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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처럼 살다 떠났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시인

[문인의 흔적을 찾아서] 시인 김남주 생가/해남

2021.02.08 이광이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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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은 하나다’/ 이것이 나의 슬로건이다/ 꿈속에서가 아니라 이제는 생시에/ 남 모르게가 아니라 이제는 공공연하게/ ‘조국은 하나다’…그리고 나는 내걸리라 마침내/ 지상에 깃대를 세워 하늘에 내걸리라/ 나의 슬로건 ‘조국은 하나다’를/ 키가 장대 같다는 양키들의 손가락 끝도/ 언제고 끝내는 부자들의 편이었다는 신의 입김도/ 감히 범접을 못하는 하늘 높이에/ 최후의 깃발처럼 내걸리라/ 자유를 사랑하고 민족의 해방을 꿈꾸는/ 식민지 모든 인민이 우러러 볼 수 있도록/ 겨레의 슬로건 ‘조국은 하나다’를!」(1988)

김남주의 시 <조국은 하나다>, 이 시를 읽으면 <그 날이 오면>이 생각난다.

「그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 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 양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人定)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 날이 와서 오오 그 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1930)

해남 대흥사 못가서 동쪽으로 삼산면 봉학리에 있는 김남주 생가. 시인은 전남대학교 재학시절 유신반대투쟁으로 제적당한 뒤 고향인 이곳으로 내려와 시를 쓰기 시작했다.
해남 대흥사 못가서 동쪽으로 삼산면 봉학리에 있는 김남주 생가. 시인은 전남대학교 재학시절 유신반대투쟁으로 제적당한 뒤 고향인 이곳으로 내려와 시를 쓰기 시작했다.

두 시, 김남주의 <조국은 하나다>와 심훈의 <그 날이 오면>은 한 날 한 시에 쓴 시 같다. 조국의 통일과 조국의 해방을 염원하는 두 시 사이에는 60여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이 있지만 마치 한 사람이 쓴 노래 1절과 2절 같다. 언제 읽어봐도 암흑의 시대 민족의 핏줄을 덥히었던 저항시의 백미다.

해남 대흥사 못가 동쪽으로 삼산면 봉학리에 시인 김남주(1946~1994)의 생가가 있다. 해남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제일고등학교에 입학했다가 2학년 때 자퇴하고 1969년 검정고시로 전남대학교 영문학과에 들어갔다. 재학 중 3선개헌 반대 등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다. 1972년 유신헌법이 선포되자 이강(李綱) 등과 전국 최초로 유신 반대 지하신문인 ‘함성’을 발간했다. 이듬해 제호를 ‘고발’로 바꿔 제작한 신문을 배포하려다가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고 대학에서 제적당했다.

‘다시 한번 이 고을은 반란이 되자 하네/ 청송녹죽 가슴에 꽂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 . 노찾사가 불러 유명한 그의 시 <노래(죽창가)>가 새겨진 생가 마당의 시비.
‘다시 한번 이 고을은 반란이 되자 하네/청송녹죽 가슴에 꽂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 . 노찾사가 불러 유명한 그의 시 <노래(죽창가)>가 새겨진 생가 마당의 시비.

8개월을 복역한 후 해남으로 귀향해 농사를 지었다. 이 때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74년 <진혼가> <잿더미> 등 시 7편을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1977년 해남에서 한국기독교농민회의 모체가 된 해남농민회 결성에 참여했다. 이어 광주에서 황석영 등과 민중문화연구소를 열고 활동하던 도중 사상문제로 수배리스트에 오르게 된다. 이듬해 수배를 피해 상경하여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에 가입, 활동했다. 1980년 남민전 사건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광주교도소에 복역하던 중 1984년 첫 시집인 <진혼가>를 출간했다. 옥중에 쓴 시와 산문이 탈옥하는 과정이 눈물겹다. 종이와 펜이 없는 감옥에서 시인은 칫솔을 갈아 우유팩에 시를 쓰고, 못으로 은박지를 눌러 산문을 새기고, 연필심을 구해 화장지에 글을 썼다.

이 글들은 면회 온 사람들을 통해 어렵사리 밖으로 나왔다. “가족초청좌담회가 있던 날, 형은 음식을 먹으면서 자꾸 주위를 흩어보곤 했다. 교도관이 잠깐 자리를 비우자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형은 허리춤에서 뭔가를 꺼내 재빨리 덜 먹은 밥 속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얼마 후 시집 <나의 칼 나의 피>가 출간되었다”(동생 김덕종) 

‘민족시인 김남주 생가’ 현판이 걸려 있다.
‘민족시인 김남주 생가’ 현판이 걸려 있다.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세계 곳곳의 문인들이 그의 석방을 촉구하는 결의문과 서한을 정부에 촉구했으나 전두환 정부로부터 거부당하다가 1988년 12월 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9년3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이듬해 그를 10년 넘게 옥바라지 한 남민전 동지 박광숙과 결혼식을 올렸다. 1990년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문학연구소장이 되었으나 1992년 췌장암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사퇴했다. 1994년 48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었고 망월동 5.18 묘역에 안장되었다.

시집 <진혼가>·<나의 칼 나의 피>·<조국은 하나다>와 시선집 <사랑의 무기>·<솔직히 말하자>·<마침내 오고야 말 우리들의 세상>·<학살>·<사상의 거처>·<이 좋은 세상에>가 있으며, 산문집 <시와 혁명>, 번역서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프란츠 파농)·<아트 트롤>(H. 하이네) 등을 남겼다.

2019년 모교인 전남대학교 인문대학 1호관에 ‘김남주 기념홀’이 개관됐다. 그의 책들과 감옥에서 화장지에 쓴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 등 육필원고 6~7편과 편지글 5편 등이 원본으로 전시되어 있다. 그 건물입구에 동판으로 그의 시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 새겨져 있다.


전남대 인문대학 1호관에 마련된 ‘김남주 기념홀’.
전남대 인문대학 1호관에 마련된 ‘김남주 기념홀’.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함께 가자/ 앞서가며 나중에 오란 말일랑 하지 말자/ 뒤에 남아 먼저 가란 말일랑 하지 말자/ 둘이면 둘 셋이면 셋 어깨동무하고 가자…해 떨어져 어두운 길/ 네가 넘어지면 내가 가서 일으켜주고/ 내가 넘어지면 네가 와서 일으켜주고/ 산 넘고 물 건너 언젠가는 가야 할 길 시련의 길 하얀 길/ 가로질러 들판 누군가는 이르러야 할 길/ 해방의 길 통일의 길 가시밭길 하얀 길/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1991)

‘시인의 일 그것은 짓눌린 삶으로부터 가위눌린 악몽으로부터 잠든 마을을 깨우는 일, 첫닭의 울음소리는 아닐까’하고 김남주는 시 <시인이여>에 시인 또는 지식인들의 역할을 적어 놓았다. 시인 문병란이 “이 혼란과 변절의 시대에 김남주를 말한다는 것은 큰 고통”이라 한 것은  한 시대를 불꽃처럼 살다 떠난 그의 삶이 아주 큰 거울과 같은 것이어서 거기에 자기 모습을 비춰보고는 ‘나는 잘 살고 있는가?’하면서 자꾸 참회의 대목이 불거지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 점에서 김남주는 죽었지만 여전히 ‘살아’있다.    

이광이

◆ 이광이 작가

언론계와 공직에서 일했다. 인(仁)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애인(愛人)이라고 답한 논어 구절을 좋아한다. 사진 찍고, 글 쓰는 일이 주업이다. 탈모로 호가 반승(半僧)이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과 인문서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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