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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예방 국민여러분의 적극적인 동참이 필요합니다 방역대응 경제 지원 예방수칙 힘내라! 대한민국 사실은 이렇습니다 전문가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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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위기 속 빛난 ‘K-진단키트’…전 세계 러브콜 쇄도 코로나 위기 속 빛난 ‘K-진단키트’…전 세계 러브콜 쇄도 도시 봉쇄 등 극단적 대책 없이도 코로나19 확산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고 있는 K-방역이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정확성을 인정받아 세계 각국으로부터 러브콜이 쇄도하고 있는 ‘국산 진단키트’는 수출 효자 품목으로 부상하면서 국가산업의 위상까지 높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책브리핑은 코로나19로 맞은 위기를 기회로 삼아 국산 의료기기 시장의 판도를 넓히고 있는 체외진단 의료기기 기업을 찾아 현 주소를 진단하고, 향후 과제와 비전을 들어봤다. <편집자 주> 지난 3월 26일 오후.... “에어컨 최소 2시간마다 환기…선풍기와 동시 사용 피해야” “에어컨 최소 2시간마다 환기…선풍기와 동시 사용 피해야” 정부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에어컨은 최소 2시간마다 환기하고 바람세기를 낮춰서 사용하는 등 구체적 생활 지침을 제시했다. 김강립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제1총괄조정관(보건복지부 차관)은 27일 정례브리핑에서 “에어컨 사용기준 등 지침이 없는 분야에 대한 추가 수칙을 마련하고 포괄적인 마스크 수칙은 구체화했으며, 일부 지침은 현장상황에 맞게 수정했다”고 밝혔다. 김강립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제1총괄조정관(보건복지부 차관)이 27일 코로나19 대응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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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에디슨과 초기영화 에디슨과 초기영화 예술로서의 영화를 처음 이론화한 벨라 발라즈가 움직이는 사진 이미지를 처음 접한 것은 어린 시절 헝가리의 산골마을에서였다. 그가 살던 마을에 토마스 에디슨의 영상 시청기구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 시연 행사가 있었다. 이후에 영화를 향한 산골소년의 꿈이 시작됐다. 비단 발라즈에 대한 영향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발명가로서 에디슨이 영화사에 끼친 영향은 대단했다. 하지만 뤼미에르 형제와 비교해서 다소 저평가된 면이 있다. 만일 에디슨에 대한 역사적 평가나 독점권 인정 정도가 지금과 달랐다면, 영화사는 다르게 형성되었을지도 모른다. ◈ 키네토스코프와 키네토그라프 기본적으로 시네마는 관객 눈앞의 스크린에, 캐릭터와 물체의 환영을 담은 이미지가 빛에 투사되며 진행되는 예술이다. 하지만 이 정의는 지극히 본질적인 설명이다. 만일 누군가 영화란 무엇인가 묻는다면 원론적인 답이 아니라 역사적인 상황에 대한 설명으로 대체해야 할 것이다. 여타 예술과 달리 영화는 최초로 시작한 사람이 누구인지(뤼미에르), 혹은 최초의 작품이 무엇인지(1895년작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를 명확하게 답할 수 있는 드문 매체이다. 그렇지만 과학적 증거가 남아 있지 않았다면, 영화 기원에 대한 문제는 복잡한 토론의 양상을 보였을지 모른다. 실제로 1978년 브라이튼에서 열린 영화의 새로운 역사 학회 이후에, 기존 영화사에서 중요하지 않았던 매직 랜턴(magic lentern)이나 프리시네마(pre-cinema) 개념은 적극 부상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로랑 마노니는 영화 역사는 400년이 되었다는 다소 파격적인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에디슨의 경우, 그는 관객들 앞에서 영화가 단체로 상영되는 아이디어 자체에 반대했다. 한 마디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죽이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 예측했다. 이러한 입장은 지극히 경제적인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에디슨은 영상을 개별로 들여다보는 장치를 선호했고, 때문에 시네마토그라프(Cinematographe)에게 최초의 영화 상영장치라는 영광을 빼앗겼다. 하지만 에디슨은 키네토스코프 뿐 아니라 키네토그라프(kinetograph)의 창작자이기도 했다. 자신이 개발한 영상 촬영기재를 보호하기 위해 그는 여러 개의 특허를 신청했다. 