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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돈 냈는데…공무원연금 266만원·국민연금 156만원?

역사 속의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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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기아자동차, 포르테 출시
2003
대구 하계유니버시아드 개막
1998
주한 중국대사관·한국노신학회의, 제1회 노신문학상 수상자로 소설가 조정래 선정
1996
LG전자, PDA 개인휴대정보단말기 개발
1996
최초로 불시 민방공훈련 실시
1986
국립중앙박물관, 구 중앙청 청사로 이전·개관
1985
한국, 국제이동위성기구 가입
1981
제5차 경제사회발전5개년계획 발표
1980
전군 주요지휘관회의, 전두환 장군을 국가원수로 추대하기로 결정
1976
청계천 하수처리장 준공
1964
4명의 대처승, 비구승 12명 걸어 종헌 무효 제소
1960
제1회 한강 원영(遠泳)대회 개최
1948
해주에서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 개최
1945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선언과 강령 발표
1944
조선의료령 공포
1934
한강인도교 공사 기공(~1936.10)
1919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창간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창간
1912
총포화약류 취췌령 공포

그때 그 시절

음악과 방송 발전에 기여한 ‘전축’과 ‘LP' No.145 2017.11.16 음악과 방송 발전에 기여한 ‘전축’과 ‘LP' 요즘은 PC 혹은 스마트폰만 있으면 어디에서든 노래를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약 10여 년 전에는 CD플레이어와 MP3가 그 역할을 대신했었는데요. 그렇다면 그보다 더 전에는 어떤 기계를 이용해 음악을 들었을까요? 그때 그 시절, 우리의 음악 감수성을 채워주던 전축과 LP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1960년대 시작된 ‘전축’ 보급 사진 좌/우. 2001.07.03 정부 사진 기록으로 남아있는 축음기 ‘전축’은 전기축음기의 약자입니다. 레코드판(LP)를 재생할 수 있는 기계를 말합니다. 전축이 대한민국에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던 시기는 1960년대입니다. 1954년 충무로에 ‘음악사’라는 이름의 고급 전축과 LP 음반을 판매하는 점포가 생겼고, 이 ‘음악사’를 시발점으로 한국의 음악 문화는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방송의 대중화와 함께 변화한 음악 문화 사진 좌/우. 2004.02.06 국악이 담겨있는 LP판과 보관상자 또한 1960년대는 이른바 ‘민방’이 속속 등장하던 시기입니다. 1961년에는 문화방송(MBC), 1963년에는 동아방송(DBS), 1964년에는 동양방송(TBC) 등이 차례로 개국했습니다. 당연히 텔레비전, 라디오와 스피커의 보급률이 급격하게 상승했고요. 방송을 통해 들은 음반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며, 클래식 LP 음반 판매량이 수직 상승하기 시작했습니다. 레코드판, ‘수집’ 열풍 사진 좌. 2004.12.04 참소리축음기에디슨박물관 전시실 사진 우. 2003.05.01 레코드점에서 LP 제품을 살펴보는 사람들 이렇게 전축과 LP가 활발하게 보급되며 생겨난 당시 문화 트렌드는 바로 ‘수집’이었습니다. 기존에는 음반에 대해 단순한 소모품으로 보던 사람들이 ‘음악 애호가’라는 이름으로 ‘수집’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이 문화는 2000년대 초반까지도 이어져왔습니다. 이제는 구하고 싶어도 못 구하는 LP와 전축들이 많습니다. 우리나라에는 해외에 더 많이 알려진 박물관이 한 곳 있습니다. 연간 50만 명의 이상의 관람객이 찾는 강원도 강릉에 위치한 참소리축음기에디슨박물관이 그 주인공입니다. 현재 이 박물관은 미국에도 없는 옛 축음기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때 그 시절 향수를 느껴보기 위해 한 번 발걸음을 옮겨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자나깨나 산불조심! 산불 예방 캠페인 No.144 2017.11.16 자나깨나 산불조심! 산불 예방 캠페인 완전한 가을에 접어들고 날씨가 점점 건조해지면서 산불에 대한 위험이 높아졌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산림청을 비롯해 각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산불예방 캠페인을 펼치고 있습니다. 친숙한 ‘산불조심’ 빨간 모자 사진 좌. 1985.04.01 산불 조심 모자를 쓴 어린이들사진 우. 1985.04.01 산불 예방 캠페인에 참가하는 지역 주민들 산불 예방 캠페인은 1980년대에 시작되어 현재까지 쭉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각 지역의 주민들과 보이스카웃, 걸스카웃 등 청소년 단체에서 참가하여 산불 예방 캠페인을 진행하기도 했었습니다. 사진 속 ‘산불조심’ 이라고 쓰인 빨간색 모자, 아마 어릴 적 집 한 구석에 걸려있는 걸 보신 분들도 계시겠지요. 등산객에게 ‘산불 위험’ 알리기 사진 좌. 1986.10.24 산에서 캠프파이어를 하는 등산객들 사진 우. 1991.11.06 산불 위험 표시 표지판 사진. 산불예방 캠페인에 서명하는 등산객 산불 예방 캠페인이 실시된 이래 최근까지도 봄과 가을, 산불이 주로 발생하는 기간에 등산로 초입에서 산불 예방 캠페인을 펼치고 있고 곳곳에서 ‘산불조심’ 현수막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산불은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산림청에서 조사한 통계를 확인해보면 2016년 담뱃불과 쓰레기 소각으로 인해 발생한 산불 발생은 총 94건에 달합니다. ‘자나 깨나 불조심, 꺼진 불도 다시 보자’라는 표어는 언제든 마음에 새겨 놓아야겠습니다.
