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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심비, 플라시보소비, 일점호화, 있어빌리티, 탕진잼, 그리고 행복

2018.02.14 한기봉 국민대 초빙교수/언론중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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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는 대학생 이모(22)씨는 최근 서울 신라호텔 한식당 라연에서 9만8000원짜리 점심을 먹었다. 라연은 미슐랭가이드 서울판이 2년 연속 최고 등급인 별 셋을 준 식당이다. 이씨는 ‘한 달 일해서 번 알바비 중 생활비를 뺀 나머지를 한 끼 식사에 썼지만 아깝지 않다. 음식을 워낙 좋아해 꼭 맛보고 싶었다.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자 부럽다는 친구들의 댓글과 하트가 수십 개씩 달리고 팔로어가 확 늘어나는 걸 보며 배가 불렀다’고 말했다.”

올해의 소비 트렌드를 소개한 한 일간지에 얼마 전에 실린 기사 일부다. ‘영수증’의 김생민이 이 기사를 읽었다면? 당연히 “수퍼울트라 스튜핏!”이라고 외쳤을 게다. 댓글과 하트뿅뿅을 보낸 이 학생의 친구들은 진정 “그뤠잇!”이라고 동조한 것일까.

이런 소비를 ‘일점호화(一點豪華)’라고 요즘 부른다. 큰 심리적 만족감을 주는 어떤 한 가지에는 아낌없이 지갑을 여는 것이다. 일본 영화감독 데라야마 수지가 1967년에 쓴 책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에 처음 등장한 용어인데 일본의 장기불황 때 유행했다고 한다. 그는 “거적때기를 덮고 자더라도 한 부분에서만큼은 호화로움을 추구하자. 그것은 무료하기만 한 소시민적 삶의 한 돌파구다”라고 했다. 3만 원짜리 청바지를 입으면서도 운동화는 30만 원짜리 레어템을 신고, 한 달 월급이 훨씬 넘는 명품 핸드백을 메는 거다.

젊은층의 소비 심리 중에 ‘있어빌리티’와 ‘탕진잼’이란 신조어도 있다. ‘뭔가 있어 보이려 하는 것’과 ‘탕진하는 재미’다. ‘텅장’(텅 빈 통장)이 무섭지 않다. 스트레스를 받아 홧김에 질러버리는 ‘시발 비용’이란 말도 있다. 욕설에서 나왔다. 과거의 ‘지름신’이 다른 얼굴로 강림했다.

서울대 소비자학과 김난도 교수는 매년 우리 사회의 트렌드를 포착해 기가 막히게 이름을 붙이는 전문가다. 그가 이끄는 서울대 생활과학연구소 소비트렌드분석센터는 매년 말이면 그 다음해의 ‘트렌드 코리아’를 발표한다. ‘2018 트렌드 코리아’ 중에 가장 많이 회자된 것이 ‘가심비(價心比)’다. 가격 대비 객관적 성능을 뜻하는 가성비(價性比)를 차용한 말이다. 가격 대비 마음의 만족 지수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독창적 용어다.

가심비가 소비의 대세가 된 듯하다. 신제품 마케팅에서 가심비 석 자가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될 정도다. 가전제품이나 생활용품에 가장 많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게 소비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빨래건조기, 스타일러, 로봇청소기, 소형 냉장고 같은 것이다. 설 선물 세트부터 백화점 푸드마켓, 여행 상품, 인테리어, 패션, 화장품, 취미용품, 심지어 유명 제과 브랜드가 내놓은 발렌타인 케이크나 피자 회사의 신제품에도 가심비란 말이 들어갔다. 식상할 정도다.

가심비 소비 성향은 제품에 대한 소비자의 불신, 불안 심리가 부추겼다. 옥시 사태나 살충제 계란 파동, 햄버거병, 발암물질이 포함된 생리대 논란 같은 거다. 김 교수는 이를 가짜 약을 줬는데도 약효가 있는 위약효과에 빗대 플라시보(placebo) 소비라고 불렀다.  

