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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부동산정책 40년

“엄마, 우리 또 이사 가?”

전·월세 보호대책의 어제와 오늘

2007.04.10 특별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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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브리핑이 주택도시연구원·국토연구원·금융연구원과 공동 기획한 <실록 부동산정책 40년>은 지금까지 연재된 1~3부에서 지난 40년 간의 부동산정책 역사를 되짚어보면서 항구적인 부동산시장 안정을 위한 교훈과 정책적 시사점을 얻고자 했습니다.
마지막 4부 '발상의 전환, 주거복지정책'에서는 역대 정부가 재정 부족 등을 이유로 전향적으로 추진하지 못했던 임대주택정책 등 주거복지정책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향후 과제를 살펴 볼 것입니다. <편집자>

총론
제1부 왜 올랐나
제2부 어떤 정책 폈고, 왜 못잡았나
1.<투명성과 형평성 제고 정책>
2.<안정적 주택공급 정책>
3.<가수요억제와 실수요 전환 정책>
제3부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
<첨부 : 참여정부 부동산 정책 평가 전문가 설문조사>
제4부 ‘발상의 전환’ 주거복지 정책
① 전·월세보호대책의 과거와 현재

② 임대주택의 역사1 - 예산부족과 임대주택
③ 임대주택의 역사2 - 주거복지 실현을 향한 노력]]


88 서울올림픽 직후부터 1990년 초까지 이어진 부동산 투기열풍과 전월세 값 폭등은 서민생활을 벼랑으로 내몰았다.
1980년대 후반 전셋값 폭등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됐다. 이를 다룬 중앙일보 1989년 3월 22일자 1면 기획기사
치솟는 전월세 임대료와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목숨을 끊는 자살 사건이 연일 신문 사회면을 장식했고, 이들이 남긴 유서는 수많은 서민의 절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전세대란에 세입자 자살 도미노

"폭등하는 부동산 가격에 내 집 마련의 꿈은 고사하고 매년 오른 집세도 충당할 수 없는 서민의 비애를 자식들에게는 느끼게 하고 싶지 않다.”
1990년 4월10일 서울 천호동 반지하 4평짜리 단칸방에서 보증금 50만원·월세9만원의 셋방살림을 하던 40대 가장과 부인, 7, 8살 자녀 등 일가족 4명이 치솟는 전세값 때문에 방을 얻지 못해 동반 자살한 참극은 ‘집 없는 설움’을 넘어 생존의 사선으로까지 내몰린 서민의 삶을 상징했다.

그해 전세값 파동은 두 달 남짓한 기간 17명의 세입자들이 잇달아 목숨을 끊는 ‘자살 도미노’로 이어졌고,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는 이들을 기리는 ‘희생세입자합동추도식’까지 열렸다.

일선 경찰서와 신문사 사회부 기자들은 자고 일어나면 혹시 전세값 때문에 목숨을 끊은 사람이 있을까 촉각을 곤두세워야 했다. 시민단체들은 ‘전월세값 안올리기 운동’까지 벌였다.

국세청이 직접 전세값 단속에 나섰고, 일선 구청과 동사무소에는 전세금 부당인상 신고센터가 설치됐다. 그해 건설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1986년 말~1990년 2월말까지 3년2개월 동안 전국 도시지역의 주택 매매가격은 평균 47.3% 오른데 비해 전세값은 이보다 34.9%포인트 높은 82.2%나 올랐다.

대책은 붉은 벽돌의 다가구 주택

하지만 당시는 경제침체가 우려되던 시기였다. 정부는 전세파동보다는 물가대책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실물경제전문가라고 불리던 이승윤 경제팀은 첫 작품으로 ‘4ㆍ4경제활성화대책’을 내놓았을 뿐이다.

4.4 대책이 성장력 배양에만 치우쳐 부동산투기와 물가불안을 방치하고 있다는 여론의 호된 비판을 받자 정부는 특단의 대책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특히 부동산문제가 더 시급하다는 최고위층의 지적에 따라 물가대책은 미루고 대신 부동산 대책 발표를 앞당기기로 했다.

며칠 후 모든 아이디어를 짜내 서둘러 발표된 이른바 ‘4.13 부동산 투기 억제대책’에는 ‘전세가격 안정’을 위한 5가지 방안이 담겼다.
임대용 다가구주택 건설을 촉진하기 위해 당시 동당 연건축면적 100평 이하 3층 이하인 건축규제를 20평 이하 4층 이하로 완화했다. 또 △다가구주택 건축 때 건물분 재산세 대폭완화 △다가구주택 취득 때 100평초과 호화주택에 적용되는 취득세 7.5배 중과배제 △국민주택기금의 다가구주택 동당 지원규모 확대 △보험회사 총운용자산의 일정비율을 다가구주택 건설자금으로 지원 등 전월세용 다가구 주택 건설 촉진을 위한 대폭적인 규제 완화와 지원책이 나왔다.