천하장사 만만세~ 씨름 대회 No.143 2017.11.16 천하장사 만만세~ 씨름 대회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 한 우리 고유의 민속 경기이며 누구나 즐길 수 있던 평등한 운동 ‘씨름’. 씨름대회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천하장사 씨름대회’가 생각납니다. 천하장사 씨름대회 사진 좌. 1972.09.26 제1회 KBS배 쟁탈 전국장사씨름대회사진 우. 1984.06.05 천하장사씨름대회 천하장사 씨름대회는 한국씨름연맹에서 주최했던 프로 씨름대회입니다. 제5공화국 3S 정책 장려 정책의 일환으로 1983년 첫 대회가 열린 후 2004년 마지막 대회까지 총 42회의 대회가 열렸습니다. 당시 모든 경기는 KBS에서 생중계 방송했습니다. 대회가 시작된 뒤 유명 씨름 선수들도 많이 탄생했죠. 사진 좌. 1983.04.23 제1회 천하장사 씨름대회에서 우승한 이만기 선수사진 우. 1989.09.09 우승 트로피를 받고 있는 이봉걸 선수 ‘씨름황제’라 불리던 이만기, ‘인간 기중기’ 이봉걸, ‘모래판의 신사’ 이준희 그리고 뒤를 이어 김칠규, 황대웅, 강호동 등 내로라하는 씨름 장사들이 모래판 위에서 자웅을 겨뤘습니다. 다시 부활하는 씨름의 인기 사진 좌. 1988.09.25 한강축제 민속씨름대회사진 우. 20130613 청양 단오장사 씨름대회 비록 2004년 이후 잠시 인기가 주춤해지긴 했지만, 최근에는 우리의 전통과 유산을 지켜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다시 경기가 부활되고 있습니다. 대한씨름협회는 씨름의 부흥을 위해 2016년 씨름진흥TF팀을 운영하여 대한씨름협회의 새로운 CI와 캐릭터를 개발하였고, 씨름 디자인 개선 사업을 통해 장사복, 심판복 등을 개선하여 새로운 씨름의 모습을 선보였어요. 또한 민속씨름위원회, 여자씨름위원회, 스포츠공정위원회 등 각종 위원회를 설치하여 민속 씨름을 알리고 보전하는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사진. 2016 씨름하는 어린이들 씨름은 2015년 4월 유네스코(UNESCO) 인류무형유산 등재를 위한 신청서를 제출한 상태입니다. 2018년 1월에는 국가무형문화재 제131호로 지정될 예정입니다. 만약 2018년 씨름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될 경우, 씨름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진출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유네스코 등재가 새로운 도약의 발판이 되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서울 전역을 누벼 온 서울 지하철 2호선 No.142 2017.09.28 서울 전역을 누벼 온 서울 지하철 2호선 현재 수도권 지하철은 서울, 경기, 강원, 충청권까지 그 범위를 넓혀나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주로 이용하는 지하철은 몇 호선 인가요? 오늘은 여러 노래에도 인용되고, 많은 시민들의 추억을 담고 있는 ‘2호선’에 대해 한 번 이야기해보겠습니다. 2012년까지 세계에서 가장 긴 순환선이었던 지하철 2호선 사진 좌. 1979 지하철 기본 계획사진 우. 1984 지하철 2호선 전구간 개통 문구 서울 지하철 2호선은 1979년 착공하여, 1980년 10월 31일에 1단계 구간이 부분 개통 뒤, 1982년에 2단계, 1983년에 3단계를 거쳐 1984년 5월에 완전 개통으로 현재의 노선이 완성되었습니다. 서울 지하철 2호선은 등장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긴 순환선’이라는 타이틀을 얻었었는데요. 2012년 베이징 지하철 10호선이 완공되기 전까지는 계속 이 타이틀을 갖고 있었습니다. 다양한 노래에 등장하는 지하철 2호선 사진 좌. 1982 2호선 역삼역 매표 창구 앞 사진 우. 1993.02.08 2호선 성내역 출근하는 사람들 서울 전역을 아우르는 노선 때문인지 유독 지하철 2호선과 관련된 노래도 많습니다. 1996년 발매되어 당산역 종착역 안내방송 시그널 송으로 쓰였던 ‘지하철 2호선’이 대표적입니다. ‘지하철을 타보세요 사당에서 서울 어디든지 달려가죠’로 시작하는 노래 가사 기억하시나요? 이 외에도 ‘59년 왕십리’와 같이 유명한 노래도 있습니다. 노래 중에는 ’걷다 보니 신천역 4번 출구 앞이야.‘라는 가사도 있는데, 신천역은 최근 ’잠실새내역‘으로 이름이 변경되었습니다. 서울 교통망의 중추, 지하철 2호선 사진. 1982 교대역에 정차 중인 2호선 현재 지하철 2호선은 서울의 중추적인 교통망이라고 할 수 있어요. 서울 중심부의 주요 구간을 순환해서 계속 달리기 때문인데요. 이용객 수 역시 수도권 전철 전체 노선 중에서 가장 많습니다. 지하철 2호선의 역 수가 몇 개 인지 아시나요? 총 51개입니다. 출근 시간마다 일명 ‘지옥철’을 방불케 하지만, 그래도 서울의 교통이 더욱 원활하게 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서울 전역을 누비며 우리의 발이 되어준 지하철 2호선. 시설 관리에 힘써 앞으로도 국민들의 발이 되길 기원합니다.
주민등록증은 언제부터 사용했을까? No.141 2017.09.27 주민등록증은 언제부터 사용했을까? 만 17세 이상의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 갖게 되는 신분증. 바로 ‘주민등록증’입니다. 주민등록증은 관공서의 서류를 떼거나 자신을 증명할 때 대표적으로 사용되는 증명서입니다. 그렇다면 ‘주민등록증’ 전에는 무엇을 사용했을까요? 주민등록증 이전의 ‘도민증’ 사진 좌. 1954 도민증 서식 양식사진 우. 1967 도민증 폐지 서류 양식 주민등록증 이전에는 ‘도민증’이란 것이 있었습니다. 6·25때 주로 발급되어 사용되었습니다. 전쟁 중이라는 상황에 맞게 주소, 직업, 체중, 혈액형 등 자세한 신상이 적혀 있었습니다. 근대화 이전에는 ‘호패’가 그 역할을 했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 주민등록증 사진 좌. 1968 주민등록증 최초 발급 사진 우. 1968 주민등록증 코팅 기계 사진. 1999 주민등록증 홀로그램 모형 사본 우리나라 행정사상 최초의 주민등록증은 1968년에 만들어졌습니다. 과거 주민등록증에는 사진, 주민등록번호, 본적, 주소, 해당 기초단체장 이외에도 병역사항이 앞면에 기재되었고 뒷면에는 오른쪽 엄지손가락의 지문과 특기번호, 주소변경사항이 기록되었습니다. 또한 종이 재질의 ‘세로 형태’로 제작되었었으며, 추후에 가로 형태로 바뀌고, 1983년 이후에 현재와 같은 카드 형태의 디자인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1999년 위조를 방지하기 위한 홀로그램이 새겨진 모습으로 최종적으로 변화했습니다.
