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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근무혁신, 인생의 새 길 ‘삶의 혁신!’

[공무원 근무혁신 수기 공모전] ② 우수상: 박인권 인사혁신처 행정사무관

2016.10.17 박인권 인사혁신처 행정사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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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근무, 계획 초과근무제, 업무프로세스 개선 등 공직사회에 근무혁신의 바람이 불고 있다. 이로 인해 공무원의 삶에도 크고 작은 변화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과 가정의 양립, 재충전 휴가 이후 업무생산성 향상, 삶의 만족도 개선 등 조직과 개인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인사혁신처가 이러한 사례들을 수기 공모전을 통해 소개한다.(편집자 주)

필자는 공무원이지만 역사학자를 꿈꾸는 역사학도이기도 하다. 그것은 필자가 역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11세(초등학교 4학년) 이후 30년 이상 계속돼 온 정체성이다. 한 때 역사학을 내 평생의 직업으로 생각해 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역사학자의 길은 고난과 배고픔의 연속이었다.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와의 투쟁이다’라는 말을 남겼으며 우리 사학계에서 가장 위대한 사학자로 꼽는 단재 신채호 선생 역시 조선독립을 위한 항일투쟁이라는 특수한 환경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고난과 배고픔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전공자 중 극소수인 대학교수 혹은 교사를 제외하고, 대다수 역사학자가 우리나라의 열악한 기초학문 현실에서 부업을 하고 있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바다. 
 
학부를 마친 뒤 생계를 위한 직업으로 기자를 택하고 우연한 기회에 공직과 인연을 맺으며 공무원의 길을 걷고 있지만 내 머릿속에서 ‘역사’를 잊어 본 적이 없었다. 역사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으며, 기회가 된다면 언제든 학업을 계속하려 했으며, 실제 그런 의지로 대학원에 진학해 석사과정을 마치고 무사히 논문심사를 통과해 학위를 받기도 했다. 

공직과 인연 맺으며 평생의 꿈 역사학자, 잠시 내려놓다
 
내친 김에 박사까지 도전하고 싶었지만 공직의 길은 밖에서 회자되는 것처럼 한가하지 않았다. 특히 매일 매일이 전쟁터인 대변인실의 하루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었다. ‘정시에 출근해 정시에 퇴근한다’는 공무원은 주변에서 눈 씻고 찾아보기 힘들었다. 적어도 내가 일하는 중앙부처 어디에도 없었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언론스크랩과 모니터링, 언론동향체크, 보도자료 작성 및 배포, 기관장 인터뷰, 기고 준비, 기자단 접촉 등 일상이 곧 일이고, 일이 곧 일상이었다. 역사를 잊어 본 적 없었던 나이지만, 역사에 관심을 둘 관심과 여유는 잠시 뒤로 물려야 했다.
 
2012년 박사과정에 입학했지만 현재의 직장에서 주경야독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가능한 빠른 시간에 과정을 수료하고 논문 준비를 하면서 여유를 찾는 것이 좋다는 주변의 만류가 많았지만, 현실은 그럴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대학원에 휴학계를 제출했다. 서울의 학부(연세대)출신으로 타지에 있었던 필자를 광주로 불러 학문의 길로 이끌어 준 지도교수님께 더욱 면목이 서질 않았다. 찾아뵙고 이해를 구하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그렇게 2년이 흘렀다. 2015년 1학기 등록을 앞둔 2월의 어느 날, ‘전남대학교 학사관리부’ 발신으로 안내문이 도착했다. 내용인 즉, ‘휴학연한이 다 찼으니 이번 학기에 무조건 등록하지 않으면 학적부에서 탈퇴(퇴학)처리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순간, 박사과정에 입학하기까지의 지난 과정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전국 방방곡곡의 역사현장을 누비던 학부생 시절, 취재와 기사작성으로 바쁜 일상을 보내고, 밤을 세워가며 논문을 작성하던 석사과정. 그리고 낯선 광주로 내려가 지금의 지도교수님을 찾아가 ‘학업의 플랜’을 위해 열변을 토했던 입학시절 등등….

박사과정 입학 후 학업이냐 직업이냐 고민은 깊어가고… 
 
그렇다고 학업을 위해 직업을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게 공직은 생계의 수단이기 이전에 국가와 민족을 위한 희생과 봉사라는 또 다른 역사의 여정이었다. 또한, 일제강점기와 남북분단, 민주화 이전의 암울했던 시기에 ‘국민 위에 군림했던 부끄러운 공직사회의 역사’를 ‘국민의 낮은 곳에서 오직 국민을 위한 공직사회의 역사’로 만들어 가는 주역의 일원이라는 사명감과 자부심이 있었다. 

