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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거주 정책기자, 부마민주항쟁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다

2019.10.16 정책기자 김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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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17일 국무회의에서 51번째 국가기념일이 지정됐다. 바로 ‘10·16 부마민주항쟁(1979년)’이다. 부마민주항쟁은 4·19 혁명(196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1980년), 6·10 민주항쟁(1987년)과 더불어 4대 민주항쟁으로 언급되지만 다른 민주항쟁보단 덜 주목을 받았었다. 

그러나 드디어 40년 만에, 민주주의를 부르짖던 부산과 마산, 경남의 용기 있는 행동에 대한 결실을 맺게 됐다. 그 기나긴 시간 동안 잊히지 않고 결국 국가기념일로 지정될 수 있게 된 데는 그 시절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이 있었다. 그럼 ‘부마민주항쟁’은 어떤 역사를 지나왔기에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것일까?

부산대 건설관(옛 도서관)  앞에 있는 ‘부마민주항쟁 발원지 표지석’
부산대 건설관(옛 도서관) 앞에 있는 ‘부마민주항쟁 발원지 표지석’.


1979년 10월 16일 오전 10시, 부산대학교 도서관(현 건설관) 앞에 수천 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유신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부산대 학생들은 거리로 나가기 시작했고 저녁 7시가 되자 퇴근길에 지나던 회사원과 노동자, 고등학생들까지 합류했다. 시민들은 이튿날 새벽 2시까지 격렬하게 저항했는데 부산 중구, 서구, 동구 지역의 파출소와 경찰서, 공공기관이 파괴됐다. 

(좌) 부산대 운동장에 시위를 위해 모인 학생들과 (우) 현재 부산대 운동장을 즐기는 시민들 비교 사진
(좌) 부산대 운동장에 시위를 위해 모인 학생들(출처=국가기록원)과 (우) 부산대 운동장의 현재 모습.


10월16일 부산 온천장을 지나는 시위대(출처=국가기록원)
10월 16일 부산 온천장을 지나는 시위대.(출처=국가기록원)


18일 0시를 기점으로 부산 일대에 계엄령이 선포됐다. 전방 공수부대 2개 여단 5천 명이 부산에 투입돼 시민들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시위는 마산으로 번졌다.

원래 경남대학교 학생들은 22일에 시위를 계획하고 있었지만 18일 학교 측에서 미리 휴교령을 내리자 도서관 옥상에 학생들이 올라가 구호를 외쳤다. 18일 오후 5시, 3·15 의거탑 앞에 모인 경남대 학생들은 그 길로 거리로 나가 시위를 전개했고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좌) 경남대 정문에 시위를 위해 모인 학생들(출처=국가기록원) 과 (우) 현재 경남대 정문 모습
(좌) 경남대 정문에 시위를 위해 모인 학생, 시민들(출처=국가기록원)과 (우) 현재 경남대 정문 모습.


19일 오후 5시, 부산에 파견된 공수부대 1개 여단이 마산으로 급파됐고 그날 오후 8시부터 모인 시민들은 시위를 계속했다. 군부대의 진압에 맞서 20일 새벽 3시까지 마산 곳곳에서 시위를 벌였고 20일 정오를 기해 마산과 창원 일대에 위수령(육군 부대가 계속 한 지역에 주둔하며 그 지역의 경비와 질서유지를 규정한 대통령령)이 발동됐다. 

계엄령 이후 부산대 입구, 공수부대가 막고 주둔하고 있다.(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계엄령 이후 부산대 입구에 공수부대가 주둔하고 있다.(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비록 기간은 짧았지만 그 시간 동안 많은 시민들이 격렬하게 싸웠고 저항했다. 그 결과 부산에선 1058명, 마산에선 505명, 총 1563명이 연행됐고 군법회의에 회부된 87명 중 20명은 실형을 선고 받았으며 651명은 즉결심판에 회부됐다. 두려웠지만 용감히 군부독재에 맞섰다. 오직 단 하나! 민주주의를 위해서였다.  

3.15 의거탑과 사거리 현재 모습
마산 3.15 의거탑과 사거리 현재 모습.


“그때 엄청났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서 막 외치는데, 다음날 되니까 군인들이 쫙 깔렸더라고.” 아직 어르신들은 ‘부마민주항쟁’에 대해 말하는 걸 꺼린다. 시위대를 조금이라도 옹호하는 말을 하면 그날로 빨갱이라고 경찰한테 조사받게 된다고, 그래서 무슨 말을 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좌) 김정자 어르신, 이효실 어르신 과 (우, 가운데) 정금옥 어르신
어르신들에게 부마민주항쟁 당시 이야기를 들어봤다.


“자식들보고 밖에 나가지 말라 그랬어. 잡혀갈까봐, 데모고 뭐고 하지 말고 조신하게 있으라고.” 경남대학교에서 만난 김정자 어르신은 그날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떨린다고 말했다. 그러자 다른 어르신들도 “맞어, 맞어” 하며 맞장구를 쳤다. 

우린 그때 상황을 사진으로 보거나 아니면 누군가에게 전해들은 것이 다지만 직접 겪었으니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을까. 민주주의도 좋지만 내 자식이 다칠까 전전긍긍했을 어르신들의 심정이 느껴졌다. 

마산에 살면서 부끄럽지만 ‘부마민주항쟁’에 대해 그렇게 많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마산이 민주항쟁 지역으로 유명한 건 4·19 혁명만이 유일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번 ‘부마민주항쟁’의 국가기념일 지정으로 다시금 부산, 마산, 경남이 왜 민주항쟁 지역으로 손꼽히는지 알게 됐다. 

이제 다른 지역 사람들이 “마산하면 뭐가 유명해요?” 라고 묻는다면 당당히 이렇게 말할 것이다. “민주항쟁 지역으로 유명해요. 4·19 혁명의 시작이자 부마민주항쟁의 발생지잖아요.”




김혜인
정책기자단|김혜인kimhi1003@hanmail.net
행복은 항상 내 곁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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