그때 그 시절 서울의 밤은 어땠을까? No.140 2017.09.27 그때 그 시절 서울의 밤은 어땠을까? 노래로도 이야기 될 만큼 아름다운 서울의 밤. 그때 그 시절 서울의 밤은 어땠을까요? 서울 곳곳의 랜드마크를 중심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밤 풍경 속으로 함께 시간 여행을 떠나봅시다. 야경이 유독 아름다운 남대문 사진 좌. 1988.11.29 서울 남대문 야경사진 우. 2003.04.30 서울 남대문 야경 남대문은 서울특별시 남대문로에 위치한 국보 제1호의 성문입니다. 정면 5칸, 측면 2칸, 중층의 우진각지붕 다포집인 남대문은 서울의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입니다. 유구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서울의 중심에 서서 서울의 발전을 지켜봤습니다. 위 두 사진의 시간의 흐름은 약 15년의 차이가 있습니다. 15년 만에 훨씬 더 화려해진 남대문 광장의 모습이 감동스럽게 느껴집니다. 2008년 2월 10일에 발생한 화재로 2층문루와 1층문루 일부가 불에 타버린 아픈 기억도 있지만, 여전히 서울의 중심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국보 제1호 입니다. 서울의 밤을 즐기는 시민들 사진. 1982.02.22 서울 명동 야경 명동은 서울특별시 중구에 있는 번화가입니다. 조선 시대에 명례동 또는 명례방이라 불렸으며, 1970년대 이전에는 증권회사가 모여 있던 한국 경제의 중심지였어요. 대한민국의 최대 번화가이자 한국 쇼핑과 문화 등의 메카였습니다. 1980년대, 서울의 밤을 즐기러 명동으로 나온 시민들의 모습, 희미하게 불빛이 들어온 간판이 새삼 이색적으로 느껴집니다. 사진 좌. 2002.11.18 서울 삼성동 테헤란로 야경 사진 우. 2006.08.07 서울 도심 야경 테헤란로의 원래 이름은 삼릉로였습니다. 1977년, 한국의 중동진출이 한참이던 시기에 이란의 테헤란시와의 자매결연을 기념으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1995년 전후로 소프트웨어 및 정보통신 벤처기업이 많이 입주하면서 번화가로 발돋움 했습니다. 어디를 봐도 서울의 밤은 무척이나 화려하고 아름다운데요. 오늘 밤도 서울 곳곳의 번화가는 각기 다른 분위기를 풍기며 눈부시게 빛나고 있습니다.
청소년 전용 디스코장, 흥이 폭발한다! No.138 2017.09.19 청소년 전용 디스코장, 흥이 폭발한다! 놀이공원, PC방, 워터파크 등 지금의 놀 거리가 없었던 그때 그 시절, 청소년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흥과 끼를 발산했을까요? 사진. 1965.05.08 DJ가 선곡한 음악을 듣는 음악감상실 음악을 즐기기 위해서는 다방을 많이 찾기도 했어요. 당시 다방 DJ는 최고의 인기를 얻기도 했었습니다. 그렇다면 춤을 즐기기 위해서는 어디로 향했었을까요? 청소년 전용 디스코장에서 댄스 배틀! 사진. 1989.03.15 한국 걸스카우트 연맹 회관 내 청소년 디스코장 성인 디스코장이 유행하던 80년대. 우리 청소년들도 춤추고 싶은 열망에 몰래 성인 디스코장에 가고는 했습니다. 이런 청소년을 선도하기 위해 한국 걸스카우트 연맹에서는 청소년 전용 디스코장을 개방했었습니다. 한껏 멋을 내고 디스코장에 모여 함께 춤을 추고 즐기며 청소년들의 흥이 폭발했죠. 1989.03.15 한국 걸스카우트 연맹 회관 외관, 청소년 놀이마당 현수막 '디스코장‘이라는 이름의 장소는 모두 없어졌지만 아직 유사한 형태의 다양한 모습으로 남아있습니다. 다만 현재는 모두 성인들만 출입이 가능한 형태이기 때문에, 과거처럼 청소년들이 함께 모여 춤을 추고 즐길 수 있는 곳이 생겨난다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그시절 중요무형문화재 장인들 만나보기 No.137 2017.09.14 그때그시절 중요무형문화재 장인들 만나보기 “무형문화재”는 형태로 헤아릴 수 없는 문화적인 소산으로서 역사상 또는 예술상 가치가 높은 것을 말합니다. 보통 형체가 없기 때문에 그 기능을 갖고 있는 사람이 지정 대상입니다. 현재 우리에겐 낯설지만 옛부터 이어져 온 중요무형문화재 장인들을 만나보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기억하고 알아둬야 할 중요무형문화재 사진 좌. 1990.02.23 중요무형문화재 제64호 두석장 기능 보유자 김덕용 씨사진 우. 1986 김덕용 씨가 만든 두석. ‘두석장’이란 목제품을 비롯한 각종 가구에 덧대는 금속장식을 만드는 일 및 그 일에 종사하는 장인을 말합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6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고급스러운 장롱이나 보석함을 보면 아름다운 문양의 경첩을 볼 수가 있는데요. 이러한 금속장식이 두석장의 손에 의해 탄생하는 것입니다. 사진 좌. 1992.10.28 박정자 중요무형문화재 단청장의 작업 모습사진 우. 2004.07.09 단청 문양 단청은 목조건물에 채색으로 무늬를 그리는 것을 가리키는 건축용어입니다. ‘단청장’은 단청일에 종사하는 장인을 말합니다. 중요무형문화제 제4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단청은 단순 목조건물에만 그치지 않고 공예품과 조각물 등 모든 의장에다 오색의 안료를 칠하여 화려하게 꾸미는 일도 포함됩니다. 단청은 청, 적, 황, 백, 흑색의 오채가 기본색입니다. 사찰의 단청, 궁의 단청 등이 단청장의 손에 의해 탄생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사진 좌. 1990.02.22 중요무형문화재 10호 나전장 기능보유자 송방웅씨사진 우. 2005.12.27 한국의 자개장 ‘나전장’은 옻칠한 기물의 바탕에 자개를 여러 가지 모양으로 박아 붙여 장식하는 일 또는 그 일을 하는 장인을 말합니다. 중요무형문화제 제 1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나전칠기’가 나전장의 손에서 만들어지지요. 나전칠기는 나전공예, 칠공예, 목공예, 금속공예가 하나로 합쳐진 종합예술품입니다. 나전의 나는 소라나 전복 등 색깔 있는 조개류를 가리키는 말이고 전은 금속을 장식하는 것을 일컫습니다. 현재도 나전칠기 장식이 되어있는 가구는 고가에 거래되고 있을 만큼 대대손손 인정받는 공예입니다.
