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국 전 마지막 임정 청사서 눈물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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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그 길을 가다 ⑥] 21세기 오늘을 사는 당신에게 임시정부는 어떤 의미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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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된 조국으로 돌아가기 전 1945년 11월, 임시정부 요인들은 중국에서의 마지막 임시정부 청사가 있는 중경(충칭)에서 마지막 단체사진을 찍었다. 74년이 흐른 후 그들이 섰던 바로 그 계단 앞에 서서 우리는 애국가를 4절까지 합창했다.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이 구절이 이토록 애달팠던가! 4절까지 부르는 동안 애써 눈물을 꾹꾹 참아냈다.당시 임정 요인들의 마음을 다 헤아리기에는 하염없이 짧은 합창이 끝나고 여기저기에서 눈물을 훔치는 손짓들이 보이더니 끝끝내 눈물이 터져 나왔다. 74년의 시간을 초월해 교감의 마음이 이 공간을 통해 강렬히 전해져왔기 때문일 터였다. 임시정부 요인들이 1945년 환국 전 마지막 사진을 찍었던 중경 임시정부 청사에서 우리는 애국가를 4절까지 불렀다.21세기의 대한민국 속에 살면서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민주라는 가치가 공기마냥 자연스러워 자주 잊고 산다. 해방, 독립 역사책 속에서나, 사전 속에서나 존재하는 말인 듯했다. 그러나 불과 한 세기 전, 이 두 글자를 이 땅에 가져오기 위해 단 한 번뿐인 삶을 산화한 숱한 생애가 있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만든 그날들이 있었다. 5박 6일 간의 임시정부 현장탐방은 시시각각 그 의미를 불어넣어 주는 시간이었다. 100년 전, 대한민국의 근간을 만들기 시작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21세기를 살아가는우리들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 의미를 채우고 정리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재개발 중인 아파트촌과 주택가 한가운데 위치한 중경 임시정부 청사(연화지). 먼 이국땅, 한글로 또박또박 적혀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현판이 그저 반갑고 고맙다. 중경 임시정부 청사(연화지)는 계속 도시개발 중인 아파트촌과 주택지 사이에 덩그러니 자리해 있다. 까마득하게 올려다 보이는 아파트 사이, 헐려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그 자리에 복원되어 당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란 이름을 걸고 있다. 중국에서의 마지막 임시정부 시절인 중경 시기는중국 국민당 정부와의 협조 속에 그래도 살림이 좋았던 때였다.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한 후 중경 청사는 여관, 학교, 주택 등으로 사용되다 1994년 중경시와 협정을 맺고 복원을 시작했다. 현재 이곳 청사는 한국 독립운동사를 연구하고 전시하는 박물관으로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중경에 도착하기 전, 우리 일행은 가흥(자싱)과 항주(항저우)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의 거주지를 거쳐 왔다. 정정화 선생은 장강일기에서 중국에서 손꼽히는 4주를 다 둘러보았는데 가는 곳마다 피난 짐 보따리를 끼고 있어 어디서 먹고 어디서 살고 하는 따위를 따질 겨를도 없이, 나라를 잃고 쫓겨 다니는 몸이라 이름난 고장에 들를 때마다 더욱 가슴이 아팠다고 적고 있다. 가흥에 위치한 임시정부 요인 가족들의 거주지. 이동녕 선생 가족의 방. 가흥의 임시정부 요인들 거주지는 방으로 나뉘었되 사실상 고스란히 통해 있는 공간을 여러 가족이 나눠썼다. 중국식 나무 탁자 위에 요인들의 가족사진이 한 점씩 놓여 있다. 나라의 독립에 헌신한 투철한 독립운동가였으나 결국 한 사람이었던 생애가 이곳에 남아 있었다. 조국이 무엇인지, 왜 노심초사 도망을 다녀야 하는지 알 수 없었을 어린 자녀들을 이끌고 고된 나날을 이어가야 했을 누군가들의 삶이 이곳을 스쳐 지나갔다. 가흥 시절 임시정부 요인 가족들의 단체 사진. 이동녕, 김구, 이시영 선생들이 보인다. 중경에서 우리는 폐공장 부지를 찾았다. 이곳 귀퉁이에 한인거주옛터라고 쓰인 표지석이 놓여 있었다. 중경으로 이동해온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가족들이 1940년부터 1945년까지 거주했던 곳이란 설명이 표지석 뒷면에 적혀 있었다. 화상산 한인묘지는 그저 짐작으로 그 흔적만을 찾을 뿐이었다. 임정 요인이던 송병조, 차리석을 비롯해 김구 선생의 어머니인 곽낙원과 장남인 김인 등의 묘지가 있었던 곳이다. 누군가의 삶과 죽음이 새겨지고 잊혔던 흔적 앞에 숙연함이 찾아왔다. 중경 한인거주옛터를 알려주는 표지석. 5박 6일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일정을 뒤로 하고도 마음의 갈급함을 지워낼 수가 없어 마지막 임시정부였던 서울의 경교장을 찾았다. 무수히도 이 근처를 지나다녔으면서도 왜 그동안 한 번도 찾지 않았을까? 죄스러움이 앞섰다. 온전한 대한민국을 물려주기 위해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통일운동을 이어간 임시정부 요인들의 마지막 투쟁이 경교장에 기록되어 있었다. 마지막 임시정부 청사였던 서울 경교장. 혼자서는 미처 정리하지 못한 생각은 친구들과의 대화 속에서 답을 찾아가기도 했다. 30대 직장인인 박혜연 씨는 그동안 임시정부에 대해 교과서 이상의 지식과 감정을 갖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100주년을 맞은 올해 임시정부에 관한 책을 몇 권 읽게 되며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고입을 뗐다. 그는 불과 반세기 전의 일이다. 임시정부를 계승했다는 발자취를 책으로 더듬으며 이들의 후손이란 생각이 정말 강해졌다. 내게 임시정부는 희망이란 두 글자로 정리하고 싶다. 독립된 조국에서 편안히 살아가고 있지만 대,내외적으로 위기는 계속 있지 않나.임시정부의뜻을 받들어 그런 위기를 잘 헤쳐나갈수도 있을 것 같다는 희망, 그런 희망 말이다 라고 말했다.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가흥으로 옮겼던 김구 선생 피난처. 20대 대학생 김민주 씨는 올해 처음 현충원 임정묘역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찾았다. 서울에 살고 있는데도 처음 갔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오늘을 있게 해준 선열들에게 빚진 마음과 죄책감이 생각보다 컸다. 학교에서 처음으로 근현대사 수업을 신청했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올해,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책임감이 크게 느껴져서였다고 전했다. 그는 고등학교 때까지 근현대사는 단지 암기하는 과목에 가까웠다. 그러다 지금은 스스로 선택해 공부하며 조금은 마음으로 역사를 느끼게 된 기분이다. 임시정부가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넘어 이들이 만들기 위해 노력한 대한민국에서 지금 살고 있는 기분이랄까? 앞으로 더 공부하고 이분들이 해주신 만큼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앞선다고 말을 맺었다. 가흥 김구 선생 피난처 앞의 풍경. 선생은 이곳에서 일제 감시를 피해 수로로 이동하곤 했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올해, 많은 이들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역사 속의 과거가 아닌 또 다른 100년의 시작, 그 다짐과 희망의 미래이기도 하다. 이들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5박 6일 중국 현장을 돌아봤던 필자에게도 올해의 3월 1일, 4월 11일 임시정부 수립일은 이전과는 결코 같을 수 없는 무게감과 책임감으로 다가온다. 더불어 새로운 미래라는 이름으로도. 선열들이 만든 자랑스러운 역사, 그리고 대한민국이라는 숭고한 가치! 공기마냥 자연스러우나 한없이 묵직한 그 존재감을 잊지 않으며 우리가 새로이 앞으로의 100년을 써내려가보면 어떨까? 자랑스러운 선열들의 후손으로서! 정책기자단|진윤지ardentmithr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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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기자 진윤지