등록 마감일이 다가올수록 고민은 깊어 갔다.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없다’는 속담이 있지만, 나는 두 마리 토끼 중 어느 하나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필자 스스로 ‘이건 토끼가 아니라, 둘 다 손에 쥐고 있어야 하는 보석이다’라고 되뇌었을 정도였다. 그만큼 ‘학업을 계속해야 하느냐, 마느냐’는 내게 절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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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박하고 간절하면 이뤄진다고 했던가? 끝이 보이지 않던 고민의 해결은 유연근무제로 아주 간단히 풀렸다. 며칠 수심이 가득한 필자의 모습을 눈여겨보던 과장님은 내게 ‘유연근무제도(시차출퇴근)’를 제안했다. 그것은 필요에 따라 출퇴근 시간을 자유롭게 조정하는 것으로 수업이 있는 날 일찍 출근해서 일찍 퇴근하면 되는 제도였다.

학업을 핑계로 업무에 소홀해 질까봐 선뜻 답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과장님은 “일주일에 하루 한 두 시간 일찍 자리를 비운다고 해서 문제될 건 없다”며 “그래도 정 걱정이 되면, 다른 시간에 그만큼 더 일하라”고 하셨다. 과장님은 그러면서도 “더 배우고자 하는 공무원을 위해 이런 훌륭한 제도를 만들었는데 성공사례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냐”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셨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유연근무제를 한다는 것이 낯설었지만 도전해보기로 했다. 등록일에 맞춰 1학기 등록금을 납입하고, 본격적으로 수업시간표를 설계했다. 수업 시간은 다행히 업무의 부담이 비교적 덜한 수요일 저녁으로 정해졌다.

끝이 보이지 않던 고민, 과장님이 ‘유연근무제’ 제안하며 해결! 

개강일인 3월의 첫날, 유연근무 역시 첫날이었다. 수업 시작은 오후 7시. 수업을 위해서는 오후 4시 반에는 사무실을 나서야 수업시간에 맞출 수 있었다. 유연근무는 오전 7시 반 출근~오후 4시 반 퇴근으로 결재를 받고 유연근무의 첫 날을 보냈다. 

평소 출근 시간이 7시 30분 이전이어서 유연근무 시간에 맞춰 일찍 집을 나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출근해서도 아침의 바쁜 일과를 미리 준비하는 장점도 있었다. 4시 반이 가까워오자 2년 만에 캠퍼스를 다시 밟는 설레임이 더했다. 물론, 새 얼굴과 수업을 해야 한다는 낯설음도 있겠지만 캠퍼스를 간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가슴은 뛰고, 머리는 맑아졌다.

4시 반에 정부서울청사를 나와 5시 광주행 KTX에 몸을 실었다. 100분의 여행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역에서 학교로 가는 버스를 갈아타고 정확히 오후 6시 50분, 강의실에 도착했다. 지도교수님께 먼저 인사드리는 것도 빠뜨리지 않았다. 반가운 인사를 마치고 한 학기 여정이 시작됐다. ‘얼마 만에 다시 만나는 역사인가’ 나도 모르게 벅찬 감정이 솟았다.

인접 과 교수님과 함께하는 이번 학기 주제는 그것도 필자의 전공분야(한국근현대사)와 동 시대인 ‘중국근현대사’ 분야였다. 다만, 매주 발표문을 준비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지만 역사를 다시 공부한다는 기쁨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수업은 일주일에 한 번, 3시간이었지만 준비는 만만치 않았다. ‘가난한 집 제사가 자주 돌아온다’는 말처럼 특히나 대변인실에서 바쁜 업무 와중에 수업 준비하는 것은 매번 “벌써~!”를 말할 만큼 순식간이었다. 매주 발표 준비는 ‘벼락치기’를 넘어 ‘초치기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일을 핑계로 준비를 소홀히 하는 것은 ‘공무원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나의 발표는 강의 교수님을 비롯해 같이 수업 듣는 학우들에게 단순히 ‘학생 박인권’이 아닌 ‘대한민국 공무원 박인권’으로 비춰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실제로, 수업 시간 간간이 발표 진행 와중에 시사적 이슈로 화제가 옮겨가면 교수님과 학우들은 어김없이 ‘학생 박인권’의 시각이 아닌 ‘공무원 박인권’의 입장에서 필자의 의견을 묻곤 했다. 

일주일 한 번 수업 준비 만만치 않아…하다보니 요령도 생겨 

이번 학기 수업의 과정은 매주 발표문 수업과 종강에 맞춰 논문 형식의 보고서 작성으로 끝이 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2015년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1학기는 공무원연금개혁 등으로 어느 때보다도 치열한 국면을 오르고 있었다. 14번의 수업을 모두 수강하는 것을 목표로 했지만 4월과 5월 공무원연금개혁 합의에 이르는 진통의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각각 한 차례씩 두 번 결석했다.