파격 그 자체였던 앙드레 김 수영복 패션쇼 No.136 2017.08.01 파격 그 자체였던 앙드레 김 수영복 패션쇼 팝의 황제 마이클잭슨이 열렬히 사랑했던 디자이너, 항상 아름답고 우아한 흰 옷을 입고서 ‘엘레강스’를 추구했던 사람, 누군지 아시나요? 바로 디자이너 ‘앙드레 김’입니다. 한국 최초의 남성디자이너였던 디자이너 앙드레 김의 수영복 패션쇼에 대해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한국 최초의 남성 디자이너 앙드레 김 사진 좌. 1964.12.09 앙드레 김 디자인 원피스사진 우. 1983.09.30 파격적이로 화려한 앙드레 김 패션쇼 1962년 최초의 남성디자이너 앙드레 김(본명 김봉남)이 등장합니다. 시작부터 이슈를 몰고 온 앙드레 김은 당대 최고 스타들의 옷을 만들면서 유명세를 얻었습니다. 이후 화려하면서 우아한 디자인으로 명성을 떨치며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1966년에 패션의 본고장 파리에서 패션쇼를 개최하기도 합니다. 앙드레 김 패션쇼 & 수영복 패션쇼 사진 좌. 1989.06.21 앙드레김 순백을 강조한 패션쇼사진 우. 1989.06.21 앙드레김 패션쇼의 평상복을 입은 모델들 사진 좌. 1989.06.21 앙드레김 패션쇼의 수영복 남여모델사진 우. 1989.06.21 앙드레김 패션쇼의 수영복 모델 앙드레 김의 의상은 화려한 자수를 이용해 더욱 고급스러운 느낌을 살렸습니다. 특히 화려한 컬러와 장식으로 당시 보수적이던 사회 분위기에 파격적인 스타일을 선보입니다. 1989년 당시 한국은 미스코리아의 파랑색 수영복조차 선정적이라고 지적받을 정도로 상당히 보수적이었는데요. 화려하고 과감한 색상과 라인의 수영복 패션쇼를 통해 한국의 패션산업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켰습니다. 이 패션쇼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고, 수영복 차림의 모델들을 보며 얼굴을 붉히기도 했습니다. 시대를 강타한 ‘앙드레 김’ 열풍 1989.06.21. 디자인 중인 앙드레김 앙드레 김의 디자인은 세계 유명인들이 사랑하는 의상이었습니다. 소프라노 성악가 조수미 씨나 마이클 잭슨 등 스타들의 의상도 많이 제작했습니다. 특히 2009년 3월 마이클잭슨이 재기를 위한 공식 기자회견에서도 앙드레 김의 의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그는 40여 년간 해외에서 패션쇼를 열면서 패션을 통해 우리나라 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는 민간외교관 역할을 했습니다. ‘패션계의 거장’이라 불린 앙드레 김은 2010년 10월 12일 타계하였고, 정부는 고인의 업적을 기리고자 문화예술계의 최고 등급 문화훈장인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습니다.
지금과 다른 듯 같은 '피서'의 모습 No.135 2017.07.24 지금과 다른 듯 같은 '피서'의 모습 연일 이어지는 폭염이 대한민국을 강타하고 있습니다. 더위를 피하기 위해 많은 분들이 여름휴가를 떠나고 있는데요. 과거부터 '피서'를 즐기는 사람들은 시원한 물놀이를 즐기기 위해 바다, 계곡, 수영장으로 향했습니다. 지금과 조금은 다른듯하지만 비슷한 그때 그 시절 여름 풍경을 모았습니다. 1981년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하는 인파 사진 좌. 1971년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하는 사람들사진 우. 1971년 물놀이 용품 구입 모습 요즘은 대형 ‘워터파크’와 ‘수영장’이 젊은이들이나 가족단위의 피서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는데요. 지금의 워터파크를 연상시키는 미끄럼틀이 설치된 야외 수영장의 모습과 수영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인상적입니다. 튜브 등 물놀이 용품을 구입하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해수욕장’과 ‘계곡’은 남녀노소가 모두 사랑하는 대표적인 여름 피서지였습니다. 파라솔과 해수욕을 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의 모습, 계곡의 시원한 그늘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고 차가운 물속에서 물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도 지금과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사진 좌. 1973년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사진 우. 2001년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 사진 좌. 1991년 계룡산 계곡에 올라온 피서객들사진 우. 1981년 계곡에서 물놀이를 즐기는 아이들 여러분은 올해 여름휴가지로 어떤 곳을 계획하셨나요? 더위를 이기는 물놀이도 좋지만 시원한 곳에서의 충분한 휴식과 수분섭취 등 온열질환에 대비하고, 안전사고 등에도 주의해 건강하고 즐거운 여름휴가가 되었으면 합니다.
