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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권하는 나라

2019.05.03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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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신하에게 하사(下賜)하는 건 사약(賜藥)만이 아니었다. 휴가도 하사했다, 그것도 강제로 말이다. 임금이 내리는 휴가를 ‘사가(賜暇)’라고 했다. 그런데 그 휴가는 관청 일을 보느라 고생했으니 집에 가서 쉬라는 지금의 바캉스가 아니다.

조선 세종 8년(1426년), 집현전 학자인 신석견, 권채, 남수문 3인에게 이런 어명이 떨어졌다.
“내가 그대들에게 집현관을 제수한 것은 나이가 젊고 장래가 있으므로 다만 글을 읽혀서 실제 효과가 있게 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직무로 인하여 아침저녁으로 독서할 겨를이 없을 테니 지금부터는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전심으로 글을 읽어 성과를 나타내어 내 뜻에 맞게 하라.”

젊은 문신들에게 강제로 휴가를 줘서 책읽기에 전념토록 한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의 시작이다. 일종의 독서 안식년이다. 사가독서제는 간혹 중단되기도 했으나 영조가 규장각을 설립할 때까지 300년 이상 계속됐다. 48차례에 320명이 휴가를 명받았다.

초기에는 집에서 책을 읽게 했지만 바로 산사(지금의 은평구 진관사에서 많이 읽었다)로 바꾸었다. 임금은 음식과 의복까지 친히 내렸다. 성종은 한양의 한강변 세 곳에 문신들이 독서에 전념할 수 있는 공간인 ‘독서당’ 세 곳을 지었다. 옥수동에 동호당(東湖堂), 마포에 서호당(西湖堂), 용산에 남호당(南湖堂)이다. 이율곡의 ‘동호문답(東湖問答)’이 나온 곳이 동호당이다.  옥수동에서 약수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은 지금도 독서당고개로 불린다. 문신들은 시원한 대청마루와 따뜻한 온돌방에서 짧게는 3개월, 길게는 3년을 책에 파묻혔다. 사가문신에 선발되는 건 최고의 영예였다. 학문을 총괄하는 대제학은 사가문신 중에서만 임명됐다. 성삼문, 신숙주, 서거정 등 조선의 걸출한 문인들은 대개 사가문신 출신이었다.

중종 때 흉년이 들어 독서당을 폐지하자는 신하들의 읍소가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중종은 이렇게 말했다. “독서당에 문학하는 선비를 모아 강습 토론하게 하는 건 학문의 성취를 기다려 크게 쓰고자 함이니 경솔히 이랬다저랬다 하지 말지어다.”

우리나라는 이런 나라였다. 이런 임금들이었다. 서두가 길었다. 국가 차원의 독서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다. 최근 모처럼 ‘신선한’ 뉴스를 접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4월 29일 발표한 ‘제3차 독서문화진흥 기본계획’이다. TV만 틀면 저잣거리 안줏감으로도 입을 떼기 더러운 그 허리 아래 뉴스들이 두어 달 이상 계속돼 짜증이 날 만큼 나있던 차에, 모처럼 우리의 머리와 가슴과 삶에 대한 뉴스를 들으니 새로웠다. 5년 주기로 발표되는 정책인 만큼 그 내용이 무척 다양하고 알찼고 적극적이었다.

물론 국가가 발 벗고 나서 국민에게 책 좀 많이 읽으라고 권유하고 관련 정책을 만든다고 사람들이 책을 가까이 하겠냐는 반론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오해다.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일본 같은 선진국치고 국가가 독서 운동을 펼치지 않는 나라는 없다. 21세기는 지식·정보·문화 기반 사회이며 국가경쟁력은 그런 무형의 지적 자산을 바탕으로 한다고들 누구나 말한다. 선진국일수록 일찍이 독서의 중요성에 눈을 돌려 국민이 책을 읽게 하는 데 국가적 힘을 쏟고 있다. 

미국의 ‘읽기진흥법’이나 일본의 ‘문자 활자 문화 진흥법’, 아기 때부터 책 읽는 습관을 길러주는 영국의 ‘북스타트 운동’ 같은 게 그렇다. 우리나라도 독서문화진흥법을 2006년에 제정해 독서문화 진흥을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무로 규정했다. 국민이 읽고 쓰고 생각하는 역량을 키우는 건 이제 현대 국가의 중요한 책무 중 하나인 것이다.

이번 기본계획에서 눈에 크게 띈 것은 독서행위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었다. 개인적 독서도 중요하지만 독서공동체 중심의 사회적 독서로 가치를 넓히겠다고 한다. 독서나눔이나 재능기부, 책 읽는 도시, 책 읽는 기업, 독서 사회적기업 같은 공유의 개념으로 독서의 가치를 전환하겠다는 생각이다. 요즘 소셜미디어의 발전으로 인터넷 카페나 밴드, 지역별 소모임, 도서관, 책방, 직장, 학교 같은 곳에서 독서 동아리가 무척 많이 늘어났다. 현재 약 4만여 개로 추정되는데, 문체부는 동아리 활동을 대대적으로 지원해 5년 안에 15만 개로 늘린다고 한다. 어디를 가나 독서 클럽이 있는 2020년대를 생각해 본다.

필자는 대학에서 글쓰기 강의를 했다. 강의 첫 시간에 학생들이 가장 많이 묻는 건 “어떻게 해야 글을 잘 쓰나요”였다. 나는 솔직히 이렇게 말했다. “강의를 들어 글을 잘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실 글쓰기 강의는 필요 없는 짓입니다. 이 시간에 여러분이 책을 꺼내 읽기 시작한다면 이미 글을 잘 쓸 수 있는 변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나는 글쓰기 강의의 상당 부분을 독서 이야기로 채웠다.

조선의 임금님들은 신하들에게 왜 강제로 책을 읽게 했을까. 내가 좋아하는 이 말이 해답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프란츠 카프카의 말이다. “책은 도끼다.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유지태가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이영애에게 물었지만 사랑도 변한다. 애인도 변심한다. 친구도 등을 돌린다. 아름다운 봄날도 무심히 가버린다. 이 세상에서 결코 나를 배신하지 않는 유일한 것, 그것이 무엇인지 굳이 말을 하지 않겠다. 이 세상에서 가장 바보 같은 변명, 그것은 “책 읽을 시간이 없어서요”라는 말이다. 독서는 ‘잉여’가 되면 독서가 아니므로.

한기봉

◆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언론과 글쓰기를 강의했고, 언론중재위원을 지냈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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