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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와 비평가의 재판, 판사는 누구의 손을 들어줬나

[변종필의 미술 대 미술] 여전히 회자되는 ‘세기의 미술재판’

2015.04.15 변종필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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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8년 11월 25일 웨스트민스터의 엑스체커 법정에서 일어난 비평가 대 화가의 법정논쟁은 여전히 회자되는 세기의 미술재판이다.

당대 최고의 비평가와 신진화가의 싸움은 ‘예술과 비예술’, ‘표현의 자유와 한계’, ‘미술품가격 결정기준’ 등 예술과 그 가치에 대한 여러 문제를 돌아보게 하는 사건이다.

스캔들의 주인공은 19세기 중후반기 영국의 대표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던 존 러스킨(John Ruskin,1819~1900)과 동시대 화가인 제임스 맥닐 휘슬러(James McNeill Whistler, 1834~1903)이다.

◇ 최고의 비평가와 신진화가의 격돌

문제가 된 그림은 휘슬러가 1875년에 그린 <검은색과 금색의 야상곡: 떨어지는 로켓>작품이다.

회색빛 검은 번짐이 가득한 바탕에 금색이 화려한 불꽃처럼 밤하늘을 수놓은 그림으로 뚜렷한 형상이나 주제의식이 모호하다.

휘슬러, 검은색과 금색의 야상곡, 1875, 목판에 유채, 60.3x46.6cm, 디트로이트 인스티튜트 오브 아트
휘슬러, 검은색과 금색의 야상곡, 1875, 목판에 유채, 60.3x46.6cm, 디트로이트 인스티튜트 오브 아트

이 그림은 1877년 런던의 그로스베너 갤러리에 200기니(1663년~1813년까지 영국에서 사용한 금화, 지금의 파운드)라고 제시한 판매금액과 함께 전시되었다.

러스킨은 이 그림을 보고 자신이 매월 일반대중에게 보내는 편지에 그림에 대한 비평문을 썼다.

교양 없고 자만심이 가득한 화가가 채색도 끝내지 않은 채 엉성하고 조잡한 구성으로 그린 마구잡이 그림을 200기니 요구하는 어릿광대를 보게 될 줄 몰랐다며 혹평했다.

스케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그림을 대단한 그림인 양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고 평가하며 대중의 얼굴에 물감을 던진 그림이라며 불쾌함을 드러냈다.

러스킨의 악평을 전해들은 휘슬러는 격분해서 러스킨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당시 러스킨은 비평의 예언자로 대중의 존경을 받는 영향력 있는 비평가였다. 그에게 호평을 받은 화가는 유명화가가 됐고, 반대로 혹평을 받은 화가는 대중적 인지도를 갖지 못할 만큼 러스킨의 비평은 미술계에 절대영향을 끼쳤다.

러스킨은 고딕미술을 가장 가치 있는 예술로 여겼다. 티치아노를 좋아했고, 보티첼리를 연구하며 고전미술이 지닌 미적 아름다움을 역설했다.

제임스 맥닐 휘슬러는 미국태생으로 가정사정상 러시아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스물한 살에 파리에서 화가로 데뷔했다. 이후 영국으로 이주하여 활동한 신진작가였다.

타고난 감각으로 자기세계를 표현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자기중심적 사고와 자유로운 삶을 지향했던 보헤미안이었으며, 멋진 옷차림으로 런던을 활보하는 패셔니스타기도 했다.

러스킨과 휘슬러가 법정에서 만났을 때 러스킨은 59세였고, 휘슬러는 44세였다. 당대 두 사람의 사회적 위치는 극과 극이었다. 러스킨은 당대 최고 비평가로 지지자들이 넘쳐났지만 휘슬러는 신경향의 작품을 시도하는 몇몇 화가들에게 동조를 받는 정도였다.

성격 역시 러스킨은 논리적이고 차분한 반면 휘슬러는 다혈질이었다. 사회적 성공에서도 러스킨은 부유했고, 휘슬러는 가난했다. 이렇듯 모든 부분에서 비교되는 두 사람의 사회적 위상으로 볼 때 법적 논쟁은 시작부터 러스킨의 승리로 보였다.

◇ 예술의 사회적 기능이 먼저냐, 예술을 위한 예술이 중요하냐?

두 사람의 논쟁은 그림 한 점의 문제를 넘어 ‘예술의 사회적 기능’ 이론과 ‘예술을 위한 예술’ 이론이 대립하는 양상으로 확대되며 빅토리아 시대 최고의 관심 대상으로 떠올랐다.

