 따라서 한일관계의 역사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재구성하여 양국 국민에게 제공하는 일이야말로 위기 상황에 빠진 작금의 한일관계를 개선하는 데 꼭 필요한 작업이다. 

전교조대전지부는 6일 대전지역 초·중학교 2곳에서 일본 경제보복조치를 계기로 잘못된 한일 관계를 청산하고자 역사 바로세우기 계기수업을 했다.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전교조대전지부는 6일 대전지역 초·중학교 2곳에서 일본 경제보복조치를 계기로 잘못된 한일 관계를 청산하고자 역사 바로세우기 계기수업을 했다.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이에 현대를 포함해 고대 이래 한일관계사 전반을 파악하는 데 바람직한 관점 몇 가지를 먼저 제시하겠다.

첫째, 장기사적·문명사적 관점을 염두에 둔다.

역사 속의 한일관계는 2500여년에 걸칠 정도로 길고 깊다. 그 과정에서 한국과 일본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문명을 형성해왔다. 문명의 전파와 수용은 폭력과 강제에 의해 이루어진 적도 있고 평화와 교류에 의해 이루어진 적도 있었다. 현대 한일관계는 어떤 경우에 해당할까?

둘째, 복합적·중층적 관계를 중시한다.

보통 한일관계를 운위할 때는 정치나 경제 또는 역사 등의 어느 한 측면에 치우치기 쉽다. 그러나 한일관계는 여러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어느 한 면만을 보고 한일관계 전체를 재단할 수는 없다. 인간이동과 문화접변, 전쟁의 충격과 사회변동, 물자의 교역과 생활변화 등을 시야에 넣고 현대 한일관계를 보겠다.   

셋째, 현재적·모색적 관점을 견지한다.

한일 양국 사이에는 오래되고 새로운 현안이 끊임없이 발생한다. 100년 전, 50년 전에 양국이 치열하게 논쟁했던 역사인식이나 ‘과거사처리’ 문제가 오늘날도 여전히 새로운 과제로 부상하는 것이 좋은 사례이다. 따라서 현재의 관점에서 이런 문제의 내력을 추적하고 극복을 모색하는 자세를 견지할 필요가 있다.

넷째, 교류협력과 상호의존의 관점도 중시한다.

겉으로 보면 현대 한일관계는 반목과 대립으로 꽉 차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교류와 협력의 길을 걸어왔다. 한국과 일본에서 이에 대한 평가가 아주 인색하여 그 사실을 잘 모르고 있을 뿐이다.

중고등학교의 한국사 교과서는 근대 한일관계에 대해서는 50여 쪽이나 기술하고 있지만 같은 기간에 해당하는 현대 한일관계에 대해서는 3쪽 정도 기술하고 있다. 그것도 대립과 갈등의 내용뿐이다. 현대 한일관계를 소홀히 취급하는 것은 일본의 학교 교육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양국 국민은 서로 무지와 오해, 편견과 왜곡의 늪에서 벗어나기 힘든 구조 속에 갇혀있다고 볼 수 있다. 이 글이 현대 한일관계사에 대한 이해를 돋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다행이다.

◆ 현대 한일관계의 단계별 특징

지난 70여년 동안 한국과 일본은 변화무쌍한 국내외 정세 속에서 우여곡절로 점철되고 복잡다단하게 얽힌 근린관계를 맺어왔다. 그 궤적과 성격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몇 단계로 나눠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경제관계의 변화에 중점을 두겠다.

제1기(1945~1965년)는 한국과 일본이 식민지 지배로 야기된 ‘과거사’를 정리하고 국교를 재개하기 위해 노력한 시기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은 일본과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을 체결해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처리를 마무리했다. 한국과 일본은 그 틀 속에서 14년에 걸쳐 마라톤회담을 전개했다. 이른바 ‘한일회담’이 그것이다.

‘한일회담’은 역사인식과 ‘과거사’ 처리 등을 둘러싼 견해 차이를 좁히지 못한 채 난항을 거듭했다. 한국에서는 자유당, 민주당, 공화당으로 정권이 교체되고 일본에서는 자민당 1당 집권체제가 구축되었다. 또 한반도에서 6.25전쟁이 일어나는 등 냉전의 분위기가 세계를 휩쓸었다.

