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36조(벌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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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거나 이를 병과할 수 있다. <개정 2011. 12. 2.>
1. 저작재산권, 그 밖에 이 법에 따라 보호되는 재산적 권리(제93조에 따른 권리는 제외한다)를 복제, 공연, 공중송신, 전시, 배포, 대여, 2차적저작물 작성의 방법으로 침해한 자
2. 제129조의3제1항에 따른 법원의 명령을 정당한 이유 없이 위반한 자 -
②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거나 이를 병과할 수 있다. <개정 2009. 4. 22., 2011. 6. 30., 2011. 12. 2.>
1. 저작인격권 또는 실연자의 인격권을 침해하여 저작자 또는 실연자의 명예를 훼손한 자
2. 제53조 및 제54조(제90조 및 제98조에 따라 준용되는 경우를 포함한다)에 따른 등록을 거짓으로 한 자
3. 제93조에 따라 보호되는 데이터베이스제작자의 권리를 복제ㆍ배포ㆍ방송 또는 전송의 방법으로 침해한 자
3의2. 제103조의3제4항을 위반한 자
3의3. 업으로 또는 영리를 목적으로 제104조의2제1항 또는 제2항을 위반한 자
3의4. 업으로 또는 영리를 목적으로 제104조의3제1항을 위반한 자. 다만, 과실로 저작권 또는 이 법에 따라 보호되는 권리 침해를 유발 또는 은닉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자는 제외한다.
3의5. 제104조의4제1호 또는 제2호에 해당하는 행위를 한 자
3의6. 제104조의5를 위반한 자
3의7. 제104조의7을 위반한 자
4. 제124조제1항에 따른 침해행위로 보는 행위를 한 자
5. 삭제 <2011. 6. 30.>
6. 삭제 <2011.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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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점을 찍어야 그림이 되나…점묘법의 대가들
미술사에 등장하는 많은 기법 중 점묘법은 화가들이 가장 즐겨 사용한 표현기법의 하나이다.
19세기 프랑스 미술의 변혁 시기를 열었던 인상주의 화풍에 반대하여 과학적 이론을 회화에 접목한 기법으로 분할주의, 혹은 분할법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점묘법을 미술사에 기록될 수 있게 한 유파는 신인상주의이고, 이 기법을 정착시킨 화가는 분할주의의 맞수로 불리는 조르주 쇠라(Georges-Pierre Seurat, 1859~1891)와 폴 시냑(Paul Signac, 1863~1935)이다.
◇ 쇠라, 꼬박 2년간 점 찍어 대작 <라 그랑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완성
신인상주의 창시자로 불리는 조르주 쇠라의 점묘법은 과학적 이론을 회화에 접목한 기법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쇠라가 처음 이 기법을 도입하게 된 것은 색채의 과학에 매료된 이후이다. 1883년 당시 과학자들 사이에서 동일계열의 색이나 보색(반대색)을 분리한 다음 병치하면 색들이 시각적으로 통합되어 선명한 색을 지각할 수 있다는 주장에 공감한 이후 과학이론을 그림에 적용했다.
예컨대 빨간색과 파란색을 병치하면 녹색을, 빨간색과 주황색을 병치하면 다홍색을 시각적으로 느낄 수 있다는 논리이다. 팔레트에서 혼색하지 않고, 균일한 크기의 작은 원색을 점으로 찍어 그것을 보는 사람의 눈과 망막에서 혼색이 이루어져 그림에는 없는 색을 느끼게 하는 회화 기법이다.
이러한 이론을 극대화해서 적용한 그림이 쇠라의 최고 걸작 <라 그랑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이다. 이 그림은 인상파 마지막 전시회에 출품하여 자신이 연구하는 점묘법을 한층 발전시켜 색의 분할과 대비를 통해 신인상주의 화풍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린 작품으로 점묘법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뒤따라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1883년부터 1885년까지 꼬박 2년 동안 커다란 화폭에 작은 색점을 한 점 씩 찍는 고된 제작과정을 통해 완성된 작품으로 쇠라가 생전에 10년의 작가활동 중 제작한 작품이 7점밖에 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해준다.
이 작품을 완성하기 전에 부분적으로 연습한 그림과 색채 드로잉만 40점이 넘을 정도였다.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쇠라가 하나의 작품을 위해 얼마나 많은 연구와 까다로운 제작과정을 고집했는지 실감할 수 있다.
<라 그랑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는 그림 전체가 흥미로운 요소들로 가득하지만, 특별히 눈여겨볼 것은 그림의 가장자리이다. 일반적인 미술책이나 도록에 실린 도판에서는 인쇄의 방법과 질에 따라 쇠라가 시도한 점묘법을 시각적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러나 원작의 가장자리는 점묘법의 효과를 인지할 수 있는 수많은 색점들로 가득하다. 마치 점묘법의 원리를 보여주기 위해 암호처럼 밑바탕에 색점을 병치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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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그랑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와 테두리 부분 확대 |
현재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를 대표하는 이 그림은 48명의 사람과 동물(개 세 마리, 원숭이 한 마리)이 어울려 한가한 일요일 오후를 만끽하는 평화로움을 감상하는 관객에게 선물한다. 1924년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 걸린 이후 딱 한차례 다른 미술관에 대여해 주었다가 화재로 소실될 뻔한 아찔한 사건을 겪은 후 다시는 시카고를 떠나본 적이 없는 그림이기도 하다.