하지만 이 권리는 미국 내에서만 인정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미국 이외의 나라에서 온갖 키네토그라프 모조품들이 등장했다. 뤼미에르 형제 역시 에디슨의 영향으로 시네마토그라프 개발을 시작했다. ◈ 최초의 영화 촬영소 블랙 마리아 에디슨과 관련한 에피소드 중 달나라 여행(1902년작)에 대한 이야기도 유명하다. 국제 필름 규격 35mm 필름을 처음 개발한 것은 코닥인데, 당시 이스트만 코닥은 자신이 만든 필름을 상용화하지 않았다. 1892년에 에디슨과 조수 딕슨은 코닥사에 필름을 대량 생산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필름 양옆으로 4개 천공(구멍)을 뚫는 아이디어를 낸다. 영사를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 천공이 들어간 필름 도면으로 에디슨은 국제 특허를 받았다. 코닥의 창업자 조지 이스트먼(왼쪽)과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 (사진=저작권자(c) ANP/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이후 1902년에 멜리에스가 미국 진출용 사무실을 냈을 때, 가장 먼저 히트작 달나라 여행을 가지고 그가 미국으로 왔다. 하지만 법원이 상영용 롤 절반 정도를 압류했다. 천공이 활용됐기 때문이다. 1923년 멜리에스가 파산했을 때, 에디슨 탓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물론 사실이 아니었지만, 아주 약간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에디슨의 행보는 빠르고 경제적인 목표로 집중되어 있었다. 최초의 촬영 스튜디오라 할 수 있는 블랙 마리아(black maria) 역시 그가 가장 먼저 설립했다. 이곳에서 에디슨은 영상물을 촬영했다. 딕슨을 중심으로, 키네토스코프용 영상이 5년간 무려 70여 편 완성되었다. 블랙 마리아란 이름은 미국 경찰의 벤 별칭에서 따온 것으로, 검은 자동차와 닮은 스튜디오 외형 탓에 그렇게 불렸다. 타르가 사용된 종이 재질로 된 건물은 필요에 따라 지붕이 오픈됐다. 햇볕이 비춰질 때, 내부 온도가 극히 높아졌던 탓이다. 그리고 건물 주변에 레일이 깔렸다. 촬영을 위해 건물 방향은 약간씩 조정될 수 있었다. ◈ 키네토스코프의 내용 블랙 마리아에서 촬영된 영상물은 대략 1분 미만 러닝타임을 지녔다.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것도 특징이었다. 스튜디오에서 멀지 않은 샌프란시스코에는 키네토스코프 상영소(Kinetoscope Parlors)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비용을 지불한 관객들이 영상물을 기다렸다.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키네토스코프 렌즈를 들여다봤다. 키네토스코프 영상물은 스토리가 거의 없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크기가 크고 초당 18프레임 속도의 전기모터를 사용했기 때문에, 키네토스코프는 이동하기 어려웠다. 기술적인 제약도 많았다. 비견컨대 5kg 정도의 시네마토그라프와는 달랐다. 때문에 볼거리가 강조되는 방향으로 내용이 발전했다. 마술쇼나 공연, 춤추는 여인이나 신체 일부 등 시각적 스펙타클이 강조된 영상들이었다. 에디슨의 행보를 돌아보면서 그런 생각이 든다. 만일 상영기구가 아닌 촬영도구 중심으로 영화가 발전했다면, 영화사는 어트랙션 시네마 중심으로 서술되었을지 모른다. 확실히 에디슨의 작업은 미학적 도약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기술적인 면에서 다양한 문화적인 변화들을 이끌었다. 소위 유럽식 예술영화와는 다른, 할리우드의 산업적인 경향은 에디슨으로부터 출발했다. ◆ 이지현 영화평론가 2008년 '씨네21 영화평론상'으로 등단했다. 씨네21, 한국영상자료원, 네이버 영화사전, 한겨레신문 등에 영화 관련 글을 썼고, 대학에서 영화학 강사로 일했다. 2014년에 다큐멘터리 프랑스인 김명실을 감독했으며, 현재 독립영화 세상의 아침을 작업 중이다. 13inoche@gmail.com 이지현 영화평론가
문화칼럼 침묵하던 자들을 향해 일갈했던 ‘풀의 시인’ 침묵하던 자들을 향해 일갈했던 ‘풀의 시인’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惰)와 안정을 뒤집어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김수영의 첫 시집 달나라의 장난(1956년 춘조사)에 실린 폭포의 부분이다. 폭포에서 물은 거침없이 자유낙하 한다. 규정도 의미도 주야도 없고 끊임도 없이, 산산이 부서지더라도 그저 수직으로, 고매한 정신은 이와 같이 쏟아진다. 4,19와 5,18이 지나가는 정의로운 밤에는 술을 한잔 아니 할 수 없는 것을, 그는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는다고 한다. 하루의 나타도 한 잔의 술도 없는 것은 불온(不穩)하다. 시인 최하림은 김수영 평전에서 김수영 시의 핵심을 불온성이라고 했다. 똑바로 걸어가는 것이, 직선으로 쏟아지는 것이 불온했던 시대, 이 시는 지극히 불온했으므로 고단했던 그의 삶과 닮아있다.