텔레비전이 컬러로 바뀐 건 언제일까요? No.134 2017.06.29 텔레비전이 컬러로 바뀐 건 언제일까요? 텔레비전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발명품인 것 같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을 불러 모아 웃고 울게 하고, 세상의 소식을 빠르게 전해주었던 네모난 상자, 텔레비전의 변천사를 살펴볼까요? 1950년대 최초로 도입된 흑백텔레비전 사진 좌. 1966. 금성사 텔레비전사진 우. 1956.05.05 흑백텔레비전 모습 1950년대, 한국에 최초로 텔레비전이 도입되었습니다. 1966년 금성사(현재 LG전자)에서 VD-191를 생산하기 전까지 텔레비전은 주로 외국에서 수입하거나 미군 PX를 통해 유통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최초 텔레비전은 흑백 화면이었고, 리모콘도 없어 채널을 다이얼 형식으로 돌려야 했습니다.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던 텔레비전 사진 좌/우. 1966.05.21 모여서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사람들 당시 텔레비전은 매우 고가의 물건이었습니다. 서울 집값이 평당 5~10만원하던 시기에 국산 텔레비전 가격이 무려 7만원이나 했습니다. 그래서 한일 스포츠 경기나 인기 드라마가 방영되는 날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텔레비전이 있는 집으로 몰려들었습니다. 1980년 마침내 도입된 컬러텔레비전, 그리고 빠른 변화 사진 1. 1974 생산된 컬러 텔레비전들 사진 2. 1974 컬러 텔레비전을 점검하는 과정 사진 3. 2006.08.17. 생산중인 LCD TV 사진 4. 2016.01.11 삼성전자 TV 부스 후 1970년대 중반부터 드디어 한국 업체들도 컬러TV를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만 국내사정으로 인해 컬러텔레비전이 바로 유통되지는 않다가 약 10년 뒤인 1980년대에 들어서서야 마침내 유통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88서울올림픽을 맞아 컬러텔레비전은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대중화되었고 이후 급속도로 발전해 브라운관 텔레비전을 지나 현재 UHD 텔레비전으로 진화했습니다. 흑백으로 시작했지만 현재는 3D 영상을 지원하는 등 다양한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TV. 미래의 텔레비전은 또 어떤 모습으로 변신할지 궁금합니다.
그때 그시절 각종 미인대회 총망라! No.133 2017.06.16 그때 그시절 각종 미인대회 총망라! 미인대회는 여성의 권익 신장과 더불어 다양하게 변화해 왔습니다. 최근에는 당당하고 건강한 여성이 미인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죠. 그렇다면 미인대회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요? 이번에는 우리나라의 각종 미인대회 역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열린 미인대회 사진 좌. 1956. 이화여자대학교 5월의 여왕에 뽑힌 여성사진 우. 1956. 이화여자대학교 5월의 여왕 대관식 우리나라 최초의 미인대회는 1908년에 열린 이화여대의 메이퀸 선발대회입니다. 제24주년 개교기념 축제에서 창립자인 미국인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 부인에게 꽃을 엮어 만든 관과 함께 ‘메이퀸’이라는 칭호를 헌사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1978년 폐지될 때까지 ‘이화여대 메이퀸 선발대회’는 취재용 헬기까지 동원될 정도로 사람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미인대회의 꽃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사진 좌. 1957. 미스코리아 예선에 참가하는 여성들사진 우. 1958. 미스코리아 진선미에 뽑힌 여성들 우리나라 대표 미인대회인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는 한국일보와 코리아타임스의 주관으로 1957년 서울에서 처음으로 개최됐습니다. 1958년 제2회 대회에서는 서울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수많은 경찰기마대와 교통순찰차, 헌병차가 동원되어 결선대회에 참가한 미스코리아 후보자들이 시가행진을 하기도 했죠. 이후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는 한국을 대표하는 미인대회가 되었고, 입상자들은 한국의 미를 알리는 사절로 활동했습니다. 그 외 다양한 미인대회 사진 1. 1961. 제1회 전국민속미인 결선대회에 참가중인 여성들 사진 2. 1962. 전국 미스, 미스터 산업선발대회의 모습 사진 3. 1967. 제2회 미스태평양 한국대표 선발대회 시상식 사진 4. 1977. 제47회 춘향제에 참석한 여성들 이후 지방자치제가 본격적으로 실시되면서 전국에 각종 향토미인대회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외면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내면의 아름다움까지 살펴보는 미인대회를 통해 많은 스타배우들이 탄생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미인대회는 끼와 능력을 펼치는 등용문의 역할도 했었습니다. 이상으로 우리나라의 미인대회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았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사람들의 인식이 변하면서 미인대회는 조금씩 축소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과 끼를 펼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다양한 대회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그 안에서 새로운 분야의 멋진 여성들을 만나기를 기대해 봅니다.
