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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도 장비도 없던 그 시절, 정신력으로 승부했죠”

한국 스키 국가대표 1호 임경순

2017.08.11 위클리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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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겨울 스키장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늘고 있다. 과거 스키가 비교적 여유 있는 계층이 즐길 수 있는 스포츠였다면 이제는 대중적인 문화가 된 셈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꽤 긴 시간이 필요했고,그 과정 속에는 역사가 있다. 이른바 ‘국내 스키 역사의 산증인’이라 불리는 임경순 선생을 만나 그의 발자취를 되짚어봤다.

“나는 선수이자 코치이자 감독이었다.”

한국 스키 국가대표 1호 임경순(86) 선생은 자신의 선수 시절을 이처럼 떠올렸다. 지난 8월 1일 경기 광주시 소재 곤지암리조트에서 만난 임경순 선생은 첫 동계올림픽 출전 당시의 상황을 전하며 여전히 벅찬 감정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무려 50여 년이 지난 일이지만 그에게, 그리고 대한민국에 역사적인 순간이었다는 것은 분명했다. 임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국내 스키 역사의 굴곡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더불어 그 중심에 스키를 향한 임 선생의 애정과 인내가 있었다는 사실도 분명했다.

그가 처음으로 스키를 탄 것은 약 7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임 선생은 14세였고 중국 만주 지역에 거주했다. 임 선생은 “겨울이 되면 만주 북쪽은 쌓인 눈 탓에 이동이 어렵다 보니 일본인들이 스키를 이용하곤 했다”며 “그들이 스키를 타고 산을 내려오는 모습이 어찌나 멋있던지 나도 저것을 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 스키 국가대표 1호 임경순.(사진=C영상미디어)
한국 스키 국가대표 1호 임경순.(사진=C영상미디어)

아버지 선물 스키로 십 리 길 크로스컨트리

만주에서 임 선생의 집안 형편은 비교적 괜찮은 편에 속했다. 덕분에 그는 아버지가 사준 스키를 타고 집에서부터 십 리 길을 크로스컨트리 하듯 무작정 달리곤 했다. 그게 스키 인생의 시작이었다.

가르쳐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일본인들이 타는 것을 보고 흉내 내는 것이 전부였다. 스키가 전문 기술을 요하는 스포츠였음에도 그에게 강습은 사치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광복 이후 1946년 공산당을 피해 서울로 내려오게 되면서 스키를 탈 수조차 없는 환경에 처했다.

이듬해 임 선생은 신문을 통해 지리산에서 스키 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했고 열망이 다시 타올랐다고 회상했다. 그는 “하루에 한 끼는 굶어야 할 만큼 어려웠지만 아버지가 지인에게서 버리기 직전의 스키를 얻어왔다”며 “그것을 들고 눈이 많이 내린 아차산으로 향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곳에 가니 당장 다음 날부터 스키 대회가 열린다고 해서 용기를 내 출전 신청을 했다”며 웃어 보였다.

얼떨결에 대회에 참가하게 된 그였지만 놀랍게도 1등을 차지했다. 임 선생은 “골인을 했는데 심판이 스톱워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며 당시 분위기를 설명했다. 하지만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해 선수로서의 꿈은 지속되지 못했다.

그러던 중 1957년 대한스키협회가 국제스키연맹에 가입하면서 국내 스키계 발전을 위해 1960년 동계올림픽에 출전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됐다. 임 선생이 올림픽에 공식적인 발걸음을 내딛게 된 계기였다.

그는 “올림픽을 참가한다는 기쁨보다 걱정이 크다 못해 어떻게 대회를 치를지 모르긴 해도 공포가 어마어마했다는 게 정직한 답일 것”이라며 열악한 여건을 기억했다. 그를 비롯한 동료들은 전문 훈련은커녕 밥통에 소량의 밥을 싸서 스키를 메고 눈 쌓인 곳을 찾아다니는 게 일쑤였으니 말이다.

올림픽 개최 장소에 도착하기 앞서 일본에서 장비를 준비하려던 계획마저 일본 측 입국 거부로 무산됐다. 선수단은 장비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싱글 양복에 넥타이만 매고 겨울 대회를 가게 됐다.

모든 희망이 사라지는 것 같았으나 마침 구원자가 나타났다. 임 선생은 “미국 동계스포츠단 총감독이 한국 선수단은 스키도 없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직접 찾아와 유럽 유명 선수들에게 선전용으로 제공하는 스키 두 벌을 주고 갔다”고 말했다.

곤지암리조트 내에는 임경순 선생의 스키 역사를 되짚어볼 수 있는 전시관이 마련돼 있다.(사진=C영상미디어)
곤지암리조트 내에는 임경순 선생의 스키 역사를 되짚어볼 수 있는 전시관이 마련돼 있다.(사진=C영상미디어)

그러나 고급 장비에 익숙하지 않아 애를 먹었다고 했다. 활강 연습을 하다가 크게 넘어져서 치료를 받기도 했다. 특히 그는 지원이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선수로서, 코치로서, 감독으로서의 모든 역할을 해내야만 했다고 덧붙였다.

그렇게 임 선생은 대회에 출전했고 70명 중 활강은 61위, 회전은 40위를 기록했다. 넘어져도 절대 기권하지 않고 얻어낸 결과였다. 그는 기록에 대해 “국내 선수가 그 정도로 큰 대회에 참가하는 것이 처음이었으니 내가 어느 정도 기록을 내는지는 중요한 부분이었다. 후배들이 따라잡기 위해 노력할 기준을 만들어야 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임 선생이 국제대회 진출 포문을 연 이후 국내 스키 대표선수들의 출전은 이어졌고,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1986년 박재혁 선수는 첫 동계아시안게임에 참가해 은메달을 획득했고, 1996년 변종문 선수가 하얼빈 대회에서 드디어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임 선생은 2018 평창동계올림픽에서 자원봉사단으로 활약할 예정이다. 그를 포함해 18명으로 꾸려진 스키원로회는 최근 평창올림픽 조직위원회에서 관련 교육을 받았다. 구체적인 역할은 정해지지 않았으나 임 선생은 한국 스키를 위해 또 다른 기여를 할 수 있음에 설렘을 드러냈다.

[위클리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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