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은 도심의 회색지대가 끝나고 녹지가 시작되는 접경이다. 산으로 들어가는 길가에 정의공주 묘가 있다. 영민하여 훈민정음 창제에도 참여했던 세종의 둘째딸이다. 그 바로 너머에 조선 10대 임금이었으나 왕이 아닌 군이었고, 능이 아닌 묘에 묻혔던 연산군이 있다. 이곳은 길이 세 갈래로 나뉜다. 북쪽으로는 우리 민족문화의 수호자였던 간송 선생의 전형필 길이 있고, 남쪽으로는 흰 머리와 흰 수염, 회색 두루마기를 휘날리며 5,16을 정면 비판했던 사야(史野)의 정신, 함석헌 길이 있다. 가운데로 난 소로의 모퉁이에 김수영 문학관이 있고, 그 길이 김수영 길이다. 오늘이라도 늦지 않으니, 썩은 자들이여, 함석헌씨의 잡지(씨알의 소리)의 글이라도 한번 읽어보고 얼굴이 뜨거워지지 않는가 시험해 보아라. 그래도 가슴 속에 뭉클해지는 것이 없거든 죽어버려라!고 침묵하는 그들을 향해 일갈했던 풀의 시인. 서울특별시 도봉구 해등로에 자리한 김수영 문학관. (사진=김수영 문학관 홈페이지) 김수영은 1921년 당시 중인들이 살던 종로 관철동에서 태어났다. 천석지기는 아니어도 가을이면 5백석을 넘게 실은 우마차들이 대문 앞에 줄을 섰다고 하는 부호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토지조사 여파로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 아버지는 지전상을 했다. 선린상고를 다녔고, 교지 청파에 두 편의 시가 전한다. 1942년 동경에 유학하여 미즈시나 연극연구소를 다니면서 연출을 배웠다. 이듬해 학병징집을 피해 귀국하여 가족들과 만주 길림에서 살다가 25세에 해방을 맞아 돌아온다. 1946년 묘정의 노래를 발표하면서 그는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 그해 연희전문 영문과에 편입했으나 곧 그만두고 박인환, 임화, 김기림, 김광균 등과 교우하면서 신시론 동인으로 활동했다. 한국전쟁을 전후한 격동의 시대 그는 강제로 의용군이 되기도 했고, 거제도 포로수용소, 미8군 통역관, 선린상고 영어교사, 신문,잡지사를 거쳐 마포 구수동에서 양계를 하며 생계를 꾸렸다. 형은 글과 양계를 위해 태어났나 싶을 정도로(동생 김수성) 시인은 닭을 잘 키웠다. 그는 도봉구 창동에 살던 식구들을 위해 계사를 짓고, 자기가 병아리 1천 마리를 40일 동안 기른 뒤에 어머니에게 분양을 해준다. 교외에서 불경이나 읽으면서 한적하게 살기를 원했던 어머니에게 드린 첫 효도였다고, 산문 양계변명에서 쓰고 있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본격적으로 참여시를 쓰기 시작한다.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하그림자가 없다 육법전서와 혁명 그리고 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지, 혁명은 고독한 것인지를, 한 번도 자유를 위해 비상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묻는 푸른 하늘을 등이 이 시기의 작품이다. 그는 1968년 2월 문학의 자유와 진보적 자세에 관해 조선일보 지상을 통해 이어령과 유명한 논전을 벌였으며, 4월 부산 문학세미나에서 시여, 침을 뱉어라를 강연했다. 6월15일 밤 귀가 길에 인도로 뛰어든 버스에 치어 이튿날 숨을 거둔다. 향년 48세. 내년이 그의 탄생 100년이 되는 해다. 도봉구는 김수영 길과 김수영 문학관, 그의 본가와 묘지, 그리고 시비가 세워져 있어 그의 고향 같다. 시비에는 그의 마지막 시 풀이 새겨져 있다. 1960년대 김수영이 없었다면 1970년대 김지하, 1980년대 신경림의 민중시를 생각할 수 없다고 문학평론가 최원식 교수는 말했다.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도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가장 정확하게 말하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나가는 것이다(시여, 침을 뱉어라 중에서). 여기서 동시에는 온몸으로와 밀고를 동시에 하라는 것이다. 그가 남긴 난해하면서도 마력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시론이다. ◆ 이광이 작가 언론계와 공직에서 일했다. 인(仁)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애인(愛人)이라고 답한 논어 구절을 좋아한다. 사진 찍고, 글 쓰는 일이 주업이다. 탈모로 호가 반승(半僧)이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과 인문서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 이광이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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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끝자락, 2020년 5월의 일상 봄의 끝자락, 2020년 5월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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