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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도 스펙이다

영화 ‘인턴’을 보고 나이듦에 대해

2015.10.12 한기봉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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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소소한 할리우드 영화 ‘인턴’을 보았다. 영화를 보고나서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다, 라고 자발적으로 남 걱정까지 하게 해준 드문 영화였다. 사람들 감성은 비슷한가 보다. 이 영화가 요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인터넷에는 주인공이 말한 명언들이 많이 올라와 있다. 소품 같은 영화지만 대작들의 틈바구니에서 선전해 누적 관객이 200만 명을 넘어섰다.

영화는 창업 1년 만에 성공한 30세 여성 CEO 줄스(앤 해서웨이)가 경영하는 온라인 패션 쇼핑몰 회사에 시니어인턴으로 들어간 70세 사원 벤(로버트 드 니로)의 이야기이다. 영화는 잔잔하고 따스하면서 유쾌하고 울림이 있다. 무엇보다 관객을 힐링한다.

이 영화에 공감을 느끼는 데는 세대 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현업에서 은퇴한 사람들은 주인공의 삶의 방식을 부러워하면서 스스로를 한번 되돌아보게 된다. 무엇보다도 ‘버릇없는’ 젊은이들과 어울려 살아가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잃지 않는 주인공의 처신을 보면서 반성도 한다.

젊은이들이 남긴 평을 읽어 보았다. 그들은 그들대로 나이 먹은 사람의 삶의 지혜와 경륜, 그 힘과 가치에 대해 느낀 것 같다. 저렇게 멋있게 나이를 들 수도 있구나, 나도 저렇게 늙어가야지, 라는 감상평이 많았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모처럼 관객들에게 간접적으로 세대 간 이해와 화해를 시켜준 작품이다.

요즘 청년실업 문제로 인한 노동시장 재편과 임금피크제를 둘러싸고 우리 사회의 세대 간 갈등과 논쟁이 노출되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이 영화는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 어쩌면 연봉보다 훨씬 근본적이고 귀중한 가치를 시사해준다.

“경륜은 결코 늙지 않는다.” 영화 ‘인턴’의 영어포스터.
“경륜은 결코 늙지 않는다.” 영화 ‘인턴’의 영어포스터.

전화번호부를 인쇄하는 아날로그 회사에서 부사장까지 오르며 40년을 일한 벤은 이전 성장세대의 전형적 인물이고, 인터넷쇼핑몰로 성공한 줄스는 21세기 IT시대의 상징적 인물이다. 장소도 그렇다. 벤이 일했던 회사 터에는 인쇄기 대신 줄스의 쇼핑몰 컴퓨터가 자리잡았다. 
 
기업 이미지를 위해, 정부의 시책에 따라 시니어인턴을 고용한 줄스는 벤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말쑥한 정장에 수십 년 닳고 닳은 명품 가방을 들고 나타나 컴퓨터도 제대로 켜지 못한 벤은 그들에겐 그저 그런 거추장스러운 ‘꼰대’였을 뿐이다. 그런 벤이 어른으로서 인정받고 줄스마저 어른으로 만든다는 이야기다.

그는 우리 영화 ‘국제시장’의 아버지 모습과는 다르다. 그는 한번도 자신의 경륜과 나이를 내세우지 않는다. 그저 솔선수범했고 간섭하지 않되 묵묵히 지켜보기만 하다가 도움이 필요할 때 손을 내밀고 용기를 북돋워 준다. 가장 인상적인 대사로 기억되는 “손수건의 주용도는 남에게 빌려주는 거야”라는 말에 그의 철학이 함축된다. 결코 상사보다 먼저 퇴근하지 않고 상사의 지시에 토를 달지 않지만 지친 상사를 위해 말없이 치킨수프를 사다준다.
 
벤은 개인적으로도 참 멋진 노인이다. 평생 사랑한 아내를 먼저 보낸 홀애비는 “내 삶에 난 구멍을 메꾸기 위해 인턴에 지원”했고 “은퇴 후의 삶은 끊임없는 창조의 연속”이라고 생각한다.