러스킨은 예술 사회적 기능의 역할을 지니지 못한 그림은 예술작품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어떤 도덕적 역할도 하지 못한 그림은 예술로써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다.

러스킨이 휘슬러의 그림을 예술작품으로 인정하지 않은 이유는 고딕미술의 표현형식과 거리가 멀고, 사회적 기능이 없는 점이 컸다.

휘슬러의 생각은 정반대였다. 그는 러스킨이 미술에서 중요하게 여겨온 관찰과 사실주의 기법을 처음부터 무시했다.

또한, 예술작품에서 도덕적 역할을 강조하는 풍토도 거부했다. 예술은 예술 그 자체로서 인정되어야 할 뿐 사회적 역할이나 도덕적 역할의 여부로 예술작품을 평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휘슬러는 주관적 해석에 의한 그림은 예술 그 자체로써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며 화가의 주관성을 중시했다. 예술의 자율성을 강조하며, 그림은 예술을 위한 예술로써 존재가치가 충분함을 피력했다.

이는 휘슬러의 생각이자 당시 프랑스 화단에 새로운 운동을 전개한 신경향의 화가들이 내세운 예술이론이기도 했다.

러스킨은 휘슬러가 주장하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론 자체를 부정했다. 그래서 휘슬러의 주장에 설득되거나 동요되지 않았다.

예술의 사회적 기능으로 도덕성을 강조했던 러스킨에게 사회적 기능을 상실한 휘슬러의 그림은 그저 하찮은 물건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비판에는 당시 신경향의 표현기법을 시도한 동시대 화가들까지 포함되었다.

그런데 재판에서는 누가 이겼을까?

법정에서 두 사람은 한 치의 양보 없이 대립했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휘슬러의 그림에 관심이 모아졌다. ‘그림주제, 제작시간, 표현기법, 그림가격’ 등 그림을 둘러싼 내외적인 부분에 논쟁이 집중되었다.

러스킨(뇌염 때문에 직접 자신을 변호하지 못한 처지였다)의 변호를 맡은 법무장관이 휘슬러 그림의 제작시간을 트집 잡았다.

“이 그림을 해치우는데 얼마나 걸렸죠?”

휘슬러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하루나 이틀정도면 충분 합니다”

이 대답에 러스킨의 변호인단은 아무 의미 없이 물감을 이리저리 흩뜨려 놓은 성실함 없는 그림에 어떻게 200 기니의 가격을 제시할 수 있느냐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이에 휘슬러는 작품의 예술성은 단지 그림을 제작하는 데 걸린 시간으로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니라, 일생을 거쳐 갈고닦은 지식의 폭과 깊이까지 포함되어 있다고 반박했다.

재판은 휘슬러의 승리로 끝났다. 배심원은 휘슬러의 손을 들어 표현의 자유와 화가로서 명예를 지켜줬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휘슬러는 소송에서는 이겼지만, 정작 원하던 손해배상금은 기각되고 말았다.

받은 금액은 1파딩(당시 4분의 1페니)이 전부였다. 휘슬러의 승리는 명목상이었을 뿐 재판비용을 갚느라 결국 파산하고 말았다.

러스킨은 어땠을까?

그는 지지자들이 소송비용을 지불해줘 재판비용의 부담에서는 벗어났지만, 최고 비평가로서 쌓아올린 명성과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당대최고의 비평가로서 지닌 위상에 도전한 신진화가의 도전을 가소롭게 여겼던 터라 패소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급기야 비평가로 소송비용을 청구 받지 않은 상태에서는 비평할 권리가 없다며 옥스퍼드 미술교수직까지 그만 뒀다.

결국, 비평가와 화가 사이의 이틀간 싸움은 누구도 승리하지 못한 채 한 사람에게는 금전적 고통을, 한 사람에게는 명성과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사건으로 끝나고 말았다.

대신 이 사건은 현대미술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예술의 사회적 기능’과 ‘예술을 위한 예술’의 대립은 서로를 비난할 수 없는 차이와 상대성을 지녔음을 일깨워준다.

변종필

◆ 변종필 미술평론가

문학박사로 2008년 미술평론가협회 미술평론공모에 당선, 200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에 당선됐다. 경희대 국제캠퍼스 객원교수, 박물관·미술관국고사업평가위원(2008~2014.2) 등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회원 겸 편집위원, ANCI연구소 부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학출강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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