다행히 교수님께서 과정을 이해해 주셨지만 ‘핑계를 대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종강을 앞두고 발표하는 보고서에 ‘개혁은 역사의 과정이라고 하지만 내게 올해의 개혁은 두고두고 잊혀 지기 힘든 역사일 것 같다’고 소회를 조금 넣은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개강했다. 지난 1학기가 어떻게 학교에 다닐 수 있을까? 고민했던 낯선 학기였다면 2학기는 ‘다니다보니 어느 정도 요령이 생긴’ 학기였다. 수업은 주말에 앞선 금요일로 정해져서 업무의 부담은 더 줄일 수 있었다.

주중에 자리를 비우는 것보다 금요일 오후는 주말근무 등으로 일찍 퇴근하는 사례가 많아, 사실 업무의 부담이 더 적었다. 게다가 언론사 또한 주5일 근무로 금요일은 쉬는 기자가 많은 것도 수업을 듣는 데 유리한 조건이었다.   

더욱이 2학기는 전공필수 과목이 아닌 전공 선택과목이어서 발표의 부담도 조금 줄었다. 1학기 수업이 매주 발표였다면 이번 학기 수업은 월 1∼2회 발표로 수업 준비에 조금 여유가 있었다. 본격적으로 주경야독이 가능한 환경이었던 것이다. 

한 가지 어려운 점이라고 한다면 주말을 앞둔 금요일에 KTX를 타는 것은 미리 예매하지 않으면 표를 구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평일 오후 5시 전후 KTX는 표에 여유가 있었지만 금요일 오후는 매진되기 일쑤였다.

표를 예매했다고 해도, 업무처리 등으로 열차 시간을 못 맞추면 이후 열차는 입석표도 구하기 힘든 주말의 시작이었다. 2학기부터 달라진 점은 이제 인터넷 모니터에 코레일 창을 띄워놓고 다음달 치 열차표를 예매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월∼목요일 밀도 있게 업무를 처리하고 금요일 오전에 다음 주 준비를 마치고 나면 홀가분하게 수업에 참석할 수 있는 점은 최고였다. 박사과정 수료까지는 두 학기가 남았던 것인데 이 방법으로 한다면 내년 1학기의 수료학기도 비교적 덜 고생하고 마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생겼다.

시간이 지나며 주경야독에 적응해 갈 무렵,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다. 바로 ‘추위’였다. 11월 중순이 지나고 나니 늦가을의 밤은 추웠다. 수업을 듣고 토요일 수업까지 듣는 날이면 추위를 피해 당일 묵을 곳을 구하는 것이 또 다른 고생이었다. 많지 않은 월급에 매번 시설 준수한 곳에서 잔다는 것도 경제적 부담이었다.  

추위·졸음운전과 싸우며 유종의 미 거두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학교 근처의 ‘찜질방’이었다. 규모가 커서 쾌적한데다 사우나 시설도 갖춰져 있어서 추위를 피하기는 안성맞춤이었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자면 불편한 것이 당연하겠으나 내 현실에서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 자체가 사치였다. 

눈이 내리고 추위가 몰아치는 2015년 12월 말, 그렇게 또 한 번의 학기를 마쳤다. 수업 준비는 괜찮았으나 수업 후(?)가 꽤나 고생스러웠던 2학기였다. 찜질방에서 보낸 8번의 금요일이 헛되지 않도록 유종의 미를 잘 거둬야겠다는 의지가 충만했던 것은 당연했다. 어느 때보다 수업 준비에 신경을 썼고, 종강 보고서 작성에 정성을 다했다. 결과는 올 A+.

박사과정 진학 후 처음으로 성적 장학생에 선발돼 다음 학기 등록금을 일부 감면받는 경사를 얻었다. 좋은 성적을 주신 교수님께 감사인사를 드렸고 타지에서 수업하러 오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준 대학원 원우들에게 감사의 사례를 했다. 말마따나 유종의 미를 잘 거둔 2015년 2학기였다.

2016년이 밝았다. 올해는 개인적으로나 직장으로나 매우 중요하고 의미 있는 해였다. 대학원의 마지막 학기로서 기나긴 역사장정의 종지부를 찍는 해이며, 인사혁신처의 세종 이전에 따라 서울청사를 떠나 세종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해이다. 무엇보다도 지금의 아내와 가정을 시작하게 되는 해로서 여러 가지가 얽혀 있는 굵직하고 중요한 해였다. 

지난 학기의 경험을 살려 이번 학기도 금요일로 수업 일정을 정했다. 토요일 수업은 오전 중에 끝나도록 수업시간을 설계해 결혼 후의 시간도 고려했다. 다만, 시간에 수강 과목을 맞추다 보니 수업 준비는 지난학기 보다는 빡빡할 것으로 예상됐다. 