2019.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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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알았더라면 땅을 치진 않았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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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보험은 질병이나 부상으로 인해 발생한 고액의 진료비로 가계에 과도한 부담이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질병이나 부상으로 일을 쉬어야 하는데 병원비까지 많이 나오면 얼마나 힘들까요? 국민들이 매월 보험료를 내고국민건강보험공단이 이를 관리, 운영하다가 필요할 때 보험금을 지급합니다. 건강보험에 가입한 다수가 서로 위험을 분담하고 필요한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사회보장제도입니다.건강보험료 청구서를 받아든 필자.필자는 현재 건강보험 지역가입자로 매월 일정액의 보험료를 납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건강보험공단에서 마련한 건강보험 직장가입자 임의계속 가입제도가 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왜 이런 제도가 있다는 걸 몰랐을까 하면서 많이아쉬워했습니다. 직장을 그만두고 고정적인 수입이 줄어들었을 때가 생각납니다. 처음엔 남편 명의의 건강보험 피부양자로 들어갔습니다.퇴직한 뒤 두 달 지나 불규칙하게나마 수입이 생기니 남편 명의의 피부양자에서 지역가입자로 전환돼건강보험에 자동 가입됐습니다. 지역가입자는 직장가입자보다 보험료를 더 많이 내야했습니다. 재산에 소득까지 더해서 보험료가 산정됐기 때문입니다.건강보험료 산정 안내.건강보험 직장가입자 임의계속 가입제도는 2013년 5월에 등장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실직이나 은퇴로 직장에서 물러나 소득 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건강보험료를 내는 것도 경제적으로 큰 부담입니다. 직장가입자에서 지역가입자로 자격이 바뀌면서 건보료가 늘어나는실직자나 은퇴자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려는 취지에서 생겼습니다.퇴직 이전 1년 이상 건강보험 직장가입자의 자격을 유지한 사람이 이 제도에 가입하면 직장가입자 자격을 3년간(36개월) 유지하면서 건강보험료의 50%만 부담하면서 계속해서 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2018년부터 24개월에서 36개월로 늘어났습니다.건강보험공단은 지난9일 건강보험 직장가입자 임의계속 가입제도를 이용해 직장에 다닐 때처럼 직장보험료를 내는 임의계속 가입자가 2018년 12월 말 기준으로 16만8565명이 있다고발표했습니다.예상 외로 많은 숫자입니다. 퇴직이나 실직 후에도 건강보험 직장가입자 자격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건보료의 50%만 부담해도 동일한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고정 소득이 없는 상황에서 지역가입자로 자격이 바뀌면서 건보료가 갑자기 올라 생활고에 시달리는 상황도 피할 수 있습니다. 병원 수납창구.(사진=저작권자(c)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필자 주변에 은퇴를 앞둔 지인들이 많습니다. 그 분들이 건강보험 직장가입자 임의계속 가입제도를 알고 있다면 가계에 도움이 되리라 확신합니다.건강보험 직장가입자 임의계속 가입제도 적용을 받으려면 퇴직이나 실직한 뒤지역가입자가 된 이후 최초로 받은 지역보험료 고지서의 납부기한으로부터 2개월 이내에 공단에 신청하여야 합니다. 건강보험공단 관계자는지사를 방문하거나 팩스 또는 우편으로 신청이 가능하나, 소득이나 재산 수준 등에 따라 보험료가 달라질 수 있으므로 가급적이면 관할 지사를 방문하여 상담을 받은 후 신청할 것을 권한다 라고 말했습니다.아래의 링크에서 관할 지사를 확인하세요.http://www.nhis.or.kr/menu/retriveMenuSet.xx?menuId=G4000 정책기자단|윤혜숙geowins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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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기자 윤혜숙
2019.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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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에서 만난 여성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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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3월 30일, 중국 중경(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백범 김구를 포함한 여러 임시정부 위원들이 새벽까지 깨어 있습니다.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양우조-최선화 부부의 둘째 아이 출산이 임박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고국의 독립을 열망하던 그들은 희망찬 미래를 짊어질 아이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립니다. 하지만 곧 세상 밖으로 나온 아기가 여자아이인걸 알자, 모두 실망합니다위는 양우조-최선화 부부가 딸 제시와 제니를 양육하며 중국 임시정부의 일상를 써낸 제시의 일기의 한 대목입니다. 당시 임시정부 요인들에게는 미래의 독립투사 한 명이 아쉬웠다고 하는데요. 여성이 독립투사가 되지 못할 이유는 무엇이고, 독립운동 앞에 성별이 중요하겠냐마는, 이 일화에서 당대 사회는 여성보다 남성이 독립운동으로 뜻을 펼치기가 더 원활한 환경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성 독립운동가의 삶은 어땠을까요. 제시의 일기.(출처=교보문고) 유관순 열사 외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홍보와 연구가 최근 눈에 띄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 다들 아시죠. 저 역시 그러한 긍정적인 변화를 좇아서 이번 중국 내 임시정부 탐방에서 여성 독립운동가의 행적을 눈에 불을 켜고 찾아 기록하기로 다짐했습니다. 약 백 년 전 독립운동가들의 거처였던 임시정부의 거주지와 청사를 둘러보면서, 이곳에 누가 있었고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사료를 바탕으로 한 안내문과 함께 동행한 박광일 여행작가의 설명으로알 수 있었는데요. 그런데 어라,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내용은 생각보다 그 비중이 너무 적었습니다.탐방 3일차가 되던 날 항저우에서, 동행하신 박광일 작가에게 물었습니다. 작가님, 임정(임시정부)에 여성은 많이 없었나요?작가님의첫마디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항상 있었죠.여성독립운동가, 미래를 여는 100년의 기억 개막식에서 참석자들이 강애란 작가의 여성독립운동가 시리즈 작품을 둘러보고 있다.(사진=저작권자(c)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여성은, 항상 있었다그렇습니다. 임시정부에 여성은 항상 있었습니다. 독립운동사 전체를 봐도 여성은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혹자는 독립운동가 남자가 만 명이면 여자도 만 명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현재 독립유공자 1만5180명 중 여성은 357명에 불과하며, 116명은 최근 5년 사이 추가된 인원입니다.남성보다 여성이 적었음을 감안해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다른 분도 비슷한 의문을 가지셨는지, 탐방 3일차 토크콘서트에서 여성들의행적이 궁금하다는 질문이 있었는데요. 이날 토크콘서트에 참석한 최태성 강사는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연구가 많이 안 되어 있음은 반성할 부분이라며, 그나마 최근 기울어진 운동장이 평평해지고 있다고 여러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소개했습니다.토크콘서트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최태성 강사.여성은 일본과 싸우고, 남성과 싸웠다다시, 임시정부에 여성은 항상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소수였습니다. 그렇다면 여성은 왜 적었을까요. 이유는 임정의 문제가 아니라 1920년대 한국 사회에 있습니다. 봉건의 잔재가 지금도 남아 있는 사회인데 그 때는 더 심했을 수밖에요. 독립운동이 아니라 바깥일 자체가 남성의 영역이던 시대입니다. 이번 탐방을 함께 한 박광일 작가와 최태성 강사는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말씀해 주셨습니다.당대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둘과 싸웠다. 일본과 싸우고, 남성(봉건제)과 싸웠다.남성이 100만큼 했다면 여성은 300만큼 해야 임시정부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박광일 작가 여성은 이중고, 삼중고를 겪었다는 점이죠. 밖에 나가서 의병활동을 하든 광복군 훈련을 하든, 집에 오면 밥을 하고 빨래를 해야 해요. 아이들을 키우고 시부모 봉양에 농사까지 지어야 돼요. 조선의 딸, 총을 들다 작가 정운현 여성들은 가부장제와 사회, 경제적 불평등으로 이중삼중의 차별을 당하면서도 불굴의 의지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여성의 독립운동은 더 깊숙이 묻혀왔다. 문재인 대통령, 2018년 광복절 경축사에서여성 독립운동가들의 모습을 형상화 한 조각품.(사진=저작권자(c)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그런데, 계속 싸웠다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하는 사실은, 밥을 하고 빨래를 하면서도 여성은 독립운동의 주체가 되어 왔다는 사실입니다. 20년 넘게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발굴해 온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 소장은 여성은 남성들의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해주는 사람들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오늘날과 다르게 남녀 구분 없이 뛰어들고 독려했던독립운동이었다고 말합니다.그러니까 분명히 존재하는 가부장 제도 아래서도 한계에 봉착하지 않고 오히려 뛰어 넘어, 더 열심히 싸웠다는 것이죠. 처음으로 여성들이 무엇의 주체가 된 순간이 아니었을까요.이번 중국 내 임시정부 탐방에서 만난 세 분의 여성을 소개합니다. 항저우 청사에 있던 사진.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수당 정정화.임시정부 내 독립운동가들의 당시 생활상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소중한 기록으로 양우조, 최선화의 제시의 일기, 김구의 백범일지와 함께 정정화의 장강일기가 있습니다.정정화 선생은 임시정부 27년 역사의 산 증인이자 정말 많은 역할을 해낸 슈퍼우먼이라고 소개하면 될 것 같은데요. 엄항섭 일가와 이동녕 선생, 백범의 가족을 돌보고 뒷바라지하며 헌신했을뿐만 아니라 임정 요원들의 부상을 돌보고 임종을 지켰습니다. 또한 임시정부 내 아이들을 가르쳤고, 한국혁명여성동맹과 한국애국부인회 등의 여성단체에서 활약했습니다.