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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 종언’ 시대의 ‘음식 이데올로기’

2018.09.28 김종면 저널리스트/콘텐츠랩 씨큐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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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북유럽 발트해안. 일군의 항만노동자들이 특이한 방법으로 장어를 잡고 있다. 거둬 올린 그물 안에는 말대가리가 들어 있고, 그 말대가리의 입, 코, 귀, 눈 등 구멍이란 구멍에는 장어들이 우글우글하다. 귓구멍에서는 하얗게 녹아내린 뇌척수액과 함께 살찐 장어들이 꾸역꾸역 쏟아져 나온다. 이 그로테스크한 광경을 목격한, 난쟁이 오스카의 어머니는 토악질을 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태연히 장어 네 마리를 사가지고 온다. 독일의 전후 문학을 대표하는 귄터 그라스의 장편소설 ‘양철북’의 한 장면이다. 

인간의 욕망과 가족의 관계를 조망한 한강의 연작 ‘채식주의자’에서도 우리는 불편한 진실을 만난다. 소설의 주인공 영혜는 어느날 갑자기 육식중단을 선언한다. 소고기, 돼지고기, 토막 난 닭, 적어도 20만원어치는 될 바다장어까지 죄다 쓰레기봉투에 담는다. “당신 제 정신이야?” 남편이 영혜의 손을 낚아챈다. “꿈을 꿨어.” 영혜는 도살장에서 날고기를 먹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 충격으로 ‘자기부정’이라는 질병에 이른다. 육식에 대한 욕망과 혐오 사이에서 분열한다.  먹은 고기들은 이미 소화되어 몸 밖으로 나갔지만 고기의 목숨은 여전히 명치에 달라붙어 있다고 생각하며 절망감에 사로잡힌다. 영혜에게 도축과 살인은 같은 의미다.

‘양철북’에 등장하는 어머니는 ‘장어사건’으로 정신이상까지 일으키지만, 다른 많은 이들에게 그것은 더없이 소중한 음식이다. 유럽의 경우 장어는 오랫동안 노동자 계층에서 즐겨 찾은 생선이었다. 고기를 마음껏 먹을 수 없었던 그들은 토막 친 장어 등으로 만든 맑은 고기 수프인 부용(bouillon)을 파이 크러스트에 싸서 육류 대신 먹었다. 런던의 템스 강에서 잡은 장어는 영국 항만노동자들이 젤리나 파이로 만들어 즐겨 먹은 요리 재료였다. 

‘채식주의자’ 영혜는 냉장고 안에 있는 육붙이를 버리는 것으로 육식 종언의 의식을 거행하지만 남편은 그것을 한낱 수행자에게나 어울릴 법한 낭비행위로 받아들인다. 영혜는 마침내  ‘처벌’ 받는다. 아버지는 고기를 거부하는 영혜의 따귀를 때리고 그의 입에 강제로 고기를 집어넣으려 한다. “한번만 먹기 시작하면 다시 먹을 거다. 세상천지에 요즘 고기 안 먹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 아버지의 강압에 영혜는 칼로 동맥을 긋는 자해로 맞선다. 이 소설은 육식에 대한 거부이기에 앞서 억압적인 가부장제 상징질서에 대한 비판으로 읽힌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 이데올로기가 종언을 고한 시대이지만 음식에 대한 이데올로기 만큼은 여전히 강고한 힘을 발휘한다. 그것은 결국 ‘육식이냐 채식이냐’의 문제로 귀착된다. 자명한 사실은 인간의 섭식 문제에 관한 한 육식파와 채식파로 갈려 진영 논리를 펴듯 일방적 주장을 내세우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인간은 무엇이든 먹을 수 있는 존재이기에 음식과 관련된 온갖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런 만큼 먹거리의 ‘정답’도 찾기 어렵다. ‘잡식동물의 딜레마(Omnivore’s Dilemma)’다. 미국의 환경운동가 마이클 폴란이 같은 이름의 책에서 밝힌 잡식동물의 딜레마는 단순히 채식이냐 육식이냐 라는 단순 논법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무엇을 먹어야 할지 결정하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지금 무엇을 먹고 있는지, 그것이 어디서 나고 자랐는지, 그리고 어떤 과정을 거쳐 식탁에까지 오르게 되었는지부터 알아야 한다는 데 방점이 찍혔다. 복잡다단한 ‘음식사슬’의 메커니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29, 30일 서울 종로 서울극장에서 열리는 ‘채식영화제’는 그동안 쏟아져 나온 음식에 관한 담론들을 차분히 되돌아보게 하는 자리다. 환경재단이 국내 처음으로 주최한 이 작은 영화제에서는 모두 6편의 작품이 선보인다. ‘100억의 식탁’(감독 발렌틴 투른, 독일), ‘해피 해피 브레드’(감독 미시마 유키코, 일본), ‘고기를 원한다면’(감독 마리옌 프랭크, 네덜란드), ‘나의 언덕이 푸르러질 때’(감독 올리버 디킨슨, 프랑스), ‘잡식가족의 딜레마’(감독 황윤, 한국), ‘트루 맛 쇼’(감독 김재환, 한국). 그동안 스크린에서 접하기 어려웠던 색다른 테마영화다.