특정 연예인의 이미지나 콘텐츠, 브랜드만을 사 모으는 굿즈 바람도 세다. 가심비와는 조금 다르다. 굿즈 소비는 의미에 대한 소비다. 자기가 애착을 갖거나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대상을 소유하고 싶은 심리다. 아이돌 그룹이나 특정 캐릭터의 굿즈 샵인 플래그십 스토어가 많이 생겨났다. 카뱅(카카오뱅크)의 성공은 카카오프렌즈 굿즈에 힘입은 바 크다. 출판업계 마케팅은 책이 우선인지, 끼워 주는 굿즈가 우선인지 모를 정도다. 평창롱패딩의 매진, 영화나 만화 캐릭터의 광적인 수집, 드론이나 액션캠 전동킥보도 같은 고가의 취미용품 덕후도 굿즈 소비다.
 
가심비나 일점호화, 있어빌리티, 탕진잼, 굿즈 열풍 같은 소비 트렌드에 대한 전문가들의 분석을 보면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 가슴이 아프다. 대체로 이렇게 분석한다. 아무리 정서적 만족을 외쳐도 그 바닥에 있는 건 일종의 박탈감이다. 내일이 오늘보다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사라진 시대다. 행복은 보이지 않는다. 대박이나 목돈 마련의 희망도 없다. 그 현실적 박탈감을 위로하는 가장 즉각적인 방법이 실용적 소비가 아닌, 감성적 기호적 소비다. 미래가 아닌 지금, 내 존재감을 확인하고 적어도 남에게 행복하게 보이고 싶다. 비록 인형뽑기나 다이소의 탕진재머(탕진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일회용 행복’일지라도.                        

마케팅은 그런 심리를 파고든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소비 대상이 당연히 꽤 비싸다는 것이다. 박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갑을 열고 싶으나 열지 못하는 현실은 박탈감을 더해준다. 요즘 SNS는 방대한 ‘있어빌리티’ 전시장이다. 수없이 달린 댓글과 ‘좋아요’를 보면서 자기만 루저가 된 것 같은 자괴감에 빠져드는 젊은이도 많을 것이다. ‘왕따’ 아니면 ‘관심종자(관심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욜로(you only live once),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  케렌시아(querencia, 고단한 삶의 피난처), 휘게(덴마크), 라곰(스웨덴), 오캄(프랑스)…. 가심비나 있어빌리티와는 성격이 좀 다른, 개인의 소소한 행복을 추구하는 라이프 스타일 용어들이다. 요즘 유독 행복어 사전에 새로 등재할 행복용어들이 넘쳐나고 있다. 우리네 삶이 그만큼 행복하지 않다는 게 아닐까.

오늘도 소셜미디어에는 행복 인증샷이 넘친다. 많이 질러서 행복한 사람이 있고, 다 버려서 행복한 사람도 있다.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에서 9만 8000원짜리 점심을 먹고 행복한 사람도 있고, 집에서 갓 구운 식빵을 손으로 찢어 먹으며 행복한 사람도 있다. 

대한민국은 지금 행복 찾기에 피곤하다. 마치 행복이 인증되는 것처럼. 어찌 해야 행복할까. 국내외에 행복을 연구하는 학자가 많다. 행복에 대한 책도 많이 나왔다. ‘행복론’은 요즘 대학의 커리큘럼 중 하나다. 나는 국내 언론에 보도된 행복에 대한 연구를 인터넷에서 최대한 뒤져봤다. 표현의 차이는 다소 있었지만 결론은 거의 이 말로 통했다. “인간은 행복에 집착하려 할수록 행복하지 않다.”

한기봉

◆ 한기봉 국민대 초빙교수/언론중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언론보도로 피해를 본 사람과 언론사 간 분쟁을 조정하는 언론중재위원이며, 국민대 언론정보학부에서 글쓰기와 한국 언론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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