역시 항저우 청사에 있던 사진. 한인애국단 소속이었던 김의한 선생이 정정화 선생의 남편이기도 하다.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그녀가 국내로 밀파되어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고 전대 깊숙이 숨겨 중국으로 귀환하기를 여섯 번. 당연히 일본은 그녀를 잡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세 번째 귀국 때는 일본 경찰에게 들켜 체포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가 무사히 여섯 번 중국과 우리나라를 왕복할 수 있었던 것은 독립운동가 최석순이 일본인 순사 나카무라로 위장해서 도움을 주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최태성 강사가소개한 여성 독립운동가이자, 백범 김구의 비서와도 같았던요인으로 이화림 선생이 있습니다. 25살에 상하이로 떠나 한인애국단에서 무술을 배웠고, 나물장사, 빨래, 수놓기 등을 하면서 임시정부에 자금를 벌어다 주었을 뿐 아니라 틈틈이 일본 밀정 처단까지 했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윤봉길 의거 전날 부부로 가장해 함께 답사했으며 이봉창 의사의 거사 때도 도움을 주었죠. 그러나 김구의 만류를 뿌리치고 사회주의 노선을 걷게 되면서 백범일지에서 그녀의 이름이 지워집니다. 백범 김구의 또다른 조력자로는 운하를 돌며 일제를 따돌렸던 주애보 선생이 있습니다. 주애보(朱愛寶, 주아이바오)는 임시정부 요인은 아니고, 김구 선생의 피난을 도왔던 중국인 여성입니다. 1933년 여름부터 다섯 해 가까이 부부로 위장하여 선상에서 함께 생활했습니다. 다시 못 만날 줄 모르고 송별 시에 여비 100원 밖에 더 주지 못했던 일이 후회된다고 백범일지에 적혀진 바 있습니다.가흥 김구 피난처에서 찾을 수 있었던 그녀의 공로. 1919년 4월 11일 임시정부가 수립되던 날, 임시헌장 제3조에는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하다가 적혔습니다. 그러나 위에 소개한 양우조 부부의 출산 당시 일화처럼, 평등과 자유의 가치가 더없이 소중했던 그 때에도 헌법과 현실적인 인식 사이에는 간격이 있었던 것이죠. 다행인 것은 임정 수립 100주년을 맞아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행사나 각종 전시가 어느 때보다 활발하다는 것입니다. 관심의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가 더 열심히 기억하고 쓰고 이야기하면 좋겠습니다. 정책기자단|김소희hssholet@naver.com 저는 하고 싶은 걸 어떻게 다 하고 살 수 있을지가 고민이에요. www.sohe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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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기자 김소희
2019.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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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속 김구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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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하면 백범 김구 선생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임시정부=김구 라는 등식이 성립할 정도다.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중국 내 임시정부 탐방에 대한민국 정책기자단 일원으로 참여했다. 임시정부의 산증인이라 할 수 있는 백범의 흔적이 궁금했다. 백범일지는 이미 전부터 읽어왔던 터. 다시 백범일지를 손에 들었다. 백범일지 속 흔적을 찾아 중국 임시정부 탐방에 나섰다.백범일지. 백범일지는 광복 후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국사원, 1947년)라는 표제로 첫 출간됐다. 하지만 원본을 현대문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친필 백범일지와는 그 내용과 표기 방법, 서술 형식이 다른 판본이 됐다. 이후 1994년 백범의 둘째 아들 고(故)김신 장군이 친필 원본을 공개하고 친필을 원색 영인한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집문당)가 간행되면서 친필 원본이 일반 독자들에게 알려지게 됐다. 다른 위원들은 거의 다 가권이 있었으나 나는 아이들 둘도 다 본국 어머니께로 돌려보낸 뒤라 홑몸이었다. 그래서 나는 임시정부 정청에서 자고 돈벌이 직업을 가진 동포의 집으로 이집 저집 돌아다니면서 얻어먹었다. 동포의 직업이라 하면 전차 회사의 차표 검사원인 인스펙터가 제일 많은 직업이어서 70명 가량 되었다. 나는 이들의 집으로 다니며 아침과 저녁을 빌어먹는 것이니 거지 중에는 상거지였다. 다들 내 처지를 잘 알므로 누구나 내게 미운 밥은 아니 주었다고 믿는다 (백범일지 중)상해 임정 청사 내 김구 선생 집무실.(백범일지 상권 집필 장소)54세 때 집필한 백범일지(상권, 1929년)는 영경방(융칭팡, 임시정부 요인 가족 거처)에서 짧은 가정생활 밖에 나누지 못한 두 어린 아들(인과 신, 11세, 7세)에게 아비의 걸어 온 길을 알리는 유서로 쓴 글이다.지금은 가장 서구적인 모습으로 변했지만 1920년대 이곳 영경방에는 임시정부 요인의 숙소가 있었다. 백범도 영경방에서 모친 곽낙원과 아내 최준례 그리고 두 아들과 살았다. 이곳에서 둘째 신을 얻었지만 아내를 잃었다.김구 모친과 아들 침실. 탁자 위에 놓인 가족 사진. 사별한 아내 최준례의 모습이 없다.서대문 감옥에서 청소를 하면서 우리나라가 독립하여 정부가 생기면 그 집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는 일을 하다가 죽게 해달라고 기도를 한 적이 있었소. 그래서 나의 호를 백범이라고 고쳤던 것이니 내게는 문지기가 가장 적당하오 (백범일지 중)김구는 상해 임시정부 초대 내무총장인 도산 안창호 선생에게 임시정부의 문지기를 하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나, 다음 날 안창호가 문지기가 아닌 경무국장을 맡아 달라며 그를 설득하자 결국 초대 경무국장에 취임한다. 경무국장 시절, 김구는 일제의 정탐을 방지하고 임정 요인의 신변을 보호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일제는 어떻게 해서든 김구를 임시정부가 있던 프랑스 조계지 밖으로 유인해 체포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상해 임정 요원 거주지 영경방.자신의 호 백범(백정과 범부)이 의미하듯 그는 정녕코 문지기와 같은 삶을 원했지만 시대는 그를 한국 현대사에 길이 남을 민족의 지도자로 기억한다. 그의 70평생에는 늘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일찍이 사람을 죽였고(치하포 사건, 1896년 3월 9일 백범 김구가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인 스치다 조스케를 타살한 사건. 당시 21세), 이로 인해 투옥과 탈옥을 경험했다.가족의 죽음, 사랑하는 이들의수많은 죽음을 보았고,지옥과 같은 전장, 폭격, 산더미 같은 시신 곁에서 살아났다. 총알에 맞아 빈사 상태를 헤매기도 했고,결국엔 흉탄에 그 굴곡진 생을 마감했다.상해 임시정부 전경.3.1운동 직후 상해(상하이)로 망명을 떠난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나 자금난과 독립운동을 둘러싼 여러 계파간의 대립으로 혼란과 침체를 거듭하다 임정 활동 7년 8개월 만에 이동녕의 간곡한 재청으로 국무령의 중책을 맡는다.1931년 일제의 만주 침략을 계기로 한인애국단을 창단하여 1932년 5개월 동안 4건의 의거를 진두지휘하며 괄목할 만한 성과를 얻는다. 우리가 잘 아는 이봉창의 도쿄 일왕 투탄 의거(1932년)와 윤봉길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가 대표적인 활동이라 할 수 있다.이 의거는 장개석(장제스) 총통이 우리 중국 사람들도 하지 못한 일을 한 명의 조선 청년이 했다며 감탄할 만큼 조선인의 항일 정신과 독립 의지를 세계 만망에 알린 사건이다. 소수의 임정 요원으로 독립운동 극대화를 노렸던 한인애국단의 활약은 임시정부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지만 백범 개인으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과 역경으로 내몰린다.60만 원(현재 금액으로 약 200억 원 상당)의 현상금이 걸려 항주(항저우)에서 중경(충칭)까지 거의 8년 이상을 풍찬노숙에 가까운 여정을 보내게 된다. 이 모진 시기에 모친과 장남(인)을 잃는 아픔을 겪지만 그는 오로지 독립만을 꿈꿨다. 중경 임시정부 청사(연화지) 전경. 내 나이 이제 육십칠(1942년) 중경 화평로 오사야항 1호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에서 다시 이 붓을 드니, 오십삼 세 때에 상해 법조계 마랑로 보경리 4호 임시정부 청사에서 백범일지 상권을 쓰던 때에서 14년의 세월이 지난 후이다 (백범일지중) 중경으로 온 임시정부는 그 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위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중경에서의 4번 째 청사이자 마지막 청사이기도 한 연화지에 70여 칸 건물을 빌려 사용했고, 1년 임대료만 40만 원일 정도였다. 중경에서의 임시정부 업적이라고 하면 한국광복군을 창설하면서 정부(임시정부)-당(한국독립당)-군(한국광복군)이라는 체계를 갖췄다는 점일 것이다.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입지가 그만큼 탄탄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 뿐만 아니라 우리 동포의 지원도 물밀듯 밀려들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된 신한민보에서 광복군 후원 모금을 고정란으로 마련하자 시카고, 쿠바 교민, 멕시코 유카탄 반도애니깽 농장에서 선인장 가시에 찔려가며 노예처럼 일하던 한국인 이민자들도 독립운동 비자금을 송금하였다.서울 종로구 경교장 2층 김구 선생의 응접실(서재). 경교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의 숙소이자 환국 후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다.