1980년대 후반 전월세시장 안정을 위해 다세대·다가구주택 규제가 대폭 완화됐다. 사진은 다세대주택이 빼꼭히 들어선 서초구 방배동 주택가 모습.


서민의 보금자리 달동네 사라지며

지금 서울 어디나 즐비한 빨간 벽돌의 3~4층짜리 다가구주택은 이렇게 해서 도시의 골목풍경을 바꿔놓았다. 다가구주택이 전월세 시장 안정에 일정하게 ‘효자’노릇을 했지만, 몇 년 후 무분별한 건축으로 도심 슬럼화를 초래할지는 당시 아무도 몰랐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주택 및 전세가격의 상승률이 공식 조사된 것은 1986년 1월이다. 이후 주택은행(현 국민은행)이 매달 가격동향을 발표하고 있다.

1987년 전년대비 전세가격 상승률은 19.4%로, 지금까지 이 기록은 깨지지 않았다. 1988년 상승률 역시 13.2%에 달해 2년간 상승률이 32.6%였다. 특히 주택부족이 극심한 서울의 전세값 상승은 더욱 심각했다. 갑자기 500만원 또는 1000만원 가량 오른 전셋값을 감당하지 못해 지하셋방, 달동네, 도시외곽으로 밀려나는 세입자들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다.

특히 당시는 이미 합동 재개발이 활성화되면서 달동네 지역이 점차 중산층 주거지역으로 변모해 가고 있던 중이라 저렴한 전셋집 찾기가 쉽지 않았다. 1989년 4월 27일 영구(7~12평)임대주택 25만호, 소형(10~15평)장기임대주택 등을 포함한 주택 200만호 공급계획이 발표됐지만 무주택 서민들의 고통은 줄지 않았다.

전세기간 2년 이상으로 법 개정

당시 언론은 “만약 모든 국회의원과 정부의 고위관리들이 셋방살이를 하고 있다면 다락같이 오르는 전세와 사글세를 요즘처럼 속수무책으로 보고만 있었을까. (중략) 민생문제를 중시하는 국회라면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했어야 했고, 아파트 분양가 현실화를 전격 발표할 정도로 주택가격 문제에 신경을 써온 정부라면 당연히 집세의 안정대책도 늦기 전에 내놓았어야 했다”고 정부를 질타했다.

정부는 1989년 5월 주택임대차기간을 1년에서 2년으로 늘리는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 그해 12월30일 통과됐다.

하지만 주택임대차보호법이 개정된 직후인 1990년 초부터 집주인들이 2년치 임대료를 한꺼번에 올리는 바람에 전세값이 오히려 폭등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당시 이 법은 갖가지 ‘원망’과 ‘탄식’의 표적이 되다시피 했다.

신도시 대기용 전세수요까지 겹쳐

물론 임대차보호법 개정이 임대료 폭등의 근본 원인은 아니었다. 1990년 당시는 자기집에 거주하는 가구의 비율이 49.9%에 불과한다데 분당 등 신도시 입주를 바라는 일시적 대기수요까지 가세해 임대수요가 컸던 시기였다. 따라서 임대기간 연장 외에도 시장 상황상 임대료 급등이 예상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또 1986~88년까지 3년 연속 연 10%를 웃돈 경제성장률, 3저호황으로 인해 넘치는 시중자금 등으로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고 있었다. 집값이 급등하면서 집값이 전세값에 반영된데다 일부 중개업자들의 농간까지 겹쳐 전세값이 급등했다는 분석도 있다. 이러한 분석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YMCA 시민중계실 등 시민단체에서 나왔다.

어쨌든 ‘짝수년 이사대란’과 ‘다가구 주택’은 1989~90년까지 이어졌던 전월세 파동의 산물인 셈이다.


조선 말기 한성에서 전세 유례

전세제도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독특한 서민 주거형태다. 주택가격의 일부를 보증금으로 맡기고 남의 집을 빌려 거주하는 전세 형태는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제도로, 조선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강화도조약)에 따른 3개 항구 개항과 일본인 거류지 조성, 농촌인구의 이동 등으로 서울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전세제도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인구증가로 한성의 주택수요가 급증하면서 주택 임차관계가 형성됐다. 이때 집 한 채를 통째로 빌리는 독채 전세뿐 아니라 집의 일부를 빌리는 전세도 많이 나타났다.

