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전자정부 누리집 로고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2024 정부 업무보고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 정부정책 사실은 이렇습니다 2024 정부 업무보고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 정부정책 사실은 이렇습니다

콘텐츠 영역

이산가족·실향민의 포기할 수 없는 희망

2018.04.20 위클리공감
인쇄 목록

“함경도 우리 고향 앞 바닷가로 나가는 길에 옹달샘이 하나 있습니다. 옹달샘 물 한 잔 떠서 시원하게 목을 축였던 기억이 나요. 고향 옹달샘이 아직도 남아 있을까요. 그 옹달샘을 기억하는 사람도 아마 우리가 마지막이겠지요.”

아흔의 노구를 이끌고 기자와 마주 앉은 실향민 김송순 할머니가 68년 전 6·25전쟁 중 떠나온 휴전선 넘어 함경도 고향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4월 27일 열리는 2018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6·25전쟁 당시 고향인 북한 지역을 떠나 대한민국으로 내려온 실향민들을 만났다.

“10년 전 동생 살아 있다는 소식 듣고 꿈만 같았어요”

김송순 할머니.(사진=C영상미디어)
김송순 할머니.(사진=C영상미디어)

김송순 할머니는 1950년 홀로 고향 함경남도 북청을 떠나왔다.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들 모두 고향에 남겨둔 채 홀로 남한으로 내려온 지 68년이 흘렀지만 김 할머니는 고향을 떠나던 당시를 생생히 기억했다. 그는 “너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야 한다”며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리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했다.

그래도 그는 다른 실향민과 이산가족이 겪고 있는 애절함보다는 나은 형편이라고 했다. 10여 년 전 친동생이 북한 고향에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끔이지만 동생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안부를 확인할 수 있기에 가슴 한곳을 억누르던 응어리가 조금은 풀렸다고 했다. 그럼에도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김 할머니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고, 형제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동안 알지도 못했다”며 “이들이 보냈을 힘든 세월을 생각하면 늘 눈물부터 난다”고 했다. 김 할머니는 10년 전 처음 고향에 동생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며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기가 막혔지요. 동생이 보내준 편지를 보는데 손이 떨리고 눈물이 계속 흘렀어요. 어머니와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동생이 보낸 편지로 처음 알게 됐는데 제 마음이 어땠겠어요. 형제들도 다 세상을 등지고 동생 한 명 살아서 가족이며 고향 이야기를 그렇게 편지에 적어 보내준 거예요. 그 편지를 잡고 있는 손이 너무 떨려 어떻게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김 할머니는 곧 2018 남북정상회담이 열린다는 소식을 신문과 뉴스를 통해 알고 있다. 기대와 바람, 그리고 걱정과 아쉬움을 동시에 갖고 있다. 남북정상회담 후 혹시라도 ‘북한에 남겨진 가족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과 기대가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만남이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게 되면 수많은 실향민과 이산가족들에게 또 다른 아쉬움과 아픔이 될 수도 있다는 걱정이 앞서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제 나이 이제 90입니다. 68년 전 헤어진 동생과 하룻밤만이라도 얼굴 맞대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70년 가까운 시간 떨어져 생이별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 가족이 만나는 자리에서 누군가의 눈치를 봐야 하고, 경계해야 하고, 묻고 싶은 말과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나눌 수 없다면 68년 만의 만남이 더 큰 아픔으로 남을 수도 있습니다.”

김 할머니는 실향민, 이산가족의 아픔을 생각하는 결정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가족 생사조차 모른 지 68년째예요”

최영선 할아버지.(사진=C영상미디어)
최영선 할아버지.(사진=C영상미디어)

최영선 할아버지 역시 함경남도 북청이 고향이다. 6·25전쟁 당시 홀로 남한으로 내려왔다. 최 할아버지는 북한에 남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너무나 크다. 7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북한에 남은 가족과 친척들의 생사조차 알지 못한다. 최 할아버지는 단 한 명의 생사라도 알 방도가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최 할아버지도 북한에 남은 가족의 생사를 확인해보기 위해 오랜 세월 노력했다. 최 할아버지는 “피난해 남한으로 내려온 후 고향에 살던 가족이 어느 순간 완전히 흩어져버린 것 같다”며 “여러 사람에게 부탁해 가족의 행방을 수소문해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가족과 친척들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던 이유를 기자에게 설명하는 최 할아버지의 떨리는 목소리에는 아쉬움과 그리움이 진하게 묻어 있었다. 최 할아버지는 “지금은 북한에 남겨진 가족들 찾는 일을 멈춘 상태”라며 “아쉽다”고 말했다.