쇠라의 논리와 병치 효과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못했지만, 그의 점묘법은 동시대와 후대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점묘법의 영향을 받은 여러 화가 중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1903)는 쇠라의 점묘법에 심취하여 인상파 기법에 점묘법을 적용하여 색다른 작업을 이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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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냑, 점묘법을 미학적 시각으로 전환
신인상주의를 대표하는 또 한 사람의 화가 폴 시냑(Paul Signac, 1863~1935)은 쇠라보다 대중적 인지도는 낮지만, 쇠라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점묘법을 대중적 미감으로 발전시키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사실 시냑이 처음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인상주의 화풍이었다. 18세에 모네의 전시를 보고 그의 화풍에 매료되어 인상주의 화풍을 추종했다. 그러다가 쇠라의 체계적인 작품제작방식과 과학적 이론을 도입한 기법을 보고 그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 점묘기법을 자신이 추구하는 작품세계의 핵심 기법으로 삼았다.
특히나 점묘법이라는 용어 대신 분할주의라는 명칭을 선호하며 자칫 기법적 차원에 머무르기 쉬운 점묘법을 미학적 시각으로 전환시킨 이론적 대변자 역할을 했다. 그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경험주의적 사실주의와 다르게 그림은 화가의 노력과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과학적 논리와 수학적으로 계산된 효과를 끌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1899년에 미술과 광학에 대한 연구 비평문인〈외젠 들라크루아에서 신인상주의까지>는 여전히 설득력 있는 글로 평가될 만큼 분할주의의 해설서로 인정받는다. 쇠라처럼 시냑 또한 많은 화가에게 창조적 영감을 주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20세기 최고의 화가로 꼽히는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이다. 마티스는 시냑을 자신의 스승으로 생각했다.
시냑의 점묘는 쇠라로부터 배운 것이지만, 쇠라의 색점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색점의 크기가 다르다. 쇠라 그림은 색점과 색점 사이에 빈틈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균일한 작은 점이 화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면 시냑의 작품은 상대적으로 눈에 띌 만큼 색점이 듬성듬성하다.
시냑의 대표작인 1909년의 <아비뇽의 교황청>을 보면 무수히 많은 붓 터치가 마치 모자이크처럼 펼쳐져 있다. 석양의 붉은 노을이 강물에 은근하게 반사된 풍경이 매우 아름답다. 여행을 통해 프랑스의 아름다운 자연풍광을 화폭에 옮긴 시냑의 점묘는 쇠라의 점묘와는 다른 감성의 여운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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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냑, 아비뇽의 교황청.1909. 캔버스에 유채, 73.5x92.5cm, 오르세미술관 |
살펴본 대로 두 사람은 점묘법이라는 같은 개념의 기법을 자신들의 작품세계를 구축하는 핵심으로 삼았지만, 표현방법에서는 미묘한 차이를 지녔다. 두 화가의 색점을 동양화에서 산수화를 그릴 때 사용한 준법에 비유하자면 쇠라의 점묘는 점자준에 가깝고, 시냑의 점묘는 미점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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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라와 시냑은 삶의 방식에서도 차이가 있다. 쇠라가 폐쇄적인 삶의 방식을 고집했다면, 시냑은 개방적인 삶을 추구했다. 쇠라는 사생활을 철저하게 비밀로 한 화가로 유명하다. 연애하고, 아이까지 낳았지만, 가까운 지인들조차 그의 처지를 알지 못할 만큼 사생활의 노출을 꺼렸다.
이러한 태도는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은 채 자신만의 그림 세계를 지켜나가고 싶어 한 그의 의지와 연결된다. 한번은 왜 후계자를 키우지 않느냐는 질문에 “후계자를 두는 것은 나의 독창성을 소멸시키는 것이다.”라고 응대할 만큼 쇠라는 자신의 예술을 독자적 위치에 올려놓을 일에만 몰입했다.
시냑은 언제나 넘치는 자신감과 명료한 논리성으로 상대방을 설득하는 스타일이었다. 선원출신답게 유럽의 여러 해안지방을 여행하며 풍경을 화폭에 옮기는 것을 즐겨했다. 철저한 자기만의 독립생활을 견지한 쇠라에 견주어 시냑은 친구들을 집에 초대하며 교우하는 것을 즐길 만큼 사교적이었다. 이러한 활동적 성격 덕분인지 시냑의 이론과 양식은 젊은 세대의 화가들에게 전파력이 강했다.
3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쇠라의 생애는 비극적이지만, 그의 예술성은 <라 그랑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와 함께 언제나 환호와 갈채 속에 놓여있다.
시냑은 71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쇠라가 프랑스 화단에 뿌린 점묘법이 정착되고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쇠라의 뒤를 이어 실질적인 점묘법의 전도자로 역할을 했다.
궁극에 쇠라와 시냑 두 화가는 서로의 작품에 관한 비평과 발전적 제안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분할주의가 보편적 기법으로 확대될 수 있도록 기여했다.

◆ 변종필 미술평론가
문학박사로 2008년 미술평론가협회 미술평론공모에 당선, 200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에 당선됐다. 경희대 국제캠퍼스 객원교수, 박물관·미술관국고사업평가위원(2008~2014.2) 등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회원 겸 편집위원, ANCI연구소 부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학출강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