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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1919년 3월 1일…100년 전의 ‘혁명적 거사’

[3·1운동과 임시정부 100주년 연속 기고] ① 3·1혁명의 일곱가지 성격

2019.02.27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1919년 3월 1일부터 시작해 두 달 동안 전개된 3·1 운동은 우리 민족사의 대전환을 이룬 혁명적인 거사였다. 국권을 강탈당한 지 9년만에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일제와 싸웠기 때문이다.

1910년, 한민족은 4천년 역사와 3천리 강토, 2천만 국민이 일제에 짓밟히고 노예가 되었다. 그로부터 9년 만에 자주독립을 선언하면서 왜적의 총칼에 맞선 것이다.

이날 이후로 전국에서 1542회의 독립만세 집회가 열렸고, 중국 동북 3성을 비롯하여 러시아 연해주, 미국과 캐나다 등 한민족이 거주하는 해외 곳곳에서도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독립만세 시위는 지역·성별·종교·이념을 가리지 않고 소수의 친일파를 제외하고는 모두 함께 나섰다. 당시 천민계급이었던 백정·광대·기생들까지 떨치고 일어선 것은 유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또한 세계 혁명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거사였다.

이날 만세시위에는 비폭력, 일원화, 대중화라는 세 가지 원칙이 제시되었다. 그럼에도 일제는 비폭력 항쟁에 무자비한 살상을 자행해 사망자 7500여 명, 부상자 1만 6000여 명, 피검자 4만 5000여 명, 종교시설 소실 47개소 등의 만행을 자행했다. 특히 여성들에게는 살육·고문·강간 등을 저질렀다.

3·1 운동은 혁명으로서, 일제로부터의 자주독립 선언임과 동시에 근대적 시민혁명의 전환점이 되었다.

봉건군주제에서 곧바로 일제식민지로 전락되면서 근대적인 시민혁명의 과정을 거치지 못한 우리나라는, 3·1 혁명을 계기로 민족해방투쟁과 사회혁명을 동시에 수행하게 된 것이다. 

3·1 혁명의 일곱가지 성격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민주공화제가 제시되었다. 만세 시위 당시 도처에 배포된 지하신문 ‘조선독립신문’에는 ‘민주공화제’가 제시되고, 민족대표들은 재판과정에서 일제 판사가 “조선이 독립되면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이냐”라는 심문에 하나같이 민주공화제를 주장했다. 그리고 1919년 4월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를 수용했다.

둘째, 4000여년 동안 가부장 질서에 신음하던 여성들이 처음으로 역사현장에 조직적·집단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주로 기독교와 천도교 계열 여성들이 많았지만, 농민·어민·심지어 해녀들까지 만세시위에 가담함으로써 여성해방의 계기가 되었다.

셋째는 신분해방이다. 전통적인 반상체제에서 조선사회는 여전히 천민계급이 존재했다. 하지만 백정·무당·기생·광대 등 하층민들까지 자진해서 만세시위에 참여하면서 전통적인 신분질서가 해체되고, 인간평등의 가치관을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넷째, 3·1 운동은 비폭력 평화적 시위였다. 일제의 무자비한 살육에 일부 지역에서는 분노한 민중이 경찰서에 방화하거나 왜경을 살해한 경우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는 비폭력으로 진행되었다. 이 역시 세계혁명사에 유례가 드문 일이다.

다섯째, 우리의 3·1 횃불은 중국의 5·4운동을 비롯해 인도와 베트남, 중동 등 세계 각지의 식민지 국가에서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운동의 촉진제가 되었다. 중국에서는 조선의 독립정신을 배우자는 목소리가, 인도는 반영운동의 지도자 네루가 옥중에서 어린 딸에게 “너도 크면 조선의 소녀들처럼 독립운동에 나서라”고 썼다.

여섯째, 3·1 혁명의 세례를 받은 청년들이 해외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나서면서 항일전에 불을 붙였다. 이는 1920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등 무장투쟁의 계기가 된 것이다.

일곱번째로 국내에서는 각종 지하단체가 속속 조직되었고, 노동·청년·여성·야학운동 단체들이 조직되어 항일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서울 세종로 외교부 청사 외벽에 설치된 초대형 태극기.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서울 세종로 외교부 청사 외벽에 설치된 초대형 태극기.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3·1 운동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내외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얼마 후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해 국권회복 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1919년 4월 11일 상해에서 수립된 임시정부는 전시체제인데도 의정원(국회)이 먼저 구성되어 정부를 수립했다.

이 과정에서 보황제·사회주의국가 수립 등의 논란이 있었으나, 의정원은 토의 끝에 민주공화제를 채택하고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정부를 운영했다. 이후 일제의 끊임없는 탄압과 추적, 극심한 재정난, 이념적 대결 등이 따랐지만 일제패망 때까지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중심기관으로 조국해방투쟁의 과업을 수행했다.

한인애국단을 조직해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주도하고, 광복군을 편성해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한 것도 임시정부였다.

또한 광복군을 기반으로 일제에 선전포고를 할 수 있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마무리될 즈음 전후처리를 위해 미·영·중 3국의 수뇌가 카이로회담을 앞두고 있을 때 김구 주석 등이 장제스 중국총통과 교섭해 ‘한국의 독립’을 카이로선언에 담기로 한 것은 큰 외교적 성과였다.

당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민족혁명당 등 좌파세력과 연대해 좌우합작정부를 수립하면서 일제와 싸웠다. 통합정부에는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들까지 참여하면서 임시정부는 명실상부한 한민족의 대표기관이 될 수 있었다.

임시정부의 특징은 일제와 싸우는 전시체제인데도 불구하고, 정부수립 초기부터 의정원에 의해 정부 인사가 선임되고 주요 정책이 결정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프랑스나 폴란드 망명정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현상이었다.

임시정부는 일제 패망을 내다보면서 ‘건국강령’을 제정해 향후 수립될 독립정부의 정책방향을 준비했다. 3균주의 사상의 원칙에 따른 주요 정책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상당 부분 그대로 승계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27년 동안 중원천지를 이동하면서 국권회복에 대한 의지를 한 시도 놓은 적이 없었다. 많은 요인들이 희생되는 아픔을 겪고, 온갖 고통을 견디면서도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날까지 한민족의 정통성을 지켜왔다.

임시정부가 추구했던 가치는 국권회복과 민주공화제였다. 국권이 회복되고 74주년, 아직도 우리는 분단상태를 면치 못했고 선열들이 꿈꾸던 민주공화제도 아직 완벽하지 못한 상태다. 4·19혁명, 6월항쟁, 그리고 촛불혁명 등을 통해 민주주의는 지켜냈지만, 공화주의는 여전히 준비단계가 아닌가 싶다.

선열들이 피 흘려 싸운 3·1 혁명 정신과 그 산물로 태어난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이해 다시한번 선열의 뜻을 기리고 되새겼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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