(사진=저작권자(c)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만일 누가 어떤 모양으로 죽는 것이 네 소원이냐 한다면 나는 최대한 욕망은 독립이 다 된 날 본국에 들어가 영광의 입성식을 한 뒤에 죽는 것이지마는, 적어도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을 만나보고 오는 길에 비행기 위에서 죽어서, 내 시체를 던져 그것이 산에 떨어지면 날짐승 길짐승의 밥이 되고, 물에 떨어지면 물고기의 뱃속에 영장하는 것이다 (백범일지 중)그렇게 간절히 원했던 독립을 맞았지만 그 시절, 백범일지 하권을 쓸 무렵 작은 소망과 달리, 1949년 6월 26일 현역 군인인 안두희에게 암살을 당하고 만다. 탐방을 마치고 몇 줄의 기사로 백범과 그의 칠십 평생의 삶을 제대로 표현할 길이 없다. 더 자료를 수집하고 공부를 해도 채워지지 않을 부족함에 죄스러움마저 느껴진다. 진정 그가 추구한 인생에 가치는 무엇이었을까?중경 임시정부 청사 내 김구 선생 동상.김구 선생이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는 서산대사의 오도송(悟道頌, 고승들이 수양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은 순간 깨달음을 얻은 내용과 자신의 감회를 적은 글)을 끝으로 아쉬움이 남는 필자의 임정 탐방기를 마친다.답설야중고 불수호난행(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금일아행적 수적후인정(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눈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어지럽게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가는 이 길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정책기자단|박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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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기자 박영서
2019.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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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 노신공원서 당대 영웅 윤봉길 의사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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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을 때까지 장장 27년 동안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을 벌였다. 독립을 향한 길에남녀노소는 없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활약했던 임시정부. 여기에는 필자와 비슷한 20대 청년들도 있었다. 혈기왕성했던 이들은 일제의 총칼이 두렵지 않았다. 투쟁의 선봉에 서서 장렬히 전사했고, 또 끝까지 살아남아 해방 이후 조국을 이끌기도 했다. 과연 내가 그 시절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상해 임시정부 청사.머나먼 땅 중국 상해(상하이)에서, 항주(항저우)에서, 중경(충칭)에서 조국의 독립을 이끈 청년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중국 내 임시정부 청사 및 의거지로 떠났다. 현장에서 보고 느낀 그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스승 김구의 생일상을 차려준 제자 나석주화려한 쇼핑몰 속 작은 2층 건물들. 서로 마주 보는 구조로 된 공동주택 모양을 띈 영경방(융칭팡)은 임시정부가 상해에 머물렀을 때, 김구의 거처로 쓰였다. 안창호와 여운형 등 임정에서 활약한 많은 독립운동가가 스승과 제자 사이였듯 김구도 수많은 제자를 뒀다. 하지만 스승의 생일상을 차려준 제자는 단 한 명. 상해 시절 스승을 호위했던 나석주 의사다.상해 임시정부 청사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걸리는 영경방.일제강점기 전, 김구 선생이 설립한 양산 학교에서 수학한 나석주는 임시정부 수립 이후 스승 김구의 휘하로 들어갔다. 당시 김구는 경무국장, 나석주는 경호관으로 임정 요인들을 호위했다. 그러던 중 아내 최준례 여사를 잃고 일제의 감시 때문에 임종조차 지킬 수 없던 스스로를자책하며 괴로워하던 스승을 위해 자신의 옷을 팔아 돈을 마련한다. 나석주 의사는 영경방에서 스승 김구 선생의 생일상을 차렸다. 사진은 상해 임시정부 청사로 향하는 골목.어렵게 마련한 돈으로 스승을 위한 생일상을 차린 그와 생일상을 받은 김구 선생. 이후 서로를 완전히 신뢰한 김구 선생과 나석주는 1926년 폭탄 의거를 계획했다. 국내로 잠입한 그는 12월 28일,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졌고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라! 라는 말을 남기고 자결한다.폭탄 의거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지만 김구는 아꼈던 제자 나석주를 잃었다. 이후 나석주를 기리는 마음에서 김구 선생은 한 번도 생일상을 받지 않았다. 70년 넘게 살았던 김구의 생일상은 딱 한 번, 영경방에서 제자 나석주가 차려준 것 뿐이다.영경방은 임정 요인들의 거주지였다.스물일곱에 임정에 합류, 7년 동안 임정 요인을 경호했던 나석주와 그의 스승 김구 선생. 그들의 이야기가 영경방을 떠날 때까지 마음속에 자리잡아 쉽사리 발을 뗄 수 없었다.당대 영웅 윤봉길, 영원히 기념현재 노신공원으로이름이 바뀐 홍구공원.과거 홍구(훙커우)공원으로 불렸던 노신(루쉰)공원. 윤봉길 의사의 의거 장소로 잘 알려진 곳이다. 당시 중국 내 항일운동을 이끌었던 장개석(장제스)이 중국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단 한 명의 조선 청년이 해냈다며 극찬했고, 이후 임시정부에 전폭적인 지원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만들었다. 당시 윤봉길 의사의 나이는 스물다섯이었다.그는 사내 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 라는 말을 남기고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채소 장사를 하며 당시 독립운동의 본거지였던 상해를 찾은 윤봉길. 김구를 만나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이봉창 의사처럼 폭탄 의거를 계획한다.노신공원에 찾아온 봄. 임시정부도 광복이라는봄을 기다리며 독립운동에 투신했다.목표는 천황의 생일과 상해사변 전승 기념행사에서 폭탄을 투척하는 것. 한치의 오차도 없는 치밀한 계획 속에 1932년 4월 29일, 운명의 날이 밝아오자 제게는 이제 한 시간 밖에 소용없는 물건이라며 김구의 시계와 자신의 시계를 맞바꿨다. 이후 참석한 기념행사에서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대장을 척살하는 등 일제의 최고위층을 처단했다.중국 정부도 항일 운동의 대명사였던 윤봉길을 기려 노신공원 내에 윤봉길 기념관을 건립했는데, 한국어와 중국어로 윤봉길 의사의 생애와 활약상에 대해 소개하고 있었다.노신공원 내에 있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노신공원에서 가장 놀랐던 점은 무엇보다도 현지 중국인들도 윤봉길 의사를 기억한다는 점. 윤봉길 의사의 의거 장소로 추정되는 곳에 한 중국인이 붓글씨로 어서오세요. 영원히 기념 당대 영웅 윤봉길 의사 정의 필승을 적고 있었다.순간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한국사 시험에 대비하기 위해 외웠던 윤봉길 그이름을 중국인이 기억하고 있었다. 한국인만 오면 반갑다는 듯 서툰 한국어로 써내려간 당대 영웅 윤봉길 의사.영원히 기념, 당대 영웅 윤봉길 의사.일제의 심장을 향해 당당히 폭탄을 던지는 모습, 사형선고를 받으면서까지 이 철권으로 일본을 즉각 타도하려고 상해에 왔다며 일제를 호령했던 눈빛은 아직도 내 마음을 일렁이게 만든다. 중국인이 적은 한국어와 함께.임시정부에서 활약한 수많은 청년들의 현장을 살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사실 탐방 이전에는 조국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면서 독립운동을 하겠냐는 질문에 아니오라고 대답했었다. 목숨까지 포기하기에는 무서웠다.하지만 100년 전 청년들의 치열했던 독립투쟁 현장을 다녀온 지금 나는 당당히 예 라고 답할 것이다. 100년 후 그들이 꿈꿨던 나라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청년의 입장에서, 100년 전 이들의 희생이 부끄럽지 않도록 말이다. 정책기자단|최종욱cjw0107@naver.com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이런 사회를 꿈꾸는 대학생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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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기자 최종욱
