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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면서 큰다!… 영국 풍경화에서는?

[변종필의 미술 대 미술]사실적인 컨스터블 VS 추상적인 터너

2016.02.12 변종필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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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에서 풍경화는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종교화, 역사화, 초상화 등에 비해서 그다지 중요한 장르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저 종교화나 초상화의 배경으로 그려졌을 뿐 풍경을 독립적 주제로 삼을 만큼 중요하지 않았다.

따라서 평화로운 전원풍경이나 황홀한 풍경의 그림은 역사화나 종교화보다 예술적 깊이나 가치가 낮은 것으로 취급받았고 풍경화를 전문으로 그리는 화가들의 위상도 그만큼 낮았다.

그러나 18세기 말에 이르러 차별을 극복하고 풍경화의 권위를 높이는데 공헌한 화가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 조샙 말로드 윌리엄 터너 (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와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 1776~1837)은 미술사에서 영국의 풍경화를 중요한 반열에 올려놓은 화가로 손꼽힌다.

동시대에 활동했던 두 사람은 지극히 대조적인 화풍으로 자신만의 확고한 풍경화법을 구축했다. 평생 사실적 자연풍경을 고집한 컨스터블과 추상적 자연풍경을 시도한 터너의 대조적 화풍은 마치 영국 초상화의 맞수였던 게인즈버러와 레이놀즈를 보는 것만큼이나 흥미롭다. 50여 년 동안 지속한 두 사람의 경쟁은 영국풍경화의 영원한 맞수로 불리만 하다.

태어난 환경은 서로 달랐다

터너는 런던의 가난한 이발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 학교를 다니지 않았지만 빼어난 그림솜씨로 10대부터 그림을 판매하고, 20대에 왕립 아카데미 회원이 될 정도로 빠른 성공가도를 달렸다.

초기의 부드럽고 사실적 풍경에서 유럽여행 후 점진적으로 추상적 풍경화로 전환하며 영국 풍경화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화풍을 정립했다.

컨스터블은 부유한 제분업자의 아들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화가의 길을 탐탁치 않게 생각한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림에서도 거친 필치와 세밀한 묘사위주의 화풍은 당시 아카데미 풍경화를 중시한 미술계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실제로 컨스터블은 39세 이전에 그림을 팔아본 경험이 없을 만큼 성공이 늦었다. 상상에 근거한 풍경화를 경멸하며 직접 체험한 자연을 성실하게 그리는 것이 화가의 진정한 의무라고 생각하고, 평생 고향(서프포크)의 자연만을 모티프로 삼아 그림을 그렸다.

두렵고 위협감을 주는 터너의 화풍

터너는 역사상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전통 풍경화가 중 한 명인 클로드 로랭을 자신이 뛰어넘어야 할 대상으로 삼으며, 언제나 로랭의 그림과 비교되는 것을 원했다. 극히 대조적인 화풍으로 자신의 풍경화가 지닌 독자성을 돋보이게 하려는 야심이 컸다.

<그림 1> 터너 <눈보라 속의 증기선> 1842. 캔버스에 유채. 91×122cm
<그림 1> 터너 <눈보라 속의 증기선> 1842. 캔버스에 유채

터너의 풍경화는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 인간의 존재가 보잘것없음을 느끼게 한다. 폭풍우나 눈보라 속의 위태롭게 놓여있는 상황 연출로 보는 사람의 마음을 불안과 공포로 이끈다. 이러한 느낌은 온전히 미술가의 붓끝에서 창조되는 것임을 강조한다. 이는 그의 대표작 <눈보라속의 증기선>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림 1>

<눈보라 속의 증기선>은 60대 후반의 나이에 이른 터너가 바다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돛대에 몸을 묶어 놓은 채 몇 시간 동안 거친 파도를 직접 체험하고 그린 그림이다. 폭풍과 파도, 휘몰아치는 비바람, 위태로운 배 등의 모티프를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소용돌이 구도’(터너가 즐겨사용한 구도)로 그렸다.

터너의 그림은 <노예선>(1840)과 같은 문제작으로 당시 수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거칠고 강렬한 필치, 두렵고 위협감을 주는 분위기로 보는 이를 극도의 두려움 속에 몰아넣는 힘을 지녔다고 평가받았다. <그림2>

<그림 2> 터너 <노예선> 1840. 캔버스에 유채. 90.8×122.6cm
<그림 2> 터너 <노예선> 1840. 캔버스에 유채

 무엇보다 그의 작품은 현실이 아닌 그림이라는 안도감에서 오는 감동을 주는데 이것이 그가 강조했던 자연의 무한성에서만 느낄 수 있는 숭고미다. 전통화법을 벗어나 자신만의 새로운 화풍을 시도한 터너의 예술적 성과는 당대 최고의 비평가인 러스킨의 언급처럼 ‘우리에게 세상을 보는 새로운 방식을 알려 준 것’에 있다.

터너는 말년에 아무리 비싼 값을 준다 해도 자신이 아끼는 걸작만은 팔지 않았다. 그리고 지인들과 연락을 끊고 이름까지 바꾸며 은둔생활을 했다. 마치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자연의 세계를 화폭에 담고자 했던 의지처럼 대중으로부터 자신을 멀리하며 살았다.