그러면서 한국과 일본은 미국의 압도적 영향 아래서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로의 문명전환을 이룩했다.

제2기(1966~1979년)는 한국과 일본이 수직적·비대칭적 관계를 맺은 시기이다.

한국과 일본은 ‘한일조약’을 체결해 일단 ‘과거사’를 정리하고 대등한 국가로서 국교를 재개했다. 한국은 ‘청구권 자금’과 연계해 일본의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고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그 과정에서 한국은 신흥공업국가의 선두로 부상하고, 외국으로부터 ‘한강의 기적’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반면에 경제에서는 일본과 수직적 분업관계에, 정치에서는 비대칭적 유착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이것을 뒷받침한 것이 한국에서는 개발독재·권위주의, 일본에서는 자민당 1당 우위의 정치체제였다.

일본과 미국이 중국과 수교하는 등 동아시아의 국제정세가 요동쳤지만, 남북한의 대결이나 베트남전쟁 등에서 보듯이 세계는 아직도 냉전의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제3기(1980~1997년)는 한국과 일본이 수직적 관계에서 벗어나서 상대적 수평화 단계로 진입한 시기이다.

한국이 일본에서 소재와 설비를 도입해 수출하는 무역구조는 여전했지만, 자본과 기술에서 일본 의존도는 현저히 낮아졌다. 또 세계무대에서 일본 기업과 시장을 다투는 한국 기업이 늘어났다. 세계가 냉전에서 탈피함으로써 한국과 일본의 반공연대도 약화되었다.

때마침 한국에서는 정치의 민주화와 사회의 다원화가 괄목할만하게 진전되었다. 한국에서는 권위주의 시대에 억눌렸던 반일 내셔널리즘이 때때로 분출하고 일본을 극복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일본에서는 자민당 1당 중심 체제가 무너지고 자민당 위주의 연립정권이 출현해 역사인식 등을 둘러싸고 전진과 후퇴를 반복했다. 일본의 국력이 답보하는 반면 중국의 세력이 강대해져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에 대변동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제4기(1998~현재)는 한국과 일본이 상대적 균등화로 이행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의 1/12에 불과했던 한국의 국내총생산액은 2012년 현재 1/5에 이를 정도로 그 격차가 상당히 줄어들었다.

한국의 대일 무역의존도는 1965년 수출 25.5% 수입 37.8%이었는데 2012년에 수출 7.1%, 수입 12.4%로 현저히 약화되었다.

한국의 기업이 세계시장에서 일본의 기업을 제치거나, 한일합작으로 세계시장에 진출하는 사례도 등장했다. 스포츠와 예술 등의 면에서도 그러한 경우가 많아졌다. 한국과 일본은 현재 한류(韓流)와 일류(日流) 붐에서 보듯이 생활과 의식이 많이 비슷해졌다. 

일본 도쿄 신주쿠 한인타운 신오쿠보(新大久保)에서 영업 중인 수미네밥집.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일본 도쿄 신주쿠 한인타운 신오쿠보(新大久保)에서 영업 중인 수미네밥집.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이후 한국에서는 여야의 정권교체를 경험하면서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고 시운동이 확산되었다. 일본에서는 한때 야당인 민주당으로 정권이 교체되었지만, 국민의 지지를 상실해 자민당 독주의 보수정치로 회귀했다.

그리하여 역사인식과 영토 문제 등을 둘러싸고 한국과 일본이 노골적으로 대립하는 상황이 다시 빈번해졌다.

◆ 한국과 일본의 위상 변화

한국과 일본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갈등과 대립을 장기적·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100여년 전에 형성된 두 나라 관계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통과의례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던 한국은 절치부심 끝에 이제 일정 분야에서는 일본을 따라잡는 지위에 올라섰다. 특히 경제면을 염두에 두고 살펴보자.

한국 속담에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말이 있다. 100년 전 한국은 열강의 고래 싸움에 휩쓸려 나라를 상실한 새우의 신세에 불과했다. 100년 후 지금도 한반도 주변의 국제정세는 열강의 고래 싸움과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100년 전과 아주 다른 점은 한국이 더 이상 고래 싸움에 등터지는 새우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은 이제 열강의 고래 싸움 속에서 요리저리 헤엄쳐 다니면서 자신의 생존을 유지해갈 수 있는 돌고래 정도로 성장했다.

