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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의 돔 아래 흐르는 ‘피렌체의 추억’

[정태남의 클래식 여행] 이탈리아/피렌체(Firenze)

2020.11.30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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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노 강은 피렌체 시내를 관통하며 서쪽으로 흐른다. 아르노 강 남쪽 언덕에 조성된 미켈란젤로 광장에 올라서면 아름다운 피렌체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한편 피렌체의 옛 이름은 플로렌티아(Florentia)인데, 이것을 프랑스에서는 ‘Florence’로 표기하고 ‘플로랑스’로 발음한다. 영어권에서는 프랑스식 표기를 그대로 받아들여 ‘플로렌스’로 발음한다. 한편 이탈리아에서는 ‘Firenze’를 ‘피렌체’가 아니라 ‘피렌쩨’에 더 가깝게 발음한다.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본 피렌체 전경.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본 피렌체 전경.

피렌체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르네상스의 발상지였으며 수많은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몰려들었던 곳이었다. 유럽에서 르네상스라면 고대 그리스와 로마시대 이래 역사상 처음으로 가장 찬란한 시대였다. 이러한 피렌체 시가지의 구심점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Santa Maria del fiore), 즉 ‘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으로 간단히 ‘두오모(duomo)’라고도 한다. 

피렌체의 두오모, 즉 대성당은 현재 로마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 밀라노 대성당에 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성당이지만 처음 세워졌을 때는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으로 3만 명의 신도를 수용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당시 피렌체의 정치력과 경제력을 만방에 보여주던 상징적인 건축물이었던 셈이다. 

르네상스 건축의 효시가 된 대성당의 거대한 돔.
르네상스 건축의 효시가 된 대성당의 거대한 돔.

이 대성당에서 압권을 이루는 부분은 ‘피렌체의 지붕’이라고 할 수 있는 거대하면서도 우아한 돔(dome)이다. 르네상스 건축의 효시로 꼽히는 이 돔의 우아한 모습과 기발한 건축구조는 지금도 놀라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돔은 천재 건축가 브루넬레스키가 지금부터 꼭 600년 전인 1420년에 착공, 16년 동안의 힘든 공사를 통해 1436년에 ‘꼭지’ 부분만 제외하고 모두 완공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태어나기 16년 전이고 미켈란젤로가 태어나기 39년 전의 일이었다. 당시 지구 반대편 한반도에서는 세종대왕이 나라를 통치하고 있었다. 

지구상 어느 곳에도 볼 수 없는 위대한 르네상스의 요람인 피렌체로 여행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비길 데 없는 산 경험과 영감을 얻는 일이다. 

러시아 음악가 차이콥스키(1840-1893)의 경우를 한번 보자. 차이콥스키라면 열정과 서정, 그리고 강렬한 관현악의 색채 때문에 그의 음악은 무언가 특별한 매력을 발산한다.

그는 피렌체를 무척이나 좋아하여 몇 해에 걸쳐 여러 번 이 르네상스의 도시를 찾았는데 이곳에 올 때마다 그는 대성당의 돔 아래를 지나면서 경이로운 눈으로 브루넬레스키의 역작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피렌체’라는 도시명이 돋보이는 제목의 현악 6중주곡도 구상했다. 이 곡의 제목은 프랑스어로 <Souvenir de Florence>. ‘피렌체의 추억’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어떤 추억이었을까?

피렌체 시가지의 초점을 이루는 대성당의 돔.
피렌체 시가지의 초점을 이루는 대성당의 돔.

차이콥스키가 피렌체를 마지막으로 찾은 해는 1890년. 그해 1월 30일 피렌체에 도착하여 오페라 <스페이드 여왕> 작곡에 몰두하던 중, 4월에 일단 로마로 갔다가 5월에 다시 피렌체로 돌아와서 <현악 6중주 ‘피렌체의 추억’>의 스케치를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후 러시아에 돌아간 다음 6월 중순부터 본격적으로 작곡하기 시작했는데, 이 곡은 그의 후원자이던 부유한 미망인 나데지다 폰 메크(1831-1894) 부인에게 헌정하기 위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그는 이전에 <교향곡 제4번>을 그녀에게 헌정했다. 

차이콥스키와 폰 메크 부인간의 관계는 1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차이콥스키는 1877년 37세 때 그의 여제자가 열렬하게 구애하는 바람에 엉겁결에 결혼했지만 그녀의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결혼한 지 2달 반 만에 집을 뛰쳐나갔다.

당시 그는 예술가들을 적극 후원하던 폰 메크 부인과 서신교환을 했는데, 그녀는 그에게도 매년 재정적으로 크게 지원해 주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차이콥스키는 경제적으로 안정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직을 그만두고, 오로지 자유롭게 작곡에 전념했으며 이탈리아를 비롯 유럽 여러 나라로 여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1888년, 48세의 차이콥스키.
1888년, 48세의 차이콥스키.

폰 메크 부인과의 서신교환은 매우 열정적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는 차이콥스키와 만나려 하지 않았다. 멀리 피렌체까지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피렌체에 체류할 때 차이콥스키는 아르노 강 남쪽 지역에서 머물렀지만 같은 시기에 같은 도시에 있으면서도 그녀는 그와 마주치는 것을 철저히 피했던 것이다.

그후 러시아에서 <피렌체의 추억>이 완성된 해인 1890년 가을, 그녀는 갑자기 지원금을 끊고 차이콥스키와의 관계도 끊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그녀가 파산했다는 것이지만 정확한 이유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한편 차이콥스키는 이 작품을 좀 더 다듬은 다음 2년 후에 초연했다. 그런데 이 곡에서는 <피렌체의 추억>이라는 제목과는 달리 피렌체나 이탈리아를 연상하게 하는 음악적 요소는 전혀 없고 오히려 러시아의 토속적 선율이 돋보인다. 어쨌든 그에게 ‘피렌체의 추억’은 달콤한 추억이 아니라 씁쓸한 추억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피렌체를 생각할 때마다 그의 뇌리 속에는 대성당의 돔 모습이 강하게 떠올랐겠지만.

정태남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미술·언어·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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