사실적 풍경을 추구했던 컨스터블 화풍

터너가 전통 화풍을 반대적인 화풍으로 극복하고자 했다면, 컨스터블은 터너의 추상적 풍경화를 비판하며, 오히려 정면도전을 선택했다.

그는 로랭과 같은 전통 풍경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자연의 진실을 담고자 했다. 사실 로랭의 풍경화는 그리는 방식이나 채색방법에서 일정한 수법을 익히면 가능한 화풍이다. 컨스터블은 이러한 관념적이고 인위적인 화풍을 경멸하며 자연의 색조가 인위적 색조와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증명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의 풍경화는 어떤 충격적 장면이나 환상적 분위기를 연출하지 않는다. 극히 평범하고 정직하다. 컨스터블은 ‘상상 속의 풍경은 실제의 풍경을 따라갈 수 없다’고 여겼다.

언제나 자연을 철저하게 관찰하고 스케치한 것을 화실로 돌아와 캔버스에 옮기고 스케치보다 훨씬 공들여 완성했다. 자신이 본 것을 가능한 한 충실하게 재현하는 데 신경을 집중했다. 컨스터블이 1821년에 그린 <건초수레>는 이러한 조형세계를 엿볼 수 있는 대표작이다. <그림 3>

<그림 3> 컨스터블 <건초 수레> 1821. 캔버스에 유채. 130×185 cm

<그림 3> 컨스터블 <건초 수레> 1821. 캔버스에 유채

 <건초수레>는 컨스터블을 단숨에 스타의 반열로 끌어올린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영국의 로열아카테미 전시회에 출품했을 때 일차적으로 호평을 받기는 했지만, 정작 이 작품에 열광한 것은 프랑스 미술계였다.

<건초수레>를 구매한 화상이 파리 살롱에 작품을 전시했는데 대상을 받는 이변이 일어났다. 그때까지 갈색 위주의 풍경화에 익숙해있던 프랑인에게 자연의 싱그러운 색(초록색)을 과감하게 사용한 컨스터블의 그림은 충격이었다.

영국인에게는 그저 평범하던 그림이 프랑스인에게는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풍경세계를 안겨준 셈이다. 파리의 사람들은 <건초수레>를 보면서 순간 자연 속에 빠져드는 몰입감을 느꼈다.

일반관람객뿐만 아니라 프랑스 낭만주의의 대표화가인 들라크루아 (Delacroix, 1798~1863)도 <건초수레>에 자연의 생생함을 살리기 위해 초록색 나뭇잎에 작은 붉은 점을 찍은 보조 색조를 보고 자신의 <키오스섬에서의 학살>그림을 수정할 정도였다.

그렇게 컨스터블은 그림 하나로 프랑스 미술인에게 존경받는 화가가 되었다. 허세를 가장 큰 악덕이라며 “꾸밈없는 진실을 옮기는 화가가 자리할 곳은 충분하다”라고 말했던 컨스터블은 자연(특히 하늘)을 스케치할 때 날짜, 방위, 기상상태, 구름의 움직임 등을 상세하게 기록할 만큼 세심하고 진실한 눈으로 대했다.

<그림 4> 컨스터블 <웨이마우스 만과 요르단 언덕> 1816. Oil on canvas, 53×75 cm
<그림 4> 컨스터블 <웨이마우스 만과 요르단 언덕> 1816.

 이 같은 태도는 변화무쌍한 영국의 하늘을 고스란히 옮긴 <웨이마우스 만과 요르단 언덕>(1816)에서 잘 드러난다. <그림 4> 그의 풍경화는 말년으로 갈수록 한층 단순하면서도 붓 터치가 거칠어지지만, 여전히 어떤 상상이나 가식, 허세보다 진실과 성실로 자연을 대하는 태도만은 변하지 않았다.
컨스터블은 유명해지면서 지인들로부터 프랑스에서 활동을 권유받았지만, 폐결핵에 걸린 아내의 병간호와 언어도 통하지 않은 타국에서 부자로 살기보다 조국에서의 평범한 삶이 더 가치 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렇게 일생 고향을 떠나지 않으며 ‘하늘, 물레방아, 버드나무, 판잣집, 마차, 농부, 개’ 등 고향의 일상에서 마주하는 풍경을 화폭에 옮기는 데 전념했다.

터너는 사실적 묘사보다 빛과 색채로 자연의 웅장한 인상을 담는 화풍으로 프랑스 인상주의 회화의 토대가 되었고, 컨스터블은 소박한 전원 풍경을 통해 인간의 원초적 휴머니즘을 성실하게 표현한 화풍으로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림 5> 터너 <노햄 성-해돋이>. 1845. 캔버스에 유채. 91×122cm / 모네 <인상-해돋이> 1872. 캔버스에 유채. 48×63cm
<그림 5> 터너 <노햄 성-해돋이>1845.                모네 <인상-해돋이> 1872.

 인간과 자연 사이에 생긴 감정을 대조적 화풍으로 맞선 두 화가의 경쟁은 궁극에 프랑스의 낭만주의와 인상주의 화풍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에서 자부심을 가질만하다. <그림 5>
 

변종필 ◆ 변종필 미술평론가

문학박사로 2008년 미술평론가협회 미술평론공모에 당선, 200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에 당선됐다. 경희대 국제캠퍼스 객원교수, 박물관·미술관국고사업평가위원(2008~2014.2) 등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회원 겸 편집위원, ANCI연구소 부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학출강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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