전국노래자랑의 마스코트 ‘송해’ No.132 2017.06.09 전국노래자랑의 마스코트 ‘송해’ 매주 일요일 낮 12시가 되면 TV에서 볼 수 있는 익숙한 얼굴, 바로 전국노래자랑의 마스코트 '송해' 선생입니다. 1988년 처음으로 사회자 마이크를 잡은 이후 지금까지 쭉 전국노래자랑의 사회를 맡고 있습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전국노래자랑과 함께한 송해 선생도 원래 가수였습니다. 만능 엔터테이너로 유명했던 송해 선생 사진 좌. 1968.01.08. 월남 위문공연에서 코메디를 선보이는 송해.사진 우. 1971.04.10. 공익광고를 찍는 송해. 송해 선생은 1955년 창공악극단에서 가수로 정식 데뷔를 했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예능을 거쳐야 하는 악극단의 특징 덕분에 가수로서의 활동보다는 코메디언, 사회자, 영화배우 등 만능 엔터테이너로서 무대와 방송에서 활동했습니다. 노래자랑 사회자로 주목받는 송해 선생 사진 좌. 1971.10.23. 노래자랑에서 사회를 보는 송해.사진 우. 1970. 노래잔치 사회를 보는 송해. 70년대 이후 송해 선생은 주로 사회자로서 활동했습니다. TV속 방송이나 각종 행사 등 어디서든지 볼 수 있는 인기 사회자입니다. 특히 노래자랑 진행을 잘해서 노래자랑관련 대회나 프로그램이 있으면 꼭 진행을 맡았습니다. 88년 전국노래자랑과의 만남, 그리고 전설이 되다 사진 1. 1990.03.10. 전국노래자랑 사진 2. 2014.11.17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는 송해. 사진 3. 2014.11.17 대중문화 공로상을 받는 송해. 사진 4. 2017.06.01. 실버문화 패스티벌 홍보대사 위촉장을 받는 송해. 사회자로 꾸준히 활동하던 송해 선생은 마침내 1988년 전국노래자랑의 사회자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이때부터 송해 선생은 3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전국의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나눠주는 방송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14년 대중문화 대종상에서 공로상을 수여받았습니다. 현재도 송해 선생은 각종 문화행사나 축제의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CF를 찍는 등 91세의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죽을 때까지 전국노래자랑의 사회자를 맡겠다고 선언한 송해 선생. 이번 주말에는 오랜만에 TV를 켜서 송해 선생이 진행하는 전국노래자랑을 한번 시청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거리 이동 은행'을  이용해 보셨나요? No.131 2017.06.02 '거리 이동 은행'을 이용해 보셨나요? 요즘에는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로 누구나 손쉽게 은행 업무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에 저축을 하려면 반드시 은행에 가야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거리 이동 은행’입니다. 한때 많은 사람들이 ‘거리 이동 은행’을 이용했었는데요. 오늘은 ‘거리 이동 은행’이 있던, 그때 그 시절로 잠시 돌아가볼까요? 길거리에서 은행 업무를 보던 그 시절 사진 좌. 1993.02.03 거리에서 은행 업무를 보고 있는 상인과 행원들사진 우. 1993.02.03 전통시장에서 은행 업무를 보고 있는 상인과 행원들 ‘거리 이동 은행’은 정부의 저축증가정책에 맞춰 서민들의 금융이용활성화를 위해 도입되었습니다. 실제 은행원들이 고객을 직접 찾아가서 저축 등을 관리해주는 서비스였습니다. 하루 종일 가게나 노점에서 장사를 해야 하는 상인이나 은행에 가기 쉽지 않은 농촌이나 어촌 등에서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골목 구석구석, 집 앞까지 찾아가는 은행 서비스 사진 좌. 1993.02.03. 농촌으로 찾아가는 거리 이동 은행사진 우. 1993.02.03. 가게로 직접 찾아가는 거리 이동 은행 ‘거리 이동 은행’이 가지 못하는 곳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도시 외곽의 골목 구석구석, 쉴 틈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시장, 거기에 은행이 없던 농촌지역까지 직접 찾아가곤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거리 이동 은행’이 찾아오면 고이 모아두었던 돈을 저축하는 등 여러 가지 은행 업무를 보았습니다. 은행의 확산과 ATM기기 및 신용카드의 보급 사진 1. 1990.10.31. 은행에서 업무를 보는 남성 사진 2. 1986.01.01. 은행 업무를 보는 사람들 사진 3. 1988.04.01. ATM기기를 이용하는 여성 사진 4. 1988.05.05. 다양한 신용카드 이후 전국 곳곳에 은행 지점이 설치되면서 ‘거리 이동 은행’은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작은 공간으로도 설치가 가능하고 그곳에서 다양한 은행 업무를 볼 수 있는 ATM기기의 확산과 신용카드의 보급은 사람들이 보다 편리하게 은행업무를 볼 수 있게 했고, ‘거리 이동 은행’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어플만 설치하면 언제 어디서든지 은행 업무를 볼 수 있는 시대입니다. 최근 각 은행에서 ‘이동은행버스’라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비록 옛날 ‘거리 이동 은행’과는 모습이 약간 다르지만 오랜만에 옛 추억을 떠올리며 이용해보면 어떨까요?
스포츠 스타의 등용문 '전국소년체육대회' No.130 2017.05.26 스포츠 스타의 등용문 '전국소년체육대회' 매년 5월이 되면 전국의 청년들이 그 동안 쌓았던 실력을 뽐내는 자리가 열렸습니다. 전국으로 방송된 ‘전국소년체육대회’가 바로 그 무대입니다. 전국소년체육대회는 미래의 스포츠 스타를 미리 만나 볼 수 있는 축제의 장이기도 했습니다.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 나라도 튼튼! 전국소년체육대회 사진 좌. 1972.6.24. 제1회 전국스포츠소년대회 개회식사진 우. 1972.6.24. 농구시합 중 패스를 하려는 선수 1972년 6월 16일, 제1회 전국스포츠소년대회가 열렸습니다. 이 대회는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 나라도 튼튼’ 구호를 외치며 체육진흥의 목적으로 개최되었습니다. 첫 대회의 우승팀은 어디였을까요? 바로 충청남도 팀이었습니다. 우수한 국가대표 선수들이 배출되다 사진 좌. 1975.06.07. 전국소년체육대회로 이름을 바꾼 제4회 대회사진 우. 1985.05.21. 경기 중인 육상선수들 전국스포츠소년대회는 1975년 제4회 대회부터 전국소년체육대회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그 뒤 해를 거듭할수록 선수들의 기록과 수준이 향상되었고, 소년체육대회 출신의 선수들은 우수한 국가대표 선수로 성장했습니다. 덕분에 국제대회에서 우리 스포츠의 위상도 높아졌습니다. 대한민국 스포츠의 내일을 약속하다 사진 1. 1994.05.28. 다시 열린 전국소년체육대회 사진 2. 1993.05.29. 경기 중인 육상선수들 사진 3. 1993.05.28 하키 경기 중인 선수들 사진 4. 1993.05.29. 멀리뛰기를 하는 선수 1989년부터 1991년도까지 잠시 폐지되었던 전국소년체육대회는 1992년 6월 13일 다시 부활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박찬호와 박지성, 김연아, 박태환과 같은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들이 이 대회를 통해서 실력을 키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올해 전국소년체육대회는 5월 27일에 1회 대회 우승팀인 충청남도에서 개최합니다. 대한민국 스포츠의 내일을 약속하는 전국소년체육대회! 이번 주말에 가족들과 함께 미래의 스포츠 스타를 만나러 가볼까요?
