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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하던 자들을 향해 일갈했던 ‘풀의 시인’

[문인의 흔적을 찾아서] 시인 김수영

이광이 작가 2020.05.21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惰)와 안정을 뒤집어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김수영의 첫 시집 <달나라의 장난(1956년 춘조사)>에 실린 ‘폭포’의 부분이다. 폭포에서 물은 거침없이 자유낙하 한다. 규정도 의미도 주야도 없고 끊임도 없이, 산산이 부서지더라도 그저 수직으로, 고매한 정신은 이와 같이 쏟아진다. 4·19와 5·18이 지나가는 정의로운 밤에는 술을 한잔 아니 할 수 없는 것을, 그는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는다고 한다. 하루의 나타도 한 잔의 술도 없는 것은 ‘불온(不穩)’하다. 시인 최하림은 <김수영 평전>에서 김수영 시의 핵심을 ‘불온성’이라고 했다. 똑바로 걸어가는 것이, 직선으로 쏟아지는 것이 불온했던 시대, 이 시는 지극히 불온했으므로 고단했던 그의 삶과 닮아있다.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은 도심의 회색지대가 끝나고 녹지가 시작되는 접경이다. 산으로 들어가는 길가에 정의공주 묘가 있다. 영민하여 훈민정음 창제에도 참여했던 세종의 둘째딸이다. 그 바로 너머에 조선 10대 임금이었으나 왕이 아닌 군이었고, 능이 아닌 묘에 묻혔던 연산군이 있다.

이곳은 길이 세 갈래로 나뉜다. 북쪽으로는 우리 민족문화의 수호자였던 간송 선생의 ‘전형필 길’이 있고, 남쪽으로는 흰 머리와 흰 수염, 회색 두루마기를 휘날리며 5·16을 정면 비판했던 사야(史野)의 정신, ‘함석헌 길’이 있다. 가운데로 난 소로의 모퉁이에 김수영 문학관이 있고, 그 길이 ‘김수영 길’이다. ‘오늘이라도 늦지 않으니, 썩은 자들이여, 함석헌씨의 잡지(씨알의 소리)의 글이라도 한번 읽어보고 얼굴이 뜨거워지지 않는가 시험해 보아라. 그래도 가슴 속에 뭉클해지는 것이 없거든 죽어버려라!’고 침묵하는 그들을 향해 일갈했던 풀의 시인.

서울특별시 도봉구 해등로에 자리한 김수영 문학관. (사진=김수영 문학관 홈페이지)
서울특별시 도봉구 해등로에 자리한 김수영 문학관. (사진=김수영 문학관 홈페이지)

김수영은 1921년 당시 중인들이 살던 종로 관철동에서 태어났다. 천석지기는 아니어도 가을이면 5백석을 넘게 실은 우마차들이 대문 앞에 줄을 섰다고 하는 부호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토지조사 여파로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 아버지는 지전상을 했다. 선린상고를 다녔고, 교지 <청파>에 두 편의 시가 전한다. 1942년 동경에 유학하여 미즈시나 연극연구소를 다니면서 연출을 배웠다. 이듬해 학병징집을 피해 귀국하여 가족들과 만주 길림에서 살다가 25세에 해방을 맞아 돌아온다. 1946년 ‘묘정의 노래’를 발표하면서 그는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 그해 연희전문 영문과에 편입했으나 곧 그만두고 박인환, 임화, 김기림, 김광균 등과 교우하면서 신시론 동인으로 활동했다. 한국전쟁을 전후한 격동의 시대 그는 강제로 의용군이 되기도 했고, 거제도 포로수용소, 미8군 통역관, 선린상고 영어교사, 신문·잡지사를 거쳐 마포 구수동에서 양계를 하며 생계를 꾸렸다. “형은 글과 양계를 위해 태어났나 싶을 정도로”(동생 김수성) 시인은 닭을 잘 키웠다. 그는 도봉구 창동에 살던 식구들을 위해 계사를 짓고, 자기가 병아리 1천 마리를 40일 동안 기른 뒤에 어머니에게 분양을 해준다. ‘교외에서 불경이나 읽으면서 한적하게 살기를 원했던’ 어머니에게 드린 첫 효도였다고, 산문 ‘양계변명’에서 쓰고 있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본격적으로 참여시를 쓰기 시작한다.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하…그림자가 없다’ ‘육법전서와 혁명’ 그리고 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지, 혁명은 고독한 것인지를, 한 번도 자유를 위해 비상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묻는 ‘푸른 하늘을’ 등이 이 시기의 작품이다. 그는 1968년 2월 문학의 자유와 진보적 자세에 관해 <조선일보> 지상을 통해 이어령과 유명한 논전을 벌였으며, 4월 부산 문학세미나에서 ‘시여, 침을 뱉어라’를 강연했다. 6월15일 밤 귀가 길에 인도로 뛰어든 버스에 치어 이튿날 숨을 거둔다. 향년 48세. 내년이 그의 탄생 100년이 되는 해다. 

도봉구는 김수영 길과 김수영 문학관, 그의 본가와 묘지, 그리고 시비가 세워져 있어 그의 고향 같다. 시비에는 그의 마지막 시 ‘풀’이 새겨져 있다. “1960년대 김수영이 없었다면 1970년대 김지하, 1980년대 신경림의 민중시를 생각할 수 없다”고 문학평론가 최원식 교수는 말했다.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도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가장 정확하게 말하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나가는 것이다’(‘시여, 침을 뱉어라’ 중에서). 여기서 동시에는 ‘온몸으로’와 ‘밀고’를 동시에 하라는 것이다. 그가 남긴 난해하면서도 마력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시론이다. 

이광이

◆ 이광이 작가

언론계와 공직에서 일했다. 인(仁)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애인(愛人)이라고 답한 논어 구절을 좋아한다. 사진 찍고, 글 쓰는 일이 주업이다. 탈모로 호가 반승(半僧)이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과 인문서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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