열정이 사그라지지도 않았다. “뮤지션에게 은퇴란 없는 거야. 음악이 그치면 잠시 멈출 뿐, 내 안에는 여전히 음악이 살아있지.” 벤은 줄스를 위해 젊은 직원도 생각 못한 ‘범죄’를 태연히 저지르는 낭만적 모험으로 모두를 기쁘게 해준다. 회사에서 마사지사로 일하는 할머니하고 연애도 한다. 다림질하듯 질서정연한 자신의 공간과 삶의 방식을 유지하면서도 갈 곳이 없는 다른 인턴을 집에 들이는 너그러움도 있다.
 
줄스는 너무 오지랖이 넓고 경륜이 풍부한 그가 부담스러워 자신의 운전기사 직에서 다른 자리로 발령을 낸다. 하지만 그의 부재가 주는 공허함을 바로 알아챈다. 자신의 이기적 판단에 용서를 구하고 가슴을 열고 조언을 구한다. 그녀는 말한다. “덕분에 처음으로 어른처럼 생각하고 말하게 됐다.”

영화는 줄스와 벤의 이해와 화해를 그린 것이지만 주니어보다는 시니어들이 많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의 벤들은 사막에서, 탄광에서, 전쟁터에서 빛바랜 가족사진 한 장에 눈시울 적셔가며 난닝구 빤쓰 빨며 성공신화를 이룬 국제시장의 아버지들이다. 하지만 영광은 영광일 뿐이다. 이제는 나의 희생이, 나의 연륜이 더 이상 평생의 훈장으로 유효하지 않은 복잡한 사회구조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직시하고 깨달아야 한다.
 
나잇값은 “내가 너희들만할 때는”으로 시작되는 권위가 아니다. ‘징징대는’ 젊은이들이 도통 답답하겠지만, 그들의 정서와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지켜보고 관용하며 필요할 때 ‘손수건’을 내밀면 된다. 지금의 사회경제 현실은 과거와는 크게 다르고 미래는 어쨌든 젊은이들의 것이니까. 연부역강(年富力强)이고 청출어람(靑出於藍)이며 그래서 후생가외(後生可畏)인 것이다. 지금은 개천에 용 나오기 어렵고, 구슬땀 비지땀을 흘린다고 해서 집안을, 가정을 일으키기가 전 세대보다는 힘든 세상인 것이다.

나이는 권위가 아니라 선하고 좋은 ‘스펙’이 될 수 있다는 걸 영화는 말하고 싶어 한다. ‘경륜은 결코 늙지 않는다(Experience never gets old)’라는 영어 카피처럼. 영화에서 시니어인턴 채용담당 부서명이 ‘재능구매부’ 였던 게 인상적이다. 우리 사회도, 기업들도 임금나누기에만 골몰할 게 아니라 시니어들의 경륜과 지혜를 존중하고 그들이 주니어들을 도와가며 진정 어른답게 처신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주는 데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좋겠다. ‘개저씨’라는 말은 서로 얼마나 민망한가.   

“네 젊음이 네 노력의 보상이 아니듯, 나의 늙음도 나의 과오에 의한 것이 아니다.” 영화로도 나온 박범신의 소설 ‘은교’에서 많이 알려진 구절이다. 젊음이나 늙음이나 신이 내린 상도 벌도 아니다. 주름살은 그저 중력의 작용이며 ‘자연’에 다름 아닌 것이다. 시니어들에게 말하고 싶다. 나이 70에 ‘인턴’처럼 너그럽게 살아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꽃이 진 자리에는 새 꽃이 피는 법이다. 호주머니에는 두 장의 손수건을 갖고 다니자. 한 장은 나의 눈물을 위해, 한 장은 남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한기봉

◆ 한기봉 언론인

한국일보에서 30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편집국부국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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