2019.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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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병사 옥 병장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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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매력적인 취재 기회가 봄바람 살랑거리듯찾아왔다. 바로 아이돌그룹 2PM의 멤버이자 연기자로도 유명한 옥택연 병장을 만날 수 있는 기회. 봄기운이 완연한 4월 2일 오전, 서울 공군회관에서 모범병사로 뽑힌 옥택연 병장의 감사패 전달 및 소통의 자리가 개최됐다. 늠름한 모습으로 나타난 옥택연 병장의 모습을 보며 왜 인기가 많은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멋지게 경례하는 옥택연 병장.옥택연 병장은 미국 영주권자이면서 허리디스크로 대체복무 판정을 받았음에도 영주권을 포기하고 자원입대한 것으로 유명하다.백마 신병교육대대 조교로 복무하며 성실한 자세로 많은 국민들과 군인, 복무 예정자들에게 귀감이 된 점이 크게 인정돼 이번에 모범병사 표창을 수상하게 됐다. 행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김태화 병무청 차장은 옥택연 병장에게 감사패를 전달하면서 미국 영주권자이면서 대체복무 판정을 받았기 때문에군대에 가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택연 병장이 자원해서 군에 입대해모든 젊은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며 군대 말년에는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아무쪼록 마무리 잘 하고 건강하게 전역해서 국민들에게 행복과 사랑을 주는 옥택연 병장이 됐으면 좋겠다고 격려의 말을 전했다.옥택연 병장에게 감사패를 전달하고 있는 김태화 병무청 차장.옥택연 병장은 감사패를 받으며 사실 생각지도 않았는데, 이렇게감사패를 받게돼감사하다. 사실 이 감사패는 저뿐만 아니라 같이 생활하고 있는 부대원들이 같이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이후, 바로 이어진 소통의 시간. 군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고 행복했던 순간을 묻는 질문에 옥 병장은 작년 국군의 날 행사에 참석했던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 행복했던 순간은 모든 장병들이 그렇겠지만, 휴가 출발할 때 위병소를 지나가며 자유를 느낄 때다 라고 소회를 밝혔다. 조교로서 보람을 느꼈던 경험을 묻는 질문엔 훈련을 다 마치고 수료식 행사를 할 때 달라진훈련병들의모습을 보며 보람찬 기분을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옥택연 병장의 친필 사인. 필자도 질문 대열에 동참했다. 필자가 복무했던 때(2010년~2012년)에 비해 지금은 군 복지가 굉장히 개선됐다. 일과 후 외출 및 휴대전화 사용 허용 등이 대표적인데, 생활관 반응이나 분위기 등이 궁금하다는 필자의 질문에 옥 병장은 그걸 저도 경험하지 못해 아쉽다며 참석자들의 웃음을 이끌어냈다. 옥 병장은어제(4월 1일)부터일과 후 휴대폰 사용이 가능하게 됐다. 복무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이렇게 바뀌어가는 분위기가 굉장히 좋고, 후임 병사들도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있다. 일과 후 외출 등으로 사회와 단절돼 있지 않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게 가장 큰 변환점이라고 생각한다. 조금씩 개선되는 부분에만족하고 있다며 조리있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했다.답변하고 있는 옥택연 병장.군대에서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얻은 것이 있냐는 질문에 어렸을 때부터 연예계 쪽에서 일을 계속 하다보니, 조금은 덜 계획적인 생활을 했었는데, 군 생활을 하면서정시에 기상하고 취침하며 계획에 맞게 생활했던 것 같다며 조교를 하면서많은 훈련병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바른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사실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연예인이 2년 내외의 공백기를 갖고 이를 극복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충분히 군대를 가지 않을 수 있는상황이었음에도군복무를 했다는 점에 큰 박수를 쳐주고 싶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소통의 시간은 오찬을 즐기면서도 계속 이어졌다. 옥택연 병장은 참석자들의 질문에 웃음과 미소를 머금고 길게 화답하며 훈훈한 분위기를 이끌어줬다.참석자들과의 사진촬영에도 일일이 응해주고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는 모습에 옥택연 병장의 소탈한 모습을 보며 평소 후임들에게 얼마나 살갑게 대하고 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번 옥택연 병장과의 소통행사는 원형 테이블에서 서로를 동등한 거리에서 바라보며 자유롭게 질의응답이 진행됐다. 옥택연 병장에게 궁금했던 점들을 진솔하게 들을 수 있는 자리였다. 소통하기 용이한 원형 테이블.소통은 절대 일방통행으로 이뤄질 수 없다. 뜻이 서로 통해야 하고, 막힘이 없어야 한다. 그리고 같은 공간에 있는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그 소통 안에 들어가 있어야 참뜻이 발현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이번 옥택연 병장 모범병사 감사패 수여식 및 소통행사는 쌍방의 소통이 원활히 이뤄졌고,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며, 거기에 웃음과 훈훈함까지 배가됐다는 점에서 매우 훌륭한 행사였다고 생각한다. 옥택연 병장과 함께 한 기념사진 촬영. 옥택연 병장은 올해 5월 16일에 전역한다. 묵묵히 군인으로서의임무를 완수한옥택연 병장의 전역 후 앞날에 꽃길이 활짝 펼쳐지길 바라본다. 정책기자단|전형wjsgud2@naver.com 제 17-18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전 형입니다. 외교, 통일, 그리고 박사과정 분야인 한국어교육에 깊은 관심이 있습니다. 유익한 정책이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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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기자 전형
2019.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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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열사의 고향에 간 ‘독립의 횃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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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아우내장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유관순열사기념관이 있다. 유관순열사기념관을 뒤로 하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유관순 열사 추모각이 나온다. 유관순 열사 영정을 모셔둔 곳이다. 한복을 차려입은 꼿꼿한 유관순 열사의 자태에서 범접하기 어려운 위엄이 느껴진다. 유관순 열사 영정 앞에서 묵념하는 시민.4월 1일 정오를 지난 시각이다. 중년의 한 남성이한참 유관순 열사 영정을 바라보다가 묵념을 올린다. 뭔가 사연이라도 있는 걸까? 뒤돌아서는 그에게물었다. 유관순 열사와 관련이 있는 분이신가요? 필자를 빤히 쳐다보면서 그는이렇게 대꾸한다. 우리는 유관순 열사에게커다란 빚을 진 채 살아가고 있어요. 그러니 우리 모두 채무자인 셈이지요. 그렇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그 누군들 순국선열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천안 독립의 횃불전국 릴레이 기념식에 참가한 사람들.2019년 4월 1일 오전 10시.천안 동남구문화원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천안에서 독립의 횃불 전국 릴레이가 진행되는 날이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4월 1일은 유관순 열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날로 남아 있다. 왜 그럴까? 정확히 100년 전 오늘로 거슬러 올라가자.1919년 3월 1일 서울 종로 탑골공원(지금의 파고다공원)에 모인 사람들은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우리의 평화적인 시위에 일본군은 총칼을 휘두르면서 위협했다. 학생들이 가세하자 일제는 휴교령을 내렸다. 당시 이화학당에 재학 중인 유관순 열사는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숨겨서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와서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한다.3월 1일부터 4월 11일까지 전국 각지에서독립의 횃불 전국 릴레이가 이어진다.천안 동남구문화원이 위치한 이곳이 아우내장터다. 4월 1일 오일장이 열리는 날에 맞춰서 천안을 비롯한 주변 24개 지역에서 온 3000여 명의 군중들이 장터에 모여들었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날 정오에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때 유관순 열사의 부모님이 일본군의 총칼에 돌아가시고 유관순 열사도 일본군에게 붙잡혀서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되는 수난을 당한다.지난 3월 1일, 삼일절을 맞아서울에서 시작된 독립의 횃불 전국 릴레이가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까지 전국 각지를 돌면서 독립의 횃불을 밝히고 있다. 세종에 이어4월 1일, 독립의 횃불이 천안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부터 횃불봉을 든 국민주자, 천안 시민 등이 빼곡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4.1 독립만세운동 재현극에서 열연을 펼치는 출연배우들.양승조 충청남도지사는 독립의 횃불이 독립투쟁의 성지인 천안에 도착한 것을 환영한다. 우리가 나라를 잃고 힘들었던 시절에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수많은 애국선열들은 나라를 위해 희생했다. 우리는 그분들의 정신을 기억해야 한다 라고 강조했다.기념식에 이어 아우내장터에서 벌어졌던 4.1 독립만세운동 재현극을 무대 위에 올렸다. 오늘따라 유관순 열사가 부활한 듯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치는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찬바람에 실려 아우내장터를 휘몰아친다. 천안 독립의 횃불 릴레이 행렬.천안 독립의 횃불 릴레이 코스는 천안시 동남구문화원(아우내장터)에서 유관순열사기념관까지 총 1km 구간에 이른다. 