당시 가옥 소유주는 주택 임대차계약을 맺으면서 임차인으로부터 일정한 금액을 기탁받고, 상당기간 그 가옥을 임차인이 거주하도록 빌려준 뒤 가옥을 돌려받는 시점에 기탁받은 금액을 되돌려 줬다.
조선말기 전세의 기탁금액은 기와집과 초가집에 따라 달랐으며, 보통 가옥가격의 반액에서 비싼 곳은 7·8할이었다. 기간은 통상 1년으로 기간을 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세계 어디에도 없는 독특한 제도"

1900년대 조선을 방문한 한 일본학자는 “전세는 조선에서 행해지는 가옥임대차의 방법으로, 주로 경성 내에서 행해지는 관습”이라고 소개했다.

일제시대 전세는 일본 민법의 적용대상이 되면서 “매매는 임대차를 깨뜨릴 수 있다”는 규정이 적용되는 등 전세권자의 권리가 크게 약화됐다. 해방 이후 민법이 만들어지면서 등기를 한 전세권은 물권으로 인정하되, 등기하지 않은 전세에 대해서는 채권으로 보는 법체계가 정립됐다. 하지만 주택이 부족한 상황에서 집주인이 꺼리는 전세등기는 법률상의 권리로만 남게 됐다.

전세는 전국 방방곡곡으로 급격하게 확산돼 대표적인 주택임대차 유형으로 자리 잡았다. 전세보증금이 불확실한 임차인의 신원을 보증하는 기능을 한데다 매월 약간의 임대료를 받는 것보다 쉬웠기 때문이다.

"집주인의 눈치를 살피며"

지금 50대 중반 이상인 사람들은 신혼생활의 단꿈이 가시기도 전에 이사 다니기 바빴던 씁쓸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지금부터 26년 전인 1981년 이전에는 6개월마다 한 번씩 전세보증금을 올려줘야 했다. 여기에 세입자를 더욱 힘들게 한 것은 가등기 등의 절차를 밟지 있을 때 집주인이 집을 팔아버리면 전세보증금조차 돌려받지 못하고 쫓겨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남의 집 문간방에서 집주인의 눈치를 살피며, 우는 아기의 입을 틀어막아야 하는 어미의 눈에는 한 맺힌 이슬이 핀다. 예나 지금이나 도시 서민의 첫째의 소원은 제 땅에 제 집 짓고 사는 것이다.” (1977년 10월 30일 조선일보 사설)
당시 조선일보는 ‘집’이라는 특별 사설까지 실어 “집값을 서민들 소득에 맞춰 주어야 제 집 지니는 것이 한(恨)인 서민들의 꿈을 구현시켜줄 수 있는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서울 시민의 반이 남의 집살이

이러한 일이 벌어진 것은 1962년부터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 농촌에서 도시로 인구가 급격하게 유입하면서 높은 인구증가와 핵가족화 등으로 가구수가 증가해 주택부족현상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1981년 5월 처음으로 임대차보호법이 시행됐지만 실제 세입자를 보호하는데는 미흡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중앙일보 1981년 11월 11일자.
특히 많은 인구가 몰려든 서울은 주택부족이 더욱 심각해 변두리 구릉지, 제방, 하천변, 공원용지 등에 무허가 주택이 들어섰다. 1980년 서울에서 자기 집에 사는 가구는 44.5%로, 서울인구의 반 이상이 남의 집에 살고 있었다.

이 당시 우리 민법은 임대차 존속기간에 대해 20년을 넘지 못하도록 최장기간만 제한을 뒀고, 최단기간을 제한하는 규정은 없었다. 그래서 주택임차의 존속기간을 6개월로 정하는 것이 통례였다.

3자에 대한 대항력도 약해 계약기간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저당 등으로 주택소유권이 넘어가면 세입자들이 하루아침에 거리로 쫓겨나는 등 세입자 보호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됐다.

임대차보호법 '전세기간 최소 1년'

이러한 세입자의 일방적인 피해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주택임대차보호법이었다. 1981년 3월 5일 제정된 이 법은 전문 8조의 매우 짧은 법으로, 임차인이 주민등록을 옮겨놓는 경우 임차권은 제 3자로부터 대항력을 가지며, 임대차기간은 최소 1년으로 한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원래 임대차보호법은 1979년 유정회에서 임대가옥입주자보호법안으로 제정이 검토됐지만 실제 입법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서 이뤄졌다. 1981년 2월 19일 법안이 제안되자마자 다음날 의결됐고, 다음달 5일 법안이 공포, 시행됐을 정도로 초스피드였다.

