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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년 전, 라인 강변 고도에서 베토벤 탄생하다

[정태남의 클래식 여행] 독일/본(Bonn)

2020.12.17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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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 강은 게르만의 젖줄이다. 라인 강변에 위치한 독일 도시들 상당수는 기원이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하류에 서로 가까이 있는 도시인 쾰른, 본, 코블렌츠 역시 마찬가지이다. 쾰른에서 남쪽으로 약 24킬로미터 떨어진 본(Bonn)은 기원전 10년경 로마제국의 군대가 세운 병영 본나(Bonna)가 기원이 된다. 본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4년이 지난 1949년부터 1990년 10월 3일 독일이 재통일 될 때까지 서독의 수도였고, 수도를 베를린으로 완전히 옮기기 전인 1999년까지는 독일 행정부 소재지였다.

라인 강변의 고도 본.
라인 강변의 고도 본.

이처럼 2000년 이상의 장구한 역사가 배어있는 이 도시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면 단연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이다. 그가 태어난 집은 라인 강 제방에서 약 500미터 떨어진 본슈트라쎄(Bonnstrasse) 20번지에 보존되어 있는데, 벽면에 부착된 명판에는 ‘이 집에서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1770년 12월 17일에 태어났다’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러니까 올해는 탄생 250년 주년이 되는 것이다.

베토벤이 태어나 20여년을 살았던 이 건물은 제1차와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기적적으로 조금도 파괴되지 않았고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한편 베토벤이 태어났을 때의 본은 쾰른 선제후국의 수도로 쾰른 대주교겸 선제후의 궁정 소재지였다.

베토벤 생가 건물의 벽면 명판. ‘이 집에서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1770년 12월 17일에 태어났다’고 표기되어 있다.
베토벤 생가 건물의 벽면 명판. ‘이 집에서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1770년 12월 17일에 태어났다’고 표기되어 있다.

이곳에서 그의 조상과 성장기의 삶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베토벤의 조상은 독일 사람이 아니라 요즘으로 치면 벨기에 사람으로 당시 벨기에는 네덜란드 땅이었다.

음악가였던 그의 할아버지는 브뤼셀 북쪽 플랑드르 지역의 메헬린 출신으로 이미 10대에 고향 메헬렌에서 오르간 연주자 겸 합창대 지휘자로 일했고, 21살이던 1733년에 본으로 이주하여 궁정악단의 가수로 입단했으며 1761년에는 궁정악단의 지휘자라는 높은 지위에까지 올라갔다.

1740년에 태어난 그의 아들 요한 판 베토벤은 매우 자연스럽게 음악에 입문하여 후에 궁정합창단의 테너 합창대원이 되었고 1766년에 결혼했다. 첫아이는 어려서 일찍 죽고 1770년에 태어난 둘째 아이가 바로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었다.

그는 어린 베토벤이 모차르트와 같은 신동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는 아들이 모차르트처럼 되어야 한다고 믿고 그에게 무조건 피아노 연습을 계속하라고 강요했다.

술주정꾼이었던 그는 성장기의 아들에게 인자하고 따뜻한 모습은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항상 폭압적으로 군림했다. 반면에 베토벤의 어머니는 말수는 적었으나 경건하고 자상했으며 베토벤과 다른 자식들을 술주정뱅이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구하려고 노력했다. 베토벤은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매우 깊었다.

10세 때 베토벤은 궁정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인 크리스티안 네페로부터 음악교육을 받게 되었는데, 네페는 베토벤의 첫 작곡집 출판을 주선해주었다. 13세 때 베토벤은 세 개의 피아노 소나타를 선제후에게 헌정했고, 다음해에 베토벤은 제2의 궁정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베토벤 생가 건물.
베토벤 생가 건물.

베토벤은 17세 때 선제후 막시밀리안 프란츠의 후원으로 막강한 합스부르크 왕조의 본산이던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으로 여행했는데 그곳에서 모차르트를 방문했고, 모차르트는 그의 천재성에 주목했다. 여행 중 베토벤은 결핵을 앓던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받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녀는 4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후 베토벤은 22세 때이던 1792년에 빈으로 완전히 이주하여, 1791년 12월에 세상을 떠난 모차르트가 남겨놓은 공백을 메우게 된다. 그런데 빈에서도 그에게 주어진 운명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그는 특히 음악가에게는 치명적인 저주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귓병과 맞서 싸워야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18세기 음악의 진부함을 타파하고 음악 형식의 새로운 불길을 당겼다. 사실 그는 음악사를 통틀어 볼 때 가장 위대한 혁신가였다.

뮌스터 광장에 세워진 베토벤 기념상.
뮌스터 광장에 세워진 베토벤 기념상.

그의 고향 본 시가지 심장부에는 11~13세기에 세워진 로마네스크 양식의 뮌스터(대성당)가 우뚝 솟아있고 뮌스터 광장에는 베토벤의 동상이 거룩한 모습으로 세워져 있다.

베토벤은 작은 키에 고개를 약간 위로 쳐올리고 떠오르는 음악적 영감을 오른손에 든 펜으로 왼손에 든 오선지에 옮기려는 듯한 자세이다. 묵묵히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그의 얼굴에는 험난했던 그의 인생 역정이 고스란히 배어져 있는 것만 같다.

이 동상은 베토벤 탄생 75주년을 기념하던 해인 1845년 8월 12일에 제막되었는데, 제막식에는 당시 ‘유럽 음악계의 황제’라고 할 수 있는 프란츠 리스트가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을 지휘했다. 그것은 운명을 이겨내고 우뚝 선 베토벤을 위한 최상의 헌정이었던 것이다. 

올해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여 전 세계에서 기념음악회와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준비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코로나 감염병 확산 때문에 대폭 축소되거나 취소되고 말았다. 이것도 베토벤에게 주어진 ‘운명’일까?

정태남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미술·언어·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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