긴 행렬의 선두에 대형 태극기를 펼쳐든 여학생들이, 그 다음 독립의 횃불플래카드를 든 남학생들이 앞장선다. 뒤따라 재현극 배우들이 태극기를,독립의 횃불 주자들이 횃불봉을 들고 행진한다.사회자의 선창에 따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행렬.사회자의 선창에 따라 행진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다양한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100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다함께 한마음으로 행진해서 그럴까? 1km 구간을 걷는데도 거리가 짧게 느껴진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어르신들도 만세를 외친다.정류장에 앉아서 버스를 기다리던 어르신들도릴레이행렬의 대한독립만세 소리에 맞춰서 덩달아 두 팔을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친다. 사전에 연출된 장면이 아니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반사적으로 나왔다. 독립을 열망하는 강렬한 외침을 들은 누구든 독립만세운동에 동참하지 않을 수 있었으랴!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이일본군의 감시 속에서도 전국적으로 퍼져 나간 이유일 것이다. 일제 식민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주독립의 열망이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움직이게 만들었다. 남녀노소, 계층을 가리지 않고 누구든 자발적으로 나섰다.4.1 독립만세운동 재현극이 이어지고 있다.유관순열사기념관에 도착한 뒤 유관순 열사의 동상 앞 너른 마당에 사람들이 운집했다. 4.1 독립만세운동 재현극이 이어졌다. 이번엔 일본군이 등장했다. 독립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에게 총구를 겨누고 그만두라며 위협한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자 일본군은 총을 쏜다. 여기저기 쓰러지는 사람들 틈에서 울음도 잠깐이다. 태극기를 휘날리면서 일본군 앞에서 보란 듯이 당당하게 독립만세를 외친다. 마침내 일본군이 무릎을 꿇고 항복한다. 마지막 장면은 1945년 8월 15일 우리가 해방되던 그날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퍼포먼스다. 우리의 끈질긴 독립운동은 한때 반짝 그치지 않고 해방의 그날이 올 때까지 끊임없이 이어지고 또 이어졌다.유관순 열사 서훈 1등급 추서를 축하하는 메시지가 곳곳에 기록되어 있다.독립의 횃불 주자로 참가한 천안시 노인회 지회장 유홍준 어르신은 열사의 고향 아우내 장터는 신분의 귀천 없이 모든 계층이 모이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4.1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졌다 라고 말씀하셨다. 유관순 열사가 탄생했고, 4.1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던 후손으로서의 강한 자부심이 드러난다.순국선열 47분을 상징하는추모비둘기를 공중으로 날려보내고 있다.4.1 독립만세운동 당시 희생된 순국선열 47분의 넋을 위로하고자 추모비둘기를 공중으로 날려 보내고, 유관순 열사 동상 앞에서 대전으로 이어질 횃불의 점등식을 마쳤다.순국자 추모각에서 순국선열 47분을 위한헌화 및 분향이 있었다.곧이어 순국자 추모각에서 순국선열 47분을 위한 추모제가 있었다. 순국선열들의 위패를 모셔둔 추모각에 헌화 및 분향을 하고 추모의 글을 낭독하는 의식을 치렀다. "부디 이제부터 지하에서 편히 영면하소서."유관순열사기념관 전시실에서 유관순 열사의 생애를 엿볼 수 있다.필자는 유관순열사기념관의 전시실을 둘러보았다. 18세라는 짧은 생애가 말해주듯 전시실이 협소했다. 그래도 유관순 열사를 기억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해서 그녀를 추모하고 있다.아우내 만세운동 발생지에 기념비와 조각상이 있다.아우내 장터 입구에는 4월 1일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던 공간을 국가보훈처가 현충시설로 지정해두고 있었다. 4.1 독립만세운동을 벌였을 당시 일본군의 총칼에 맞서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수많은 순국선열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장면을 곳곳에조각상으로 형상화했다. 독립의 횃불은 오는 6일까지 예산(3일), 충주(4일), 청주(5일), 화성(6일)을 거쳐11일에 다시 서울 임시정부수립기념식장에 도착한다.필자가 천안에서 머물렀던 반나절에 불과한 시간 동안 형언키 어려운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수많은 순국선열들이 고귀한 희생으로 지켜내려고 했던 대한민국이다. 그분들께 진 커다란 마음의 빚을 갚는 길이 무엇일지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생각해본 하루였다. 정책기자단|윤혜숙geowins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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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기자 윤혜숙
2019.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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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오페라 칸타타서 중경 임시정부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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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3.1운동과 임시정부에 대해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세한 부분까지 들어가면 자신이 없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임시정부가 무슨 상관이냐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도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100년 전 그 치열했던 역사의 한복판으로 들어갔다. 그 시작은 올해 초 유관순 오페라 칸타타에 시민합창단으로 참여하면서부터다.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유관순 오페라 칸타타(3월 2일 공연)에서 시민합창단을 뽑는다는 소식을 우연히 접했다. 오디션까지 진행한다니 자신감이 좀 떨어지긴 했지만, 어릴 적 합창단 경험을 떠올리며 도전했다. 실력이 좋았는지,운이 좋았는지 합격했다.유관순 오페라 칸타타 연습 현장.(사진=세종문화회관 제공)오페라 칸타타 형식이다 보니 일종의 뮤지컬과 합창이 공존했고,관객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공연을 즐기는 형식이었다. 연습도 매주 1회, 마지막 주에는 거의 매일 연습을 진행했다. 유관순 열사에 대한 배경을 충분히 듣고 공연을 준비했다. 1919년 당시 시대 상황과 감정을 가지고 준비해야 했다. 독립에 대한 열망이 들끓던 시기. 그리고 시작된 3.1운동과 33인의 민족대표들, 그리고 유관순 열사. 공연 도중에 감정이 북받쳐 울음을 삼켜내야 했다. 관객들의 훌쩍이는 모습에 감정이 더 벅찼다. 관객들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당시 독립의 느낌을 함께했다. 실제 공연 모습.(사진=세종문화회관 제공)그리고 이어진 임시정부 탐방. 3.1운동은 그해 상해 임시정부를 태동하게 하는 동력이 됐다. 그 열화와 같이 분출된 독립에 대한 염원, 3.1운동이 없었다면 임시정부는 없었을 것이다. 임시정부 탐방은 상해 임시정부밖에 몰랐던 나를 항주(항저우), 진강(쩐장), 장사(창사), 광주(광저우), 유주(유저우), 기강(치장), 그리고 마지막 청사 중경(충칭) 임시정부까지 이끌었다.마지막 임시정부, 중경 임시정부 청사.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는 대한민국의 독립을 향한 투쟁이었다. 왜 그들은 그렇게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졌던가. 아마 독립 염원의 가장 큰 가치는 자유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한 자유는 나라의 독립밖에 없다는 사실.역사학자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이었던 박은식 선생은 국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국혼의 됨됨은 국백에 따라서 죽고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국교와 국사가 망하지 아니하면 국혼이 살아있으므로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어디에 있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국혼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유를 향해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임시정부는 바로 그 국혼을 끝까지 잊지 않은 곳이었을 터다.대한민국 임시정부 가흥 김구 선생 피난처. 긴급시 2층에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강으로 피신하게 되어 있다.이번 임정 탐방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임정 요인들의 피난처였다. 쫓기는 상황에서도 가족을, 또 나라를 지키며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한 이들. 붉은색 깃발이 있으면 위험하고 검정색 깃발이 있으면 안전한 그 신호조차 믿을 수 없어 낮에는 피난처에서, 밤에는 수상가옥에서 살 수 밖에 없었던 현실.그래서 슬픈 감정이 올라왔다. 홍구공원(현 노신공원)에서의 윤봉길 의사 의거로 임시정부의 방향성과 위치를 확고히 했다고 했지만, 이후 고난의 시간들이 그들에게는 항주(1932년)에서 중경(1940년)까지 8년여 간의 고된 피난길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만국공묘(현 송경령 능원). 박은식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묻혔던 곳이다. 박은식 선생의 유해는 1993년 국내로 봉송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자유를 빼앗긴 삶보다 그 자유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삶을 부끄럽게 여긴 그분들을 보며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임시정부에서 독립을 위해 싸웠던 분들은 나라의 자유뿐만 아니라 가정과 자신의 자유 또한 그리워하지 않았을까? 그러한 자유이기에 목숨도 당당히 내 놓을 수 있었던 게 아닌가 말이다.임시정부 요인들의 여정을 돌아보며 자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자유란 무엇인가? 그 가볍지 않은 진지한 질문에 이제는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임시정부에서 자유란 독립 운동의 최종 목표이자 후손을 위한 위대한 가치였다. 그래서 내가 지금 이렇게 자유롭게 세상을 다니며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자유. 가볍지 않은 그 이름을 위해 죽어간 분들을 위해 머리를 숙이게 된다. 정책기자단|임성대aaa8402@naver.com 어제보다 오늘! 대한민국 정책기자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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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기자 임성대