소독차가 나타나면 아이들이 뛰어나왔다! No.129 2017.05.19 소독차가 나타나면 아이들이 뛰어나왔다! 어린 시절, 뿌연 연기와 함께 '부웅~~'소리가 들리면 반사적으로 골목으로 뛰어나간 기억은 누구나 있을 것입니다. 여름철이 되면 꼭 찾아오는소독차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특유의 소리를 내며 골목을 누비던 소독차를 뒤따라가는 것은 아이들의 즐거운 놀이 중 하나였습니다. 아이들은 소독약 연기인 줄을 알면서도 매캐한 연기를 마시며 끝까지 따라가곤 했었습니다. 아이들의 슈퍼스타였던 소독차 사진 좌. 1999.06.25. 방역중인 소독차를 따라가는 아이들사진 우. 1981.04.23. 길거리에서 방역중인 소독차와 아이들 당시 아이들에게 소독차는 신기하고 재미있는 놀꺼리였지만 소독차는‘방역’이라는 매우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위생상태가 개선된 현재는 전염병과 해충의 위험성이 낮아졌지만, 1980년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전염병과 해충은 유행병을 불러오는 주요 경계대상이었습니다. 전염병, 해충과의 전쟁을 치르던 60년대 사진 좌. 1967.06.23. 거리를 다니며 소독약을 뿌리고 있는 남성사진 우. 1967.06.23. 거리를 돌아다니며 연막 소독하고 있는 소독차 경제를 재건하던 60년대, 모든 기반시설이 파괴되고 먹을 것도 부족하던 그때 전염병과 해충은 큰 위협이었습니다. 광범위하게 방역이 가능했던 소독차는 효자노릇을 톡톡히 했습니다. 위생환경 개선과 환경오염문제로 사라지는 소독차 사진 1. 1972.12.16. 바퀴벌레를 퇴치하기위해 소독약을 뿌리는 남성 사진 2. 1961.04.09. 도량을 정비하는 남성 사진 3. 1999.06.25. 소독액을 분무하는 남성 사진 4. 2000.06.30. 외곽지역에서 연무소독기를 이용해 방역하는 남성 정부는 바퀴벌레 퇴치 운동이나 도량 및 하수도 개량사업 같은 보건정책을 꾸준히 추진했습니다. 덕분에 경제성장과 맞물려 위생환경이 빠르게 개선되었지만 덩달아 소독차의 효율성 문제가 지적되었습니다. 소독차의 소독연기는 허공으로 흩어지기 때문에 그 효과가 적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90년대 이후 소독차의 운영이 점차 줄기 시작하더니, 소독연기의 환경오염 문제까지 일자 보기가 힘들어졌습니다. 소독차가 오면 '방구차'라고 부르며 뒤를 쫓아가던 어린 시절의 추억. 이제는 정말 추억으로만 남게 되는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스마트폰 전에는 어떤 휴대전화를 사용했을까? No.128 2017.05.12 스마트폰 전에는 어떤 휴대전화를 사용했을까? 요즘은 국민 4명중 3명은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스마트폰은 현대인들의 생활필수품입니다. 1983년 최초의 상용 휴대전화 ‘다이나택’이 발매되었을 때 휴대전화를 들고 다니던 것이 부의 상징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30여년 만에 엄청난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휴대전화의 모습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벽돌처럼 네모나게 생겼던 초창기 휴대전화 사진 좌. 1994.11.09. 길거리에서 통화 중인 남성사진 우. 1994.11.09. 길거리에서 통화 중인 남성 한국 휴대전화의 역사는 1984년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이 휴대전화 서비스를 개시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휴대전화는 벽돌처럼 네모난 모양으로 벽돌폰 또는 박스폰이라고도 불렸습니다. 대당 이용가격이 무려 400만원으로 현재 돈의 가치로 따지면 2000만원을 넘기는 고가 제품이었습니다. 하지만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1만 명이 넘는 사람이 회원가입을 했습니다. 빠르게 소형화되는 휴대전화 사진 좌. 1998. 1990년대 휴대전화를 사용 중인 젊은 여성사진 우. 1998. 1990년대 휴대전화를 사용 중인 중년 남성 휴대전화는 빠르게 발전했습니다. 과거 거대했던 휴대전화의 크기와 디자인은 1990년대 중반을 지나 작고 가볍게 바뀌었습니다. 이때를 기점으로 휴대전화가 대중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거리 위 사람들은 걸어 다니며 안테나를 뽑고 폴더를 펼쳐 휴대전화로 전화를 하곤 했습니다. 더 작게! 더 다양한 기능을! 사진 좌. 2003.07.09. 삼성 코엑스 앞에서 통화 중인 남성 사진 우. 2004.02.06. 삼성전자 사업장에서 생산되는 휴대전화 2000년대에 들어 휴대전화는 더욱 혁신된 모습으로 발전했습니다. 점점 더 작아지고 다양한 기능이 추가되었습니다. 이때부터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고, 문자와 게임, 3G망을 통해 인터넷을 이용 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 스마트폰으로는 너무나 당연한 기능들이지만, 당시에는 정말 혁신적인 기능이었습니다. 이후 휴대전화는 2007년 애플사의 아이폰이 발매되면서 스마트폰으로 발전했습니다. 휴대전화가 손 안의 컴퓨터 역할을 하며, 데스크탑 컴퓨터의 아성을 따라잡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이용해 더 이상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은행 업무부터 게임, 사진촬영, 동영상 재생 및 촬영, 문자, 업무 등 다양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휴대전화의 발전에 따라 우리의 삶 역시 많이 변화했습니다. 앞으로 휴대전화에 어떤 기능들이 더 들어가고, 그로 인해 우리의 미래 일상도 어떻게 변화할지 궁금해집니다.