최영선 할아버지는 “68년을 떨어져 살았는데 손 한 번 잡아보고, 얼굴 한 번 맞대고 문질러보고 싶은 게 당연한 심정일 것”이라며 “그런데 여전히 가족이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이산가족과 실향민이 많은 게 사실”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최 할아버지는 68년 전 헤어져 북한에 남겨진 누이동생을 한국에 있는 자신의 호적에 올려놓았다. 살아 있을 것이고, 언젠가는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기 위해서다.

최 할아버지는 “북한에 있는 가족의 생사를 북한 측이 확인해주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닐 것으로 생각한다”며 “우리 정부와 북한 측이 이산가족의 생사 확인만이라도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또한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정부가 이제는 고령이 된 이산가족과 실향민의 바람을 귀담아들어주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는 말도 했다.

“북한 사는 누이 편지에 온종일 울었어요”

김경재 할아버지.(사진=C영상미디어)
김경재 할아버지.(사진=C영상미디어)

김경재 할아버지도 6·25전쟁 중이던 1950년 함경남도 북청을 떠났다. 하지만 부모님과 형제 등 가족과 친척 절반 이상이 고향 북청에 그대로 남겨졌다. 68년이 지났지만 단 한 번도 북한에 남겨진 부모님과 형제, 친척들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김 할아버지는 “가족들의 생사조차 모른 채 속만 태우며 수십 년을 살고 있는 다른 실향민과 이산가족에 비하면 나는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 했다.

김 할아버지 역시 북한에 두고 온 누이동생과 사촌이 고향에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동생이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쁘고,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는 게 아니겠느냐”고 했다. 김 할아버지는 1950년 겨울 피난길에 올라 남한으로 내려온 후 수십 년 동안 북한에 남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제들을 그리워하며 살았다. 그러던 1990년대 중반 누이동생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김 할아버지는 “북한이 잠깐이었지만 미국에 살고 있는 북한 출신 사람들의 고향 방문을 허용한 적이 있었다”며 “이때 미국에 살던 고향 선배 한 명이 북한을 방문해 누이동생과 사촌이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하고 알려줬다”고 했다. 김 할아버지는 지인이 가져다준 누이동생의 사진 한 장을 보는 순간 몇 번 기절했을 만큼 울었다. 더구나 사진 속 누이동생이 자신이 북한을 떠날 때까지 살던 고향집에 그대로 살고 있는 것을 보며 가슴이 더욱 메어왔다. 김 할아버지는 “동생이 68년 전 살던 옛날 집 대문 앞에 서서 찍은 사진을 보며 꿈인 것 같았다”며 “아버지와 어머니가 언제 돌아가셨는지도 처음 알게 됐다”고 했다. 김 할아버지는 북한에 동생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이후, 북한에 있는 동생에게 편지라도 보내기 위해 거주지를 일본으로 옮겨 생활하기도 했다. 또 동생 소식을 듣기 위해 중국을 찾기도 했다.

혹시라도 기회가 찾아올 수 있을까 싶어 이산가족 상봉 이벤트에도 신청을 했다. 하지만 김 할아버지에게 동생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지금껏 찾아오지 않았다. 그저 아주 가끔 손에 넣을 수 있는 동생 편지를 보며 그리움을 달래고 있다.

김 할아버지는 “6·25전쟁 당시 10대 중반 정도의 나이는 돼야 북한에 두고 온 가족과 고향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라며 “북한에 두고 온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하는 것은 아마도 여든 살에서 아흔 살이 넘은 우리 세대가 마지막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고령인 실향민 수가 점점 줄어들면서, 이제는 북한에 있는 가족과 친지를 만나고 싶다는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줄어들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했다.

김 할아버지는 “그래도 죽기 전에 고향에 한 번 가봤으면, 그리운 가족 얼굴을 한 번만이라도 직접 볼 수 있었으면 하는 희망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며 “그 꿈이 현실이 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김 할아버지도 남북정상회담이 열린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다. 여기서 이산가족과 실향민을 위한 논의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하지만 그런 논의가 이산가족과 실향민의 기대와 희망을 충족시키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현실적인 이야기도 했다.

김 할아버지는 “예전부터 반복돼왔던 것처럼 매우 적은 수로 제한된 이산가족 대상으로 북한의 가족을 만나게 해주는 정도를 넘어서는 논의가 됐으면 좋겠다”며 “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그리워하던 가족에게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보장해줘야 한다”고 했다.

[위클리공감]

이전다음기사 영역

하단 배너 영역

지금 이 뉴스

추천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