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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바흐가 존경했던 덴마크 음악가 북스테후데의 고향

[정태남의 클래식 여행] 덴마크/헬싱외어(Helsingør)

2018.11.29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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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펜하겐에서 기차편으로 해변을 따라 대략 1시간 정도 북쪽으로 달려 크론보르 성이 보이는 작은 항구도시에 도착했다. 크론보르 성은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의 배경이 된 엘시노어(Elsinore) 성이다. 영어식 Elsinore는 덴마크에서 Helsingør로 표기하고 ‘헬싱괴르’가 아니라 ‘헬싱외어’로 발음한다.

이곳에서는 바다 건너 한때 덴마크의 영토였던 스웨덴의 항구도시 헬싱보리(Helsingborg)가 멀리 보인다. 이 두 도시는 유럽에서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해협인 외레순(Øresund)를 두고 서로 약 4킬로미터 떨어져 있는데 이곳이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의 거리가 가장 가까운 지점이다.

크론보르 성에서 본 외레순 해협. 바다 건너편이 스웨덴의 헬싱보리이다.
크론보르 성에서 본 외레순 해협. 바다 건너편이 스웨덴의 헬싱보리이다.

헬싱외어는 원래 보잘 것 없는 조그만 어촌이었다. 덴마크의 에릭왕은 1420년 이곳과 헬싱보리에 요새를 세우고는 1429년부터 해협을 통과하는 모든 외국 선박에 통행세를 징수하기 시작했다. 배들은 통행세를 내기 위해 헬싱외어에 입항했고 이곳에서 항해에 필요한 생필품도 구입했다. 이에 따라 헬싱외어는 교역의 중심으로 발전했고 독일인을 비롯한 외국인 상주인구도 늘기 시작했다.

세월이 지난 1577년 덴마크 왕 프레데릭 2세는 네덜란드 건축가들을 불러 이 단순한 요새를 웅장한 르네상스양식의 성으로 개축하고는 ‘왕관의 성’이란 뜻으로 크론보르(Kronborg)라고 이름을 붙였다.

크론보르 성.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의 배경이 된다.
외레순 해협을 지키기 위해 세웠던 요새였다가 우아한 르네상스 양식의 궁전으로 개축된 크론보르 성.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의 배경이 된다.


크론보르 성 바로 남쪽에 형성되어 있는 구시가지는 건물들이 대부분 규모가 작고 낮아서 친근감이 든다. 또 공공건물과 교회는 한자동맹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듯 모두 붉은 벽돌로 지어져 있다. 구시가지의 지붕선을 뚫고 나온 첨탑이 있는 간결한 북유럽 고딕양식의 성 올라이 교회도 마찬가지다.

이 교회 안에 들어서니 오르간 음악회가 열리고 있다. 디트리히 북스테후데의 환상적인 ‘토카타 d단조 BuxWV 155’가 울리고 나서 이어서 바흐의 오르간 명곡 ‘토카타와 푸가 d단조 BWV 565’이 거대한 폭포수가 높은 산 위에서 흘러내려오듯 격정적으로 울리면서 교회 내부 공간 구석구석 가득 채우기 시작한다.

성 올라이 교회 부근에 보존된 북스테후데의 집.
성 올라이 교회 부근에 보존된 북스테후데의 집.

그러고 보니 옛날 이 교회의 오르가니스트였던 요하네스 북스테후데의 아들 디트리히 북스테후데의 행적이 떠오른다.

그는 바흐 이전 최고의 오르가니스트로 이름을 날렸으며 바흐가 혈기 왕성한 20대 초반일 때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내면적 정서를 간직한 극적이고 환상적인 작품을 쓴 음악가였는데, 사후에 오랫동안 잊혀 졌다가 20세기 후반에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그가 태어난 해는 1637년 경이나 그가 태어난 곳이 독일인지 덴마크인지 확실하지 않다.

물론 그의 성(姓) ‘북스테후데’는 독일의 지명이니 독일계임은 틀림없겠지만.

사실 그의 아버지는 홀슈타인 지방 출신이다. 지금 홀슈타인은 덴마크와 경계를 이루는 북부독일 지방인데 당시는 덴마크 왕국에 속해 있었다. 북스테후데 출생지도 그곳일 가능성이 있지만 학자들은 헬싱보리로 추정한다. 왜냐면 기록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헬싱보리의 성모 마리아 교회에서 활동하다가 북스테후데가 4세 때인 1641년에 헬싱외어의 성 올라이 교회로 왔다고 하니 말이다.

한편, 북스테후데는 헬싱외어에서 성장하면서 아버지로부터 음악교육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후 20세 때인 1657년부터 해협건너 아버지가 근무하던 헬싱보리의 성모 마리아 교회에서 오르가니스트로 있다가 1658년에 헬싱보리가 스웨덴에 귀속되는 바람에 헬싱외어로 돌아왔다.

성모 마리아 교회 앞 북스테후데 거리에서 본 성 올라이 교회의 첨탑.
성모 마리아 교회 앞 북스테후데 거리에서 본 성 올라이 교회의 첨탑.

성 올라이 교회 바로 남쪽 길가에는 그가 살던 집이 보존되어 있다.

외벽에는 ‘성모 마리아 교회의 1660-1668년 오르가니스트인 작곡가 디드릭 북스테후데가 이곳에 살았다’는 내용의 명판이 붙어있는데 그의 독일식 이름 디트리히는 덴마크식으로 디드릭(Didrik)으로 표기되어 있다.

헬싱외어의 성모 마리아 교회는 성 올라이 교회 바로 북쪽에 있고 그 앞은 ‘북스테후데 길’이다.

이 교회는 원래 카르멜 수도원 성당이었으나 종교개혁 후 수도원은 폐쇄되고 1577년에 독일루터교회로 바뀌었다.

북스테후데가 8년 동안 바로 이 교회에서 활동할 때 그의 뛰어난 실력은 독일까지 알려졌다.

그러다가 31세 때 생애에서 대전환점을 맞았다. 즉 또 다른 ‘성모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가게 된 것인데 이 교회는 한자동맹의 맹주도시 뤼벡에 있는 북부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음악의 요람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세상을 떠나는 1707년까지 39년 동안 활동했다.

당시 그가 주관하던 음악회는 워낙 유명해서 독일 각지에서 음악가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이를 한 번 보기 위해 뤼벡으로 몰려들었다. 그중에는 멀리 아른슈타트에서 300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걸어간 20세의 바흐도 있었다. 바흐가 덴마크에서 온 이 대가를 만나 그의 작곡기법을 터득하고 나서 얼마 후에 작곡한 불멸의 명곡이 바로 ‘토카타와 푸가 d단조 BWV 565’이다.

정태남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미술·언어·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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