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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잊지 못할 아빠 육아휴직 10개월

[공무원 근무혁신 감동사례 공모전] ⑤ 장려상(수기)

글: 신영민 해양수산부 평택지방해양수산청

2017.12.01 신영민 해양수산부 평택지방해양수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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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근무, 스마트워크, 남성공무원 육아휴직 등 근무혁신으로 공직사회가 달라지고 있다. 작은 변화는 삶의 활력소가 됐다. 직장은 즐거워지고 가정은 행복해졌다. 인사혁신처가 이처럼 근무혁신으로 달라진 공무원들의 이야기를 공모전을 통해 모았다. 근무혁신으로 내 삶이 달라졌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공무원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2011년은 저에게는 너무나도 경사스러운 해였습니다. 그토록 원하던 해양수산부 공무원으로 임용이 되었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한 해였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2011년 1월 3일 첫 출근하던 그때 그날이 눈에 선합니다.

전공이 통신이었던 저는 여수지방해양항만청 항로표지과 소속 ‘창명3호’라는 부표정비선의 통신장으로 임용이 되었습니다. 처음이라 일이 익숙지 않아 실수도 많이 하고 의욕만 앞선 천방지축 초임 공무원이었지만 선장님을 비롯한 여러 선배님들의 배려와 가르침 속에서 하루하루가 기분 좋은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같은 해 직장 동료들과 여러 지인들의 축복 속에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고 바로 그 다음해에 저와 아내를 반반씩 닮은 이쁜 공주님을 낳았습니다.

당시 만삭의 몸을 이끌고 계단을 오르내리며 직장을 다녔던 아내는 출산을 하고도 2주밖에 쉬지 못하고 다시 직장으로 출근해야 했습니다. 이제 막 태어난 간난쟁이 딸은 고맙게도 장모님이 봐주시겠노라 하고 아내와 저는 안심하고 직장에 다닐 수 있었습니다.

한 생명을 키운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몇 시간마다 일어나서 젖을 물려줘야 했고 시도 때도 없이 기저귀를 갈아 주어야 했습니다. 낯선 환경 속에서 잠을 이루기 힘들었던 아기는 꼭 안아줘야 잠을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우리 아기 등에 센서가 붙었나~?”하고 농담을 할 정도였습니다. 잠자리에 뉘이기만 하면 어떻게 알고 “응애응애~” 안아달라고 보챘으니까요. 저야 출장을 끝마치고 복귀하는 주말 하루 이틀만 그 생활을 하면 됐지만 평일 내내 그 생활의 연속이었을 장모님은 얼마나 힘드셨을지 지금 생각해도 죄송한 마음이 한이 없습니다.

저희 장모님께서는 외향적이시고 굉장히 시원시원한 성격의 소유자이십니다. 그런 성격 덕분에 친구분들도 많으시고 사회활동도 활발하게 하시던 분이셨습니다. 그런 장모님께서 그 연세에 팔자에도 없는 신생아를 키우게 되셨으니 얼마나 힘드시고 답답하셨을까요?

일은 우리 아이가 갓 200일을 넘기던 해에 벌어졌습니다. 바쁜 직장생활에 지친 아내와 힘든 육아에 지치신 장모님 사이에 사소한 말다툼으로 장모님께서 파업(?)을 선언하신 것이었습니다. 아내가 좀 숙이고 들어와 주길 바랐던 장모님은 바로 다음날부터 “네 새끼는 네가 키워라!” 한마디와 함께 외출해 버리셨고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 격’으로 저는 출장 중 급하게 장모님 댁으로 올라와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날은 초보아빠의 육아일기가 시작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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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남지 않은 연가로 겨우겨우 버티다가 계속 직장을 다니고 싶은 아내와 이제는 육아를 도와줄 수 없다는 장모님 사이에서 저는 남성공무원에게는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시절 일반 사기업이었으면 꿈도 못 꿀 남성의 육아휴직은 직장동료들의 따뜻한 배려와 정부의 남성공무원 장려정책으로 비교적 쉽게 쓸 수 있었습니다.

분유타기, 이유식 만들기, 목욕시키기, 클래식 음악 틀어주기, 기저귀 갈아주기 등등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바빴습니다. 당연히 청소며 빨래 설거지 등 집안일은 필수옵션이었고 아내가 퇴근하는 시간에 따끈따끈한 저녁식사 당번도 제가 해야 했습니다. 그 시절 저의 가장 큰 바람이자 소원은 하루에 몇 시간만이라도 편하게 자보는 것이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평범한 가정주부로 산다는 게 이런 것인가를 뼈저리게 느끼는 나날들이었지요.

그렇다고 힘든 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내가 손수 만든 따끈따끈한 찌개를 한 숟갈 후루룩 삼키는 아내를 보며 누군가가 내가 해준 음식을 맛있게 먹으며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뿌듯한 일인가를,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는 딸아이를 보는 게 얼마나 보람 있는 일인지를 새롭게 알아가고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10개월이 흘러 딸아이가 걸음마를 뗄 무렵 근처에 있는 어린이집에 등원을 하게 되었고 기특하게도 우리 딸은 적응을 잘해주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저는 “고생 끝 행복시작~!”이라고 조용히 쾌재를 부르며 직장으로 복귀했습니다. 10개월 만에 보는 동료들은 저를 반갑게 맞아 주었고 편안한 마음으로 다시 업무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때 등에 센서가 달린 것 마냥 자리에 눕히기만 하면 울던 예민공주님은 지금 6살 어여쁜 숙녀가 되어 이제는 아빠엄마 고생한다고 어깨를 주물러주는 나이가 됐습니다. 우리 딸은 그때 아빠와 함께한 10개월을 기억할까요? 물론 못 할 겁니다. 하지만 이다음에 딸이 더 커서 “그때 말이야…”하며 딸아이에게 무용담(?)을 들려줄 생각을 하면 지금도 절로 미소가 지어집니다.

물론 힘든 날도 많았습니다. 밖에서 일만 하던 사람이 갑자기 이름도 생소한 육아에 집안일을 하려니 쉽지 않았었죠.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제 인생에 아이와 함께 그렇게 오래 있을 시간이 얼마나 될까 생각을 해보았고 그 생각을 하노라면 그때의 그 선택은 제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 행복한 순간이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OECD 국가 중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국민이 없는 국가는 더 이상 국가가 아닌 것이 되겠죠. 이런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남성육아휴직의 확대, 자녀돌봄휴가 등 다양한 지원정책을 활용해 일과 육아가 양립할 수 있는 직장문화를 만들어 가는게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끝으로 아내와 저를 대신해서 딸을 키워주신 장모님과 저의 육아휴직 결정에 전폭적인 지지와 따뜻한 배려를 해주었던 직장동료들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함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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