임대료 인상 5% 이내에

그런데 법안이 제정된 다음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전세기간이 길어져 부동산경기가 반짝할 때 주택을 임의처분 할 수 없기 때문에 셋집으로 내놓기를 꺼리고, 6개월마다 약 20%씩 올려 받던 전세금을 1년치씩 2번 앞당겨 올려 받겠다는 속셈 등이 작용해 전세값이 계속 치솟고 있다. 더군다나 부동산 경기의 계속적인 침체로 아파트 등에 잠겨 있는 자금을 빼려는 사람들이 집을 팔고 전세를 들려는 경향을 부채질하고 있어 집 없는 서민들은 전세를 옮겨 다니기가 더욱 힘들게 되었다.(1981년 3월 중앙일보)”는 것이다.

국보위가 만든 주택임대차보호법은 입법취지와는 달리 임대료 인상을 초래했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1983년 개정된다. 임대료 인상 상한선을 연간 5% 이하로 제한하고, 소액보증금에 대해 우선변제권이 실시된 것이다. 당시 소액보증금은 특별시, 직할시에서 300만원, 기타지역은 200만원이었다. 임대료 인상 상한선 5% 제한의 경우 세입자의 우선계약권이 없기 때문에 종이호랑이에 불과한 상태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전세보증금 보호

소액보증금 우선변제조치는 집주인의 갑작스러운 부도나 의도적인 사기행위가 있어도 보증금 중 일부는 우선적인 보호대상으로 다른 채권에 앞서 돌려받을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세입자보호조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보호되는 소액보증금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지게 낮아 형식적인 보호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끊이질 않았다.

그러나 금융기관이 주택담보대출을 심사할 때 방마다 세입자가 거주할 것으로 가정하고, 소액우선 보증금에 방수를 곱한 금액만큼 대출 가능액에서 제외한 것은 전세 보증금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IMF 외환위기로 역전세대란

오르기만 하던 우리나라 주택임대시장에 가장 큰 변화가 찾아온 것은 IMF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초.
IMF외환위기 직후 처음으로 전셋값이 하락하면서 집주인이 보증금을 마련하지 못하는 초유의 '역 전세대란'이 일어났다. 조선일보 1998년 4월 21일자
실직이나 감봉 등으로 더 싼 곳으로 옮기려는 세입자들이 전세값을 되돌려 받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전세값이 떨어지면서 집주인도 전세보증금을 마련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초유의 '역(逆) 전세대란'이 발생한 것이다.

당시 전세가가 매매가를 웃도는 역전현상이 나타나 소형 아파트 중에는 ‘깡통 아파트’까지 등장(1998년 5월15일, 문화일보 11면)했고, 세입자가 전세보다는 월세를 선호하면서 전세의 종말을 예측하는 언론보도도 나왔다.

하지만 주택가격 및 임대료 하락세는 1998년 중점 추진된 주택경기 부양대책에 힘입어 6월 중순부터 둔화되기 시작, 8월부터는 '역 전세대란'이라는 표현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1998년 하반기부터는 전월세가 상승하기 시작, 1999년에는 폭등세를 보였다.

전세 보증금 못 받으면 세입자가 등기

전세가격 하락 때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임차인을 위해 만들어진 제도가 1999년 1월 도입된 임차권등기명령제도다.
이 제도는 임차기간이 끝난 세입자가 가옥주의 동의없이 임대주택이 있는 소재지 관할 지방법원, 지방법원지원 또는 시군법원에 임차권등기명령을 신청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임차인이 임대인으로부터 보증금을 받지 못하면 이사를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면 다른 곳에서 집을 얻기 어려운 세입자에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전세가격이 폭락했던 1998년 5월부터 전세금을 내주지 못하는 집주인을 대상으로 전세금반환자금대출제도가 운영되고 있지만 금리가 높아 실제 이용은 거의 없었다.

전세를 월세로 바꿔라

2000년대 들어 경제회복과 저금리로 주택가격이 재차 상승하기 시작했다. 2001년 주택가격은 14.3%올라 IMF외환위기 때의 하락률(12.4%)을 상회했다. 전세가격은 이미 1999년부터 두 자리 수 상승세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처럼 전세가격이 급등한 것은 IMF직후인 1998~99년 주택건설호수가 급감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택공급 부족은 2001년부터 전세가격 상승으로 나타났다. 아무리 가격이 높아도 전세로 들어오겠다는 문의가 빗발치자 당시 저금리로 돈 굴릴 데가 없던 일부 집주인들은 전세를 월세로 바꾸기 시작했다.