2019.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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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 최고의 복지 기초연금, 4월부터 최대 30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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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 엄마와 외식을 할 때마다 엄마는 아이들에게 용돈을 준다. 소득 없이 자식들의 용돈으로 생활하는 엄마에겐 적지 않은 금액이다. 하지만, 손주들을 향한 마음을 용돈으로 표현하는 엄마는 별도의 돈이 생기니 괜찮다고 한다. 바로 기초연금이다.고령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기초연금 수급자 수는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출처=보건복지부)국가에서는 65세 이상의 어르신들에게 기초연금이라는 용돈을 정기적으로 드리고 있다. 2008년부터다. 정부가 어르신들의 안정적인 노후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 시절은 기초노령연금이었지만, 2014년 기초연금으로 개정됐다.20만 원에 머물렀던 기초연금액이 2018년에는 25만 원으로, 2019년 4월부터는 30만 원으로 상향조정됐다. 인상된 기초연금 지급대상의 기준은 무엇인지 궁금했다.2019년 4월부터 기초연금은 소득하위 20%를 기준, 30만 원으로 인상됐다. 2020년에는 40%, 2021년에는 70%까지 점차 수급자 범위를 확대할 전망이다.(출처=기획재정부)65세 이상 소득하위 20% 어르신이 이에 해당된다. 기초연금 수령 대상자는 소득과 자산을 바탕으로 정해지는데, 소득과 재산을 금액으로 바꾼 소득인정액이선정 기준액 이하인 경우에 연금을 받을 수 있다. 기초연금 선정 기준액은 물가에 따라 매년 조금씩 상향되고 있다. 아울러, 인상된 혜택은 2020년에는 소득하위 40%, 2021년에는 소득하위 70% 어르신들께 단계적으로 확대될 전망이다. 기초연금 수급 대상자인지 궁금하다면 관할 주민센터를 통해 알아볼 수 있다.연로하신 부모님 세대는 자식들 뒷바라지에 노후를 챙길 여유가 없는 세대임에는 분명하다. 무엇보다 경제적인 문제가중요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때문에 어르신들에겐 적은 액수나마 매달 또박또박 지급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OECD 국가 중 우리나라는 노인 빈곤율이 평균을 훌쩍 넘는다.(출처=경제협력개발기구) 친정과 더불어 시댁에도 홀로 사시는 어르신이 계신다. 어르신들에게 기초연금은 병원 치료비, 손주 용돈, 친구들과의 외식비로도 유용하게 쓰인다. 아울러 이동통신비 감면, 외래 진료비 지원 등 정부의 복지혜택이 어르신들께는 상당한 의지가 되고 있음을 실감한다.이는 부양자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작지만 큰 도움으로 작용하는 어르신을 위한 복지 혜택이 든든하다. 보살핌이 필요한 어르신들을 위해 조금씩 천천히 돌봄을 확대해 나가는 사회에 믿음직스러운 마음이 생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100세 시대를 사는 지금, 어르신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로부터 소외받지 않는다는 마음의 안정과 생활의 여유다. 그리고 이런 부분을 기초연금이 해결해주고 있다. 이에 기초연금 수급의 사각지대를 해소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어르신들이빠짐없이 혜택을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사회적으로 돌봄이 필요한 어르신들은 갈수록 늘고 있다.(사진=저작권자(c)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주위를 살펴보자. 형편이 안 좋은 어르신이 계시지 않은지, 혹은 몰라서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없는지 우리의 관심이 필요하다.기초연금 신청은 주소지 관할 동 행정복지센터 및 읍면사무소나 가까운 국민연금공단 지사 및 상담센터를 직접 방문하거나 복지로 사이트(http://online.bokjiro.go.kr)를 통해 신청할 수 있다.거동이나 교통편이 불편한 경우 찾아뵙는 서비스를 신청(국민연금공단 콜센터, 국번 없이 1355)하면 국민연금공단 담당직원이 직접 방문해 자세히 설명하고 신청을 도와준다. 정책기자단|박은영eypark1942@naver.com 때로는 가벼움이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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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기자 박은영
2019.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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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광복군 할아버지의 흔적 꼭 찾아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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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작을 상해에서 했던 임시정부의 종착점은 중경이었는데, 상해부터 중경까지 가는 길은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이기도 하다. - 제국에서 민국으로 가는 길(박광일 지음) 중이국 땅에서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그 길은 얼마나 힘들고 고달팠을까요?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걸었던 길입니다. 1919년 4월 11일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부터 1945년 해방까지, 27년간의 장도였습니다. god 노래 길 가사처럼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아마 그 길이 제국에서 민국으로 가는 길이었음은 확신했을 겁니다. 대한민국 정책기자단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그길을 5박6일(3월 18일~23일) 동안 함께 했습니다.편집자 주엄마, 독립운동가 황학수 선생님 알죠?아들의 뜬금없이 시작된 질문과 처음 들어보는 독립운동가의 이름에 살짝 놀랐습니다. 당황함을 감추려고 일어나는 저에게 엄마는 결혼한 남편 집안에 관심이 없어요? 라며한바탕 잔소리를 쏟아냅니다.책에서 찾은 황학수 독립운동가의 사진을 보는 아들.한국광복군 부사령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등을 지낸 황학수 독립운동가가 고조할아버지뻘인 아들은제게인터넷 족보를 보여줬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고조할아버지의 동생이 바로 우리 집안의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가 황학수 선생님이라며 2013년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에도 소개됐었다는이야기로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습니다. 책에서 황학수 독립운동가의 사진까지 찾아서 보여줍니다.중경(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에 전시된 한국광복군 사진 및 자료.올해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누구보다 들뜬 초등학생 아들! 중국 내 임시정부 탐방에 나선 제게 아들은 족집게 선생님처럼 콕 집어 말합니다. 작전명 독수리! 아들은 제게한국광복군의 국내진공작전(서울진공작전)명이 독수리였다며 마치 1945년 한국광복군이 비밀작전을 준비하듯 제게임시정부 100주년 중국탐방을 지시했습니다. 비록 한국광복군의 마지막 독수리 작전은 성공할 수 없었지만, 이번중국 내 임시정부 탐방에서 자신의 뿌리인 고조할아버지 황학수 독립운동가의 흔적을 찾는 작전은 꼭 성공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대한제국의 군인에서 한국광복군으로 끝까지 독립운동에 애쓰셨던 분인데 사실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서운한 마음이 든다고 합니다. 하지만임시정부와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황찬우 라는 자신도 없었을 거라는 초등학생 아들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인사동 감고당길 사진전시 속 황학수 고조할아버지를 찾아 반가운 아들.