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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감옥 탈출 도운 ‘석호필’ 박사

3.1운동 및 제암리 학살 세계에 알린 외국인 스코필드 박사 이야기

2019.04.12 정책기자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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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되는 해다. 4월 11일이 바로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100주년이라니 왠지 기억에 남겨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독립운동의 현장에 다녀왔다. 경기도 화성에 있는 제암리다. 

제암리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3.1독립운동의 현장이다. 이곳에는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이 있다. 입구에는 외국인 모습의 특이한 동상과 자전거가 있다. 제암리 현장을 목격하고 이를 해외에 알린 선교사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1889~1970, Frank William Schofield, 한국명 석호필) 박사다.

영국에서 태어나 캐나다로 이주, 세균학을 전공하고, 1916년 선교사로 한국에 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학 강의를 맡게 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마침 오늘 4월 12일은 스코필드 박사가 타계한 날이기도 하다. 제암리와 외국인 스코필드 박사와는 무슨 관계가 있었던 것일까?

1919년 4월 15일. 당시 제암리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일본군이 시키는 대로 교회에 모였다. 제암리가 3.1운동의 근거지였기 때문에 이를 알아챈 일본군이 주민들을 교회에 가둔 후 23명을 불태워 죽였다. 이것이 제암리 학살 사건의 간략한 기록이다.

경기도 화성시 제암리에는 3.1운동 순국기념관이 있다. 입구에는 외국인 모습의 특이한 동상과 자전거가 있다. 제암리 현장을 목격하고 이를 해외에 알린 선교사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1889~1970, Frank William Schofield, 한국명 석호필)박사다.
경기도 화성 제암리에는 3.1운동 순국기념관이 있다. 입구에는 외국인 모습의 특이한 동상과 자전거가 있다. 제암리 현장을 목격하고 이를 해외에 알린 선교사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1889~1970, Frank William Schofield, 한국명 석호필) 박사다.
 

제암리 만행 소식을 들은 스코필드는 1919년 4월 18일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수원역까지 열차를 타고 와서 경계가 삼엄한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자전거를 이용해 제암리 현장까지 달려왔다. 수원에서 화성 제암리까지는 차를 타고 가도 30분 이상 걸리는데, 자전거를 타고 얼마나 황급하게 달려왔을까? 더구나 스코필드는 소아마비를 앓아서 한쪽 다리가 불편했다.

제암리 현장에 도착한 스코필드는 처참한 제암리 현장을 목격했고,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이를 카메라에 담았다. 마을 주민들의 상처와 아픔을 보듬고 돌아온 스코필드는 제암리 현장의 사진과 기록을 국외로 보내 일본의 비인도적 만행을 세계에 알렸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3.1운동 초기의 몇 안 되는 사진들은 대부분 스코필드박사가 찍은 것이라고 한다. 그가 찍은 사진 필름은 상해 밀사 정환범(鄭桓範)을 통해 상해 임시정부에도 전해져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에도 일부가 실리고, 3·1운동 영문 화보집 ‘한국독립운동(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에도 실렸다.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입구에 스코필드 동상과 자전거 조형물을 세워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스코필드는 처참한 제암리 현장을 목격했고,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이를 카메라에 담았다. 마을 주민들의 상처와 아픔을 보듬고 돌아온 스코필드는 제암리 현장의 사진과 기록을 국외에 보내 일본의 비인도적 만행을 세계에 알렸다.
스코필드 박사는 처참한 제암리 현장을 목격했고,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이를 카메라에 담았다. 마을 주민들의 상처와 아픔을 보듬고 돌아온 스코필드는 제암리 현장의 사진과 기록을 국외로 보내 일본의 비인도적 만행을 세계에 알렸다.
 

스코필드 박사가 목숨을 걸고 목격하고 작성했던 ‘제암리의 대학살(The Massacre of Chai-Amm-Ni)’ 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는 중국 상해에서 발행되던 영자신문 ‘상하이 가제트(The Shanghai Gazette)’에도 실렸다.

제암리 학살 뿐만이 아니다. 그는 1919년 3월 1일 우리 민족이 3.1운동을 일으켰을 때 거사가 일어나기 직전 만세운동에 대해 미리 알았던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거사 하루 전날인 2월 28일 저녁 세브란스병원에 근무하던 이갑성(李甲成)은 스코필드를 찾아와 독립선언문을 보여주며, 독립선언문의 사본을 영어로 번역해 최대한 빨리 미국 백악관에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또 오후에 파고다공원에서 대규모 학생 시위가 있을 예정이니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스코필드박사의 활약은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필자는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을 방문한 후 스코필드박사가 3.1운동은 물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보이지 않게 큰 기여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코필드 박사는 외국인으로 우리나라 독립운동에 큰 기여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코필드는 기꺼이 사진기를 들고 자전거를 타고 찾아가 만세시위현장의 사진을 찍어 3.1운동의 실상을 해외에 알렸다. 그리고 일제의 비인도적 한국인 탄압에 맞서 일본 고관들을 찾아가 항의하고, 언론에 투고하여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폭로했다.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리는 이유다.

스코필드박사는 외국인 최초로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스코필드 박사는 외국인 최초로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스코필드는 1970년 4월12일 “내가 죽거든 한국 땅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81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그는 외국인 최초로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스코필드 박사는 1970년 4월 12일 “내가 죽거든 한국 땅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81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한국을 생각했다.
 

스코필드 박사는 1970년 4월 12일 “내가 죽거든 한국 땅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81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그는 외국인 최초로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임시정부 수립일을 며칠 앞두고 스코필드 박사 묘소를 찾았다. 그의 묘비에는 “내가 죽거든 한국 땅에 묻어주시오. 내가 도와주던 소년 소녀들과 불쌍한 사람들을 맡아주세요!” 라는 마지막 유언이 새겨져 있다. 마지막까지 한국의 불쌍한 소년 소녀들을 생각한 것이다. 스코필드 박사의 묘지 앞에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스코필드가 아니었다면 제암리사건이 국제사회로 알려졌을까? 그리고 1919년 당시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됐을 때 국제사회가 우리나라를 지지했을까? 스코필드 묘지 앞에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스코필드 박사의 묘지 앞에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면서 일제의 탄압에 맞서 싸운 우리 민족을 목숨을 걸고 도왔던 스코필드 박사는 대한민국 은인이다. 그는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편안히 잠들어 있다. 그가 생전에 남긴 말이 귓가에 맴돈다.

“Remember the Koreans who led the 1919 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청년들이여! 1919년 3.1운동을 이끈 한국인들을 기억하라!)



이재형
정책기자단|이재형rotcblu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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