예상대로 올해 1학기 수업은 매주 발표의 연속이었다. 월∼목요일 업무에 집중하다보면 목요일 저녁이 돼서야 수업준비에 들어가기 일쑤였다. 4월 초 집중 발표기간에는 사무실에서 수업 준비로 밤을 새는 날도 여럿이었다.

새벽 3~4시, 혼자 사무실에서 졸린 눈을 비벼가며 고문을 번역하던 봄날의 기억은 잊기 힘들 것 같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시간에 윗층에서는 공시생이 청사에 무단 출입해 사무실 컴퓨터를 조작하고 있었다고 한다. 

4월 중순 이후 청사의 세종 이전 후에는 왕복 500km에 이르는 거리를 승용차로 오가야 했다. KTX 호남선 개통 후 고속열차의 노선이 조정되면서 대전권과 광주 등 호남권을 잇는 열차편이 없어지는 등 교통편이 크게 불편해진 탓이었다.

나는 원래 장거리 운전을 기피하는 사람이다. 2시간 이상 운전대를 잡으면 졸음이 쏟아지는 체질이라 장거리를 가야할 상황이면 가급적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굳이 운전해야 할 상황이라면 소요시간을 2배 이상으로 넉넉하게 잡고, 졸음이 오면  중간에 눈을 붙여 가면서 운전한다. 

하지만 매주 금요일 교통체증을 피해 수업 시간에 맞춰 달려가야 하는 나로서는 졸음이 온다고 해서 중간에 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남세종 나들목에서 대전 유성을 지나 호남고속도로를 달려 140km 쯤 지나는 정읍나들목∼노령터널 근처는 내게 ‘마의 졸음구간’이었다.

이 곳을 지날 즈음이면 항상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다리를 꼬집어가고, 얼굴에 찬물을 부어 가며 졸음을 참고 운전해야 했던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이 오싹한다. 고속도로에서 치사율이 가장 높다는 졸음운전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는지….  

‘거꾸로 매달아도 시간은 간다’고 했던가. 밤을 새는 목요일이 여럿이 될수록, 내려오는 눈꺼풀과 사투를 벌이는 날이 많아질수록 수업은 종강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6월 말 마침내 종강일이 왔다. 종강 수업이 끝나고, 종강파티를 겸한 모임에서 교수님과 학우들은 필자의 수료를 축하하는 덕담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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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근무제, 인생의 새로운 길 열어준 삶의 혁신!

서울에서, 그리고 세종에서, 공무원의 신분으로 하나도 힘든데 두 가지 일을 끝냈다는 데 대한 격려이자 칭찬이었다. 휴학기간을 포함해 4년 반의 기나긴 박사과정의 대장정이 이렇게 마무리 되는 구나…. 지나간 시간이 다시 한번 머릿속을 지나갔다. 이전에 모셨던 기관장께서 자주 하셨던 말씀이 있다. “좋아하는 것은 취미로 계속하면 되고 잘 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아 정진한다면 일과 삶의 기쁨을 배가시킬 수 있다.”

11세에 시작해 앞으로도 이어지게 될 역사학이라는 학문은 필자에게 ‘좋아하는 것’으로서 계속 정진해 나갈 것이다. 여기에는 역사학도의 대장정을 계속하고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게 해 준 유연근무제도가 없었다면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공직도 마찬가지지만 직장인의 일과는 매일 바쁘고, 눈코 뜰 새 없다. 다른 곳에 관심을 두기에도 바쁜 시간이다. 그럼에도 그 시간을 쪼개 내가 할 수 있는 학업 등에 정진한다면, 본인의 경쟁력이 높아지는 것은 물론, 훗날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바탕이 될 것은 분명하다. 

필자에게 유연근무제도는 생애 끝까지 마주할 역사학의 길을 터 주고, 방향을 제시해 준 귀중한 나침반이었다. 유연근무제도야 말로 필자 같은 직장인에게 진정한 주경야독을 실현시켜 주는 제도라 확신한다. 그렇다고 유연근무제로 업무를 소홀히 하거나, 업무를 빼먹은 적은 더더욱 없다.

유연근무제를 활용해 수업을 듣던 2015년과 올해 상반기, 필자가 근무하는 인사혁신처는 정부 홍보평가 상위권을 줄곧 유지하며 2015년 홍보 최우수기관에 선정됐으며 개인적으로도 업무 성과가 우수한 공무원에게 수여하는 ‘스타공무원상’을 받는 등 업무면에서도 인정받았던 시기였다.   

지금도 공직사회 곳곳에서 ‘나의 길’에 대해 고민하는 많은 이들에게, 유연근무제를 활용한 자기개발을 적극 추천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근무혁신이며 인생의 새로운 길을 열어 줄 삶의 혁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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