지난 3월 1일,독립의 횃불을 든 사람들과함께 광화문에서 보신각까지 뛰었던 아들이 인사동을 지나 감고당길까지 산책하다 갑자기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이 있었습니다. 바로 황학수 고조할아버지께서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계단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이었습니다. 마지막 임시정부 청사였던곳 계단에서 태극기를 들고 사진을 찍었던 당시 할아버지의 마음은 어땠을까? 라며 이곳을 발견하거든 꼭 사진으로 남겨오라고당부했습니다.중경임시정부 청사 입구.한국광복군 활동을 했었고,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이었던 황학수 독립운동가의 발자취는 중국 상해(상하이)와 항주(항저우)를 거쳐 3월21일 중경(충칭)에 도착해서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아들이 알려줬던 그 계단을 본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렙니다.중경 임시정부 청사 제1전시실 내황학수 독립운동가(오른쪽) 사진.중경 임시정부 청사 1층 제1전시실에서 황학수 독립운동가를 처음 대면했을 때 무척 기뻤습니다. 이곳에서 뵙는구나! 그분의 발자취를 찾아오라는 아들의 부탁에 응답할 수 있을 것 같아 얼른 사진기부터 들었습니다. 하지만환국을 앞두고 마지막 기념촬영(11월 3일)을 하고서도 정작 조국의 서울 땅을 밟은 건 임시정부 요인 자격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12월 2일에나 가능했다고, 동행했던박광일 작가의 설명에 마음 한편이 씁쓸해졌습니다.중경 임시정부 청사 제1전시실 사진 자료.중국에 다녀와서 아들에게 중경 임시정부 청사에서 만났던 황학수 고조할아버지의 사진과 설명이 적힌 전시물들을 보여주며속상했던 얘기를 들려줬습니다. 이에 아들은 김구 선생님께서분명히 내가 왔으니 정부도 왔소라 했으며 그 당시 국민들은 이들을 임시정부 이름으로 환영했었다며 오히려 제 마음을 토닥여 줬습니다. 중경임시정부 청사 전시관 안내 표지판.물론 귀국 당시의 국제적인 상황 속에서 임시정부의 정치적 입지가 좁았던 건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그때까지버텨준 그 자체로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희망의 씨앗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가는 기틀을 마련했으며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의 기초도 준비를 했었기에 해방이 되고, 혼란한 가운데서도대한민국은 진정한 민주사회를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고, 그 덕분에 지금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중경임시정부 청사 내 국무위원 회의실과 국무위원 명단 전시 자료.대한제국의 마지막 군인으로서 독립운동의 중심에 계셨던 독립운동가 황학수 고조할아버지의 발자취를 찾다가 임시정부를 비롯해일제강점기와 근현대사로 이어지는 역사적 사실에 더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된 아들! 중경 임시정부 마지막 청사에서 국무위원으로 이름이 적혀있는 황학수 고조할아버지의 모습과 함께 회의실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중경임시정부 청사 내 집무실들을 연결하는 중앙 계단.아들은 그때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어떻게 꿈꾸고 있었을까? 과연 황학수 할아버지를 만나 뵙게 된다면 현재 나에게 뭐라고 하실까?궁금해 하며 잠시 상상에 빠졌습니다. 저의 임시정부 탐방 이야기로황학수 고조할아버지의 흔적들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된 아들은 앞으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깊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고 합니다.황학수 고조할아버지께서 국내에 귀국한 후, 임시정부와 보조를 같이하면서 무엇보다 건국에 대한 견해나 향후 한국사회가 나아갈 길 등에 대한 글을 쓰기도 했다는 내용을 책에서 보고 아들은 무척 자랑스러워했습니다.중경임시정부 청사 복원 기념비.아들은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많은 한국광복군 관련 이야기들과 그들을 도우며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수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알리고 싶다고 합니다. 또 한국과 중국에 흩어져 있는 많은 임시정부 및 그 가족들이 생활했던 곳, 요인들이 활동했던 장소, 또 해외에 흩어졌던 한국인들의 지원 등을 찾아서 보존하고, 복원하며, 기록하여 남기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할아버지께서 가장 기뻐할 일은 한반도의 평화가 아니겠느냐고 합니다.중경 임시정부 청사 앞에서 단체사진 촬영하는 대한민국 정책기자단. 맨 왼쪽이 필자.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대한민국을 후손들에게 잘 넘겨주기 위해 희생했던 그분들의 노력에 이제 아들은 응답해야 할 때라고 합니다. 이번 임시정부 100주년을 기념하며 자신의 사명을 발견한 아들은 독립운동가 황학수 고조할아버지께서 흐뭇하게 바라볼 앞으로의 100년을 준비하겠다고 다짐합니다.할아버지께서 뿌듯해 할 후손으로 부족함이 없기 위해 역사를 지키고 알리며, 한반도 평화를 위한 아들의 마음 속 독수리 작전은 계속될 예정입니다! 정책기자단|조성희purejo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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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기자 조성희
2019.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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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살 KTX, 지구 1만 바퀴를 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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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중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마산에 있는 큰고모님 댁에 가기 위해 난생 처음으로 KTX(Korea Train eXpress)를 탔습니다.당시에는 KTX인지도 몰랐습니다. 무궁화, 새마을호와는달리 날렵한 모습에 또 다른 기차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양 손에 과자를 들고 두근대며 탔던 KTX.10년도 넘은 이야기라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속도 하나 만큼은 생생합니다. 객실 내부에 달려있는 작은 모니터를 통해 최고속도를표시했는데, 300km/h를 찍을 때면 저절로 감탄사가 나왔습니다. 지금은 속도가 표시되지 않지만, 과거에는 하단에 현재 시속이 보였습니다.이후 10년 가까이 그 존재를 잊고 있다가대전 소재 대학교에 다니면서 다시 KTX를 탔습니다. 기숙사와 자취방을 모두 구하지 못했던 1학년 1학기. 저는 KTX 정기권을 끊고 서울~대전을 통학했습니다. 무궁화나 새마을호면 감히 통학을 엄두도 내지 못했겠지만, KTX여서 가능했습니다. 서울에서 대전까지 1시간이면 충분하니까요.또 평창동계올림픽 경기를 당일치기로 직관(직접관람)하기도 했습니다. 버스로 이동했다면 왕복 7시간이 넘게 걸려 망설였겠지만, KTX가 있어 편안하게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당일치기로 다녀왔었던 강릉.이렇듯 KTX 운행 이후, 우리의 삶은 너무나 달라졌습니다. 특히 서울~대전을1시간 만에 도착하다보니 출퇴근의 패러다임이 바뀌었습니다. 충청권을 중심으로 수도권-충청권 출퇴근족이 생겨났습니다. 이에 천안아산역과 오송역은 정기권 이용객이 가장 많습니다.어느덧 우리나라 대표 교통수단으로 자리 잡은 KTX. 처음 탔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개통 15주년이랍니다. 2004년 4월 1일, 운행을 시작한KTX가 오늘 정확히 15년째를 맞았습니다. 서울역에 전시된 KTX개통 15주년 축하 포스터.그동안 KTX는 수많은 발전을 거듭해오며 성장했습니다. 경부선과 호남선을 시작으로 경전선(2010), 전라선(2011), 동해선(2015), 강릉선(2017) 등을 개통했습니다.서울에서 부산까지 2시간 15분. 광주까지는 1시간 31분이 걸립니다. 서울 기준으로 전국 어디든 3시간 이내에 도착합니다. 전국을 KTX로 묶어 반나절 생활권으로 만들었습니다. 서울역에 정차 중인 KTX.2010년에는 세계 4번째로 우리 기술로 만든 고속열차 KTX-산천이 기존 KTX와 함께 운행되기 시작했습니다. 토종 물고기 산천어에서 따온 것으로 산천어처럼 날렵한 한국형 고속열차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또 산(山)과 내(川)로 해석돼 푸르른 자연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15년 동안 KTX는 총 7억2000만 명의 승객을 태웠습니다. 5천만 인구로 단순 계산해보면, 적어도 한 명씩 14번은 탄 셈입니다. KTX가 이동한 거리도 상상 이상인데, 15년 동안 100만회 이상 운행하며 총 4억2000만km를 달렸습니다. 지구를 무려 1만 바퀴나 돌 수 있습니다.강릉행 KTX.(사진=저작권자(c)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개통 15주년을 맞은 오늘, 12년 전 처음 탔던 추억을 가득 안고서 대전으로 가기 위해 부산행 KTX에 오릅니다. 1년 365일 쉬는 날 없이 전국을 누비는 KTX. 앞으로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교통수단으로 많은 국민에게 행복을 싣고 달리길 바랍니다. 정책기자단|조송연6464778@naver.com 여행 관련 직종에 종사하고 싶은 대학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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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기자 조송연
2019.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