개막작인 ‘100억의 식탁’은 다국적 종자·농약 기업인 몬산토의 유전자 조작 작물보다 저항력이 뛰어난 지역 품종을 저장하는 인도의 종자은행, 동물 사료로 수출할 콩을 재배하는 모잠비크 주민의 현실, 선진국의 도심 농장 프로젝트 등을 살펴보며 100억 인류의 미래 식량 대안을 모색한다. ‘고기를 원한다면’은 ‘고기 중독자’인 저널리스트가 신경학자, 배양육 개발자, 도축업자 등을  만나며 고기 없는 식단에 이르는 여정을 보여준다. ‘해피 해피 브레드’는 도시 생활을 접은 젊은 부부가 일본 홋카이도에 작은 카페를 열며 요리를 통해 마음을 치유하는 과정을 그린다. ‘채식영화’라는 타이틀이 붙었지만 ‘환경영화’로 보아도 손색이 없다.  

채식은 익숙한 만큼이나 첨예한 이슈다. 고기는 물론 우유나 달걀도 먹지 않는 비건(Vegan)에서부터 유제품이나 달걀을 먹는 락토 오보 베지테리언(Lacto-ovo vegetarian), 해산물을 먹는 페스커테리언(Pescetarian), 경우에 따라 육식을 하기도 하는 플렉시테리언(flexitarian)까지 채식주의자의 유형도 다양하다.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과일을 상식한 프루테리언(Fruitarian)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사람들은 이 순간에도 육식과 채식의 경계에서 갈등한다.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인 제레미 리프킨은 현대 문명의 위기를 초래한 원인 가운데 하나로 인간의 식생활을 꼽았다. ‘육식의 종말’이라는 저서를 통해 그는 육식으로 인해 생태계가 파괴되고 인간은 심각한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며 인류가 육식문화를 극복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인간이 육류를 섭취한다는 것이 과연 ‘극복의 문제’일까. 서양 속담에 ‘One man’s meat is another man’s poison’이라는 말이 있다. 갑의 약은 을의 독이다. 사람마다 취향은 다를 수밖에 없다. 채식이든 육식이든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다. ‘숙명’의 잡식동물인 우리는 지속가능한 미래를 생각하며 우리의 식문화와 삶의 방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뿐이다.

김종면

◆ 김종면 저널리스트/콘텐츠랩 씨큐브 수석연구원

서울신문에서 문화부장, 수석논설위원 등을 지냈다. 서울여자대학교 국문과 겸임교수로 세계문학 등을 강의했다. 국민권익위원회와 대통령소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지금은 여러 매체에 다양한 성격의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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