거기에다 남북한이 통일되면 한국은 고래까지는 아니더라도 밍크고래 정도는 될 것이다. 이게 나의 ‘돌고래 사관’이다.

일본은 지난 20여 년 동안 정치 혼미 등으로 내외 문제의 극복이 늦어져서 국력신장에 활기를 띠지 못했다. 반면 중국이 경제·군사 등의 모든 면에서 일취월장해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그리하여 100여 년 동안 동아시아에서 압도적 우위를 보였던 일본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런 와중에서 한일관계도 일방적 종속·의존 관계에서 상대적 경쟁·경합 관계로 바뀌게 되었다. 오랜 동안 멍에로 작용했던 식민지 대 제국의 수직적이거나 비대칭적 관계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파트너 대 파트너로서의 수평적이거나 대칭적인 관계가 현실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과 일본을 비교하면 여러 가지 면에서 일본은 여전히 강대국이다. 육지 국토면적은 남한의 4배이고, 배타적 경제수역은 몇 십 배나 된다. 인구와 국내총생산은 각각 3배 이상이다. 첨단 과학기술이나 문화예술, 사회 안전망이나 인프라 등에서 일본은 한국보다 앞선 일류국가이다.

이에 한국과 일본은 먼저 서로의 처지가 크게 바뀌었다는 엄연한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장기적·거시적 관점에서 한일관계를 파악하고 그때그때 현안에 적절히 대응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불필요한 충돌과 대립은 상당 부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한일관계의 변화는 당연히 역사관과 세계관의 변화를 수반하게 마련이다. 특히 1990년대 이후 한국에서는 정치와 사회의 민주화가 정착됨으로써 권위주의체제 아래 억눌려 있던 민족주의적 에너지가 일본을 향해 분출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반면 일본에서는 한때 여유로움과 유연함을 보였던 정치와 사회가 보수 쪽으로 기울어 역사인식과 ‘과거사처리’에서 퇴행적인 움직임이 두드러졌다.

그리하여 한국과 일본은 야스쿠니신사 참배와 일본군 ‘위안부’, 역사교과서 기술, ‘독도 영유권’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연례행사처럼 공방을 벌이는 상황을 맞았다.

중국과 북한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한국과 일본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중국은 한국에게 최대 교역국이자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가진 강대국이다. 이 점을 고려해 한국은 어쩔 수 없이 중국을 신경쓰며 중국을 가깝게 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경계하면서 한국이 중국 쪽으로 기우는 게 아닌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지정학적·생태학적 측면에서 그 위치가 약간 다르다. 아시아대륙과 중국이 한국과 일본에 미친 서로 다른 영향은 두 나라의 역사와 문화의 특색에도 잘 반영되었다.

그리고 오늘날 현실적으로 생존전략을 모색하는 데도 일정 부분 차이를 드러나게 만든다. 양국은 서로 처지와 대응이 다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오히려 그 상위(相違)를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보완제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가 지난 3월 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재단법인 여해와함께 대화의집에서 열린 ‘3·1운동 100주년 특별 대화모임 - 한일관계 : 새로운 백년을 모색한다’에서 발제하고 있다. 왼쪽은 이홍구 전 총리.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가 지난 3월 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재단법인 여해와함께 대화의집에서 열린 ‘3·1운동 100주년 특별 대화모임 - 한일관계 : 새로운 백년을 모색한다’에서 발제하고 있다. 왼쪽은 이홍구 전 총리.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새로운 한일관계를 향하여

1990년대 이전에 한국과 일본 사이에 이견이나 충돌이 발생하면 양국의 유력 정치인이나 재계 리더 등이 전면 또는 막후에서 교섭하고 타결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메커니즘이 작동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1965년 체제’를 구축했던 세대는 한국과 일본의 각 분야에서 물러났다. 이에 따라 양국 사이에서 마찰과 대립이 확대되지 않도록 조정하고 관리하던 시스템도 약화 또는 붕괴되었다.

한국과 일본이 서로 한풀 접어두고 대했던 특수 관계의 유풍은 거의 사라지고 다른 나라를 대하듯 하는 보통관계의 모습이 자리를 잡았다.