2001년 2월 내집마련정보사 등에 따르면 서울 강남, 서초, 송파, 용산, 강동구 등을 중심으로 전세의 월세전환물량이 60% 이상인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분당구 구미, 서현동은 월세비중이 80~90%에 달하기도 했다.

뒤늦은 월세 제한조치

당시 월세로의 전환이자율은 평균 13.1%~13.8% 수준이었고, 수도권은 이보다 높은 평균 15.6%~17% 이었다. 초기에는 소형 위주로 월세 전환이 이뤄졌지만 점차 대형주택 중에서도 월세 물량이 나오기 시작했다.

건교부는 월세세입자 대책 마련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월세에 대해 소득세를 부과하거나 세입자가 월세를 내는 경우 월세를 소득에서 공제하는 제도 등이 논의됐다. 그러나 세금을 메기면 임대용 주택의 감소가 우려되는데다 형평성 문제가 있어 전세보증금의 전부 또는 일부를 월차임으로 전환하는 경우 상한선을 정하는 방안이 모색됐다.
2002년 6월 주택임대차보호법을 개정하면서 정한 상한선은 연 14%였다. 이미 전세의 월세전환 이자율은 저금리 기조가 확대되면서 연 12% 수준으로 하락한 상태였다.

전세 350만 가구, 월세 300만 가구

저금리로 인한 전세의 월세전환은 전세거주가구를 줄였다. 2005년 11월 센서스에 따르면 전세거주가구는 2000년에 비해 48만 가구가 줄어든 356만가구로 나타났다. 아직 301만 월세가구에 비해서 많지만 저금리추세가 이어지면 역전될 수 있다.

집 주인에게는 목돈 마련의 기회가 되고, 세입자에겐 비교적 저렴하게 거주할 수 있는(때론 세입자에게 고통이 됐지만) 전세제도는 저금리 기조와 주택금융의 발전 등으로 인해 점차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주택금융이 발전한 선진국의 시각으로 볼 때 주택가격의 50% 정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집을 소유하지 못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은행융자를 끼고 집을 사는 것보다 세 살기를 원하는 수요가 많고, 매월 월세를 내는 것을 큰 부담으로 느끼는 한국적 정서 등으로 인해 여전히 월세보다는 전세가 선호되고 있다.

'법률로는 안 된다, 임대주택 늘려라'

2002년 초 전세의 월세전환과 전세금 상승은 더 이상 법률만으로 세입자를 보호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보여줬다.
2002년 5월 당시 정부는 2003~2012년까지 임대기간을 30년으로 하는 국민임대주택 100만호를 지어 임대주택이 전체 주택의 10%에 이르도록 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장기 공공임대주택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전월세값 폭등으로부터 서민생활을 보호하는 안전판 구실을 할 것이다.

이어 참여정부는 2003~2006년까지 4년간 47만5000호(사업승인 기준)의 국민임대주택을 건설했다. 2006년 말까지 입주 물량은 11만1000호에 불과해 당장 주택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
하지만 입주를 마친 공공임대주택 재고가 늘어나면 전월세 가격 폭등에 안전판 구실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선진국에서는 공공임대주택의 임대료가 시장 임대료 인상을 결정하는 가이드라인 역할을 하고 있다.

임대주택을 위한 펀드 조성

2006년 말 다시 전월세값 상승이 사회문제로 대두되면서 정치권을 중심으로 전월세 신고제, 전월세금 인상률 5% 제한, 계약기간 3년 연장, 재계약 갱신 거절 사유 제한 등의 대책이 논의됐다. 하지만 과거 경험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임대주택의 임대차기간을 늘리거나 가격을 규제하는 것은 임대료 폭등을 야기한다.

따라서 2007년 1·11 대책에는 이러한 내용이 제외됐다. 수급불균형이 심화된 주택시장에서 행정개입을 통한 가격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가장 근본적인 전월세 세입자 대책은 임대주택 재고를 충분히 확보하는 것이다. 2007년 1·31대책에서 비축용 장기임대주택 건설재원으로 임대주택펀드를 조성키로 한 것은 공공임대주택 재고를 늘려 간접적으로 민간 임대료 인상을 억제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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