전통 혼례부터 재능기부 결혼식까지, 결혼 변천사 No.127 2017.05.04 전통 혼례부터 재능기부 결혼식까지, 결혼 변천사 5월하면 여러분은 무엇이 떠오르나요?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등 다양한 가족 행사가 있어 ‘가정의 달’이라고도 불립니다. 그만큼 따뜻한 날씨와 함께 이 시기에는 결혼을 하는 커플들도 많습니다. ‘5월의 신부’가 되고 싶은 사람들이 많다보니 이 시기는 웨딩 관련 사업도 활기를 띄는 달이기도 합니다. 신부의 웨딩드레스는 하얀 순백색으로 순결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터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을 했을까요? 전통 혼례가 아닌 신식 결혼식 사진 좌. 1958.09.26 한국의 전통 혼레식사진 우. 1987.11.18 이웅희 문화공보부 장관 결혼식 전통 혼례복이 아닌 웨딩드레스를 입기 시작한 시기는 약 1890년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전파가 우리나라에서 서구식 결혼식을 올리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 결혼식은 1890년 정동 교회에서 교회 신도끼리 치른 결혼식이었다고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후 본격적으로 서양식의 웨딩드레스를 입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에 들어서였습니다. 이 때 베일, 들러리와 화동도 출현했습니다. 합동결혼식 문화 사진 좌. 1962.03.27. 귀순용사 합동결혼식사진 우. 1984.06.01. 전통 혼례 합동결혼식 예로부터 결혼식을 올리는데는 많은 비용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합동결혼식을 통해 결혼 비용을 아끼기도 했는데, 1962년에는 귀순용사 즉, 새터민들의 합동결혼식을 개최했습니다. 마을 단위로 합동결혼식을 진행하기도 했었습니다. 에코 웨딩, 재능기부 결혼 등 다양한 결혼식의 모습 사진 1. 2014.11.01. 에코 웨딩 결혼식, 부케를 던지는 신부 사진 2. 2014.11.01. 에코 웨딩 결혼식에 쓰인 부케 사진 3. 2014.12.17. 재능기부 결혼식 현장 사진 4. 2014.12.17. 재능기부 결혼식, 메이크업 중인 신부 이후 결혼식은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해왔습니다. 결혼에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면서 요즘은 오히려 ‘작은 결혼식’ 및 ‘셀프 웨딩’ 등이 젊은 세대에 유행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환경까지 생각하는 ‘에코 결혼식’까지 등장했습니다. 보여주기식의 호화 결혼식을 지양하고 드레스와 부케, 청첩장, 꽃장식까지 저렴한 비용에 지속가능한 친환경 소재를 사용하는 결혼식입니다. 또한, 결혼식을 올리기 어려운 신혼부부들을 위해 발 벗고 나서서 결혼식을 도와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신이 가진 재능을 활용해서 작지만 평생 기억에 남는 결혼식을 꾸며주는 것입니다. 재능기부센터에서 도와주는 결혼식은 축가부터, 메이크업, 드레스 모두를 지역민들의 재능기부를 통해 완성됩니다. 일생에 단 한 번뿐인 결혼식, 우리나라에서는 좀 더 특별하고 아름다운 문화로 자리잡아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치러진 국제경기는 뭐가 있을까? No.126 2017.05.04 우리나라에서 치러진 국제경기는 뭐가 있을까?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대회가 바로 내년으로 다가왔습니다. 유치부터 개최까지 모든 국민이 한마음 한뜻을 모아 기원했던 만큼 성공적인 올림픽으로 세계인들의 기억 속에 남길 바라고 있습니다. 평창 동계올림픽 전에도 우리나라에서 치러진 국제스포츠대회는 그 수가 적지 않습니다. 그때 그 시절, 우리가 함께 웃고 울며 즐겼던 국제경기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서울에서 열린 국제 경기 사진 좌. 1980.08.27 서울에서 열린 국제경기 제1회 국제 오픈 탁구대회(잠실종합체육관)사진 우. 1982.03.28 서울 국제 마라톤 대회 참가자들 1980년 8월에는 서울에서 제1회 국제 오픈 탁구대회가 열렸었습니다. 서울로 국제 탁구 연맹 회원국을 초청하여 치러진 한국 탁구 협회 주최의 국제 경기였습니다. 당시 제35회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에 북한측의 농간으로 한국이 참가하지 못한 것을 계기로 스포츠의 정치적 이용을 방지하기 위해 창설한 대회였습니다. 서울 국제 마라톤 대회 역시 한국 육상 연맹에서 주최한 국제 경기로, 1982년 3월 첫 대회가 치러졌었습니다. 당시 30개국의 초청선수 50명을 포함해서 한국 선수 및 일반 선수 1천 명, 주한 외국인, 외국 일반 선수 등 많은 이들이 참가했었습니다. 처음에는 서울 시내를 관통하는 코스로 짜였었지만, 교통대란을 우려하여 강변도로를 달리는 코스로 수정되기도 했습니다. 가슴이 뜨거웠던 88올림픽과 2002 한일 월드컵 사진 1. 1988.09.17 88올림픽 올림픽기 입장 사진 2. 1988.09.17 88올림픽대회 성화점화 사진 2. 2002.05.31 2002 한일월드컵축구대회 개막행사사진 2. 2002.06.10 서울시청 앞 월드컵 응원인파 대한민국 국민으로 국제 경기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무래도 이 두 가지 대회가 아닐까요? 1988년에 치러졌던 ‘88 서울 올림픽’과 2002년에 치러졌던 ‘한일 월드컵 축구 대회’.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는 것이 자랑스럽고 우리나라가 한 단계 더 발전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던 국제 경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2002년 한일 월드컵 축구 대회에서는 일명 ‘붉은 악마’라 불리는 응원단의 등장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규모 응원 문화가 전 세계에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세계의 스포츠인들 모여라~ 사진 좌. 1997.01.24 1997 무주·전주 동계유니버시아드 대회 개막식 사진 우. 2002.10.12 제14회 부산 아시아 경기 대회 폐막식 1997년 전라북도 무주와 전주에서는 동계유니버시아드 대회가 개최됐습니다. 유니버시아드 대회는 세계의 대학생들이 우호와 친선을 도모할 목적으로 국제대학스포츠연맹(FISU)이 2년마다 주최하는 범세계적 대학운동경기입니다. 빙상, 스키, 바이애슬론, 아이스하키 4개 종목에 50개국, 2,6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우리나라는 종합순위 6위를 차지했었습니다. 아시안 게임은 우리나라에서 1986년 서울 하계 아시안 게임, 1999년 평창 동계 아시안 게임, 2002년 부산 하계 아시안 게임, 2014년 인천 하계 아시안 게임까지 총 4번 개최됐습니다. 지금까지 꽤 많은 국제 경기를 개최해냈던 우리나라. 내년에 있을 평창 동계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기대해봅니다.
공무원 공채시험 합격수기 공모 나는 이렇게 합격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