한일 양국이 필연적으로 도래하는 세대교체를 미리 직시하고 후속세대를 양성하며 서로 이익이 될 수 있는 식견과 경험을 전수했더라면 한일관계는 좀 더 안정되었을지도 모른다.

역사인식과 ‘과거사처리’ 문제는 두 나라 국민의 정서와 감정, 애국심과 정체성 등과 결부된 복잡하고 미묘한 사정을 포함하고 있어서 더 많은 노력과 시간, 배려와 결단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한국과 일본은 마찰과 갈등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수준에서 보면 국교재개 이래 절차탁마하며 꽤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두 나라는 민주주의, 시장경제, 법치주의, 인권옹호 등 글로벌한 가치를 공유하는 동질의 국가를 이룩했다. 그리고 각각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동아시아의 안전과 평화를 담보하는 지렛대로서 기능해왔다.

국민의 생활양식과 문화수준에서도 선진성과 보편성을 공유하고 있다. 양국 국민 속에 침투한 한류(韓流)와 일류(日流)가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한국과 일본이 서로의 성취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좀 더 적극적으로 협력의 방법을 모색한다면 세계의 문명 발전에 함께 기여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한일관계의 과거와 현재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미래와 비전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갖는다면 역사인식을 둘러싼 갈등과 대립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아니다.

양국 국민은 먼저 역사문제의 책임을 다음 세대에 미루기보다는 지금 세대에서 해결하겠다는 분위기를 형성해야 한다. 그리고 양국의 정치가와 여론 주도층은 인류가 지향해온 보편적 가치의 기준에서 한일관계를 해석하는 식견을 가져야 한다.

나아가 자신들이 솔선하여 역사인식과 ‘과거사처리’에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 아울러 양국 국민을 납득시키고 선도할 수 있는 전략과 방법을 마련하고 실천해야 한다.

한일 양국은 충분하지는 않지만 역사인식과 ‘과거사처리’ 문제를 다뤄온 경험, 노하우, 실적을 이미 많이 축적하고 있다. 그 노력과 성과, 한계와 결함 등을 면밀히 검토하고 평가함으로써 보완과 개선, 극복과 해결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

한일 사이에 역사인식과 ‘과거사처리’ 문제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이것이 양국관계의 모든 부문을 좌지우지하는 절체절명의 사안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밖에도 양국이 함께 협력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는 많다.

동아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첨예한 세력전이(勢力轉移)에 대응하여 서로 안전보장을 확보하고, 경제 협력과 인적 교류를 확대하여 고령화(高齡化)·소자화(少子化) 사회의 도래에 대비하는 것이야말로 급선무 중의 하나다.

특히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른 한국과 일본의 기업이 각자의 장점을 살려 한 팀을 이뤄 세계 각지에서 공동 사업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 한국과 일본이 공동 프로젝트를 자주 추진하여 이익을 공유하다보면 경험·노하우·신뢰도 쌓이게 마련이다.

이런 실적이 양국 국민 사이에 널리 확산되고 인정되면 한일 경제공동체 구축으로 나가는 길도 열릴 것이다. 이번의 격렬한 충돌을 교훈으로 삼아 한국과 일본이 대타협을 통해 역사인식과 ‘과거사처리’ 문제를 포괄적으로 해결하고, 두 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를 향해 공동의 미래비전을 제시하기 바란다.

한국과 일본이 대형 프로젝트를 함께 실행하다보면 어느새 미래가 과거를 정리해주는 상황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끝으로 앞에서 소개한 재래드 다이몬드가 쓴 <일본인의 뿌리>라는 논문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 글 마무리하겠다.

“역사는 한일 양 국민들에게 상호 불신과 증오의 여지를 제공해주고 있다. 그 때문에 그들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밀접한 관계에 있었는지를 증명하는 결론을 반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마치 아랍인과 유대인처럼 한국인과 일본인은 핏줄이 이어져 있지만, 서로 오랜 전통적인 상호 적대적 감정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대립과 갈등은 상호간에 파괴적일 뿐 이로울 건 아무것도 없다. 분명히 한일 양국 국민들은 유년기를 함께 지낸 ‘쌍둥이 형제’와 같다. 이제 동아시아의 정치적 미래는 그들 사이의 오랜 유대를 성공적으로 재발견하는가에 따라 크게 좌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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