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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여행, 친구의 농장에서

2016.10.24 한기봉 국민대 초빙교수/언론중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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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고등학교 동창 밴드에 은행알을 따러 오라는 한 동창생의 글이 올라왔다. 사업을 하는 그는 충남 태안반도 끄트머리에서 작은 농장을 취미 삼아 경작한다. 같은 반에서 공부하지도 않았고, 졸업 후에 개인적으로 본 적도 없다. 가끔 그가 밴드에 올리는 나무 이야기 때문에 마음속으로만 좋아하고 있었다.

사실 동창임을 빌미로 혼자라도 불현듯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나는 한참을 망설였다. 가을바다, 항구, 농장, 노동, 일박이일, 그리고 밴드에 올린 술병 사진이 계속 내 마음을 따라다녔다. 나는 사흘간 고민하다 과감하게 할 일을 내던지고 길을 떠났다. 

그 유혹에 낚인 사람은 나 말고도 6명이 있었다. 하지만 은행 털 일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는 걸, 그리고 품앗이 정신으로 먼 길을 달려온 게 아니라는 걸 이심전심으로 서로 헤아리고 있었으니, 부른 자나 낚인 자나 애초 불온하긴 마찬가지였다.

태안반도 북단에 비쭉 솟아나온 만대항 방면으로 가는 길은 가을이 막 중턱을 넘고 있었다. 좁고 단정한 시골길은 다정하게 초행의 이방인을 맞았다. 대문도 없이, 이름마저 소박한 장수농장 문패 아래에 철 잊은 붉은 장미 몇 송이가 파란 하늘에 점을 찍었다.

도심의 은행나무는 키가 크고 열매도 많이 달리지 않지만, 나지막한 키에 품이 넉넉한 농장의 무공해 은행나무는 은행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가지가 휘었다. 떨어진 은행알 더미 사이로 하얀 기름나물과 노란 사데풀, 자줏빛 산부추와 보라색 용담이 수줍게 고개를 내밀고 있다.

은행을 털어 냄새 나는 껍질을 벗기고 말리고 선별하는 노동은 초보자들에게 쉬운 작업은 아니었다. 하지만 수 시간 노동을 빙자한 여행이 준 보상은 차고 넘쳤다.

언덕길을 넘나들며 따라오는 바다, 알맞은 온도로 불어오는 해풍, 누렇게 익은 논, 편안하게 낮은 능선, 물들기 시작한 단풍, 울긋불긋 촌스런 슬레이트 지붕을 인 농가들, 횟집 대여섯 개뿐인 소박한 어항, 아침밥을 먹다가 들이닥친 외지인에게 얼큰한 김칫국을 해장하라며 끓여준 식당의 노부부, 아직도 다방과 이용원 간판이 떡 버티고 있는 면소재지의 풍경….

영적인 작은 경험을 잊을 수 없다. 나는 어두운 밤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문득 내 안에서 미동이 일어났다. 오랫동안 얽혀있던 어떤 실타래가 뚝 끊어지며 내 몸을 빠져나와 바람에 날아가는 것 같았다. 지금도 그 이탈이 무언지 정확히 표현할 수 없다. 굳이 그 정체가 뭐냐고 스스로 다그친다면 내 안의 오욕칠정과 질곡과 번민, 세상살이 이치에 대한 순간의 어떤 너그러운 각성 같은 것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을 거 같다.

떠나오길 잘했다고 나는 여러 번 되뇌었다. 동행은 여럿이었지만 결국은 나 혼자였다.

떠나라고 말하는 계절이다. 정부와 지자체들도 이벤트가 가득한 가을여행주간(10.24~11.6)을 만들어놓고 떠나라고, 오라고 권유한다. 나는 내수진작이라는 정부시책도 이해하지만, 본디 해외여행보다 국내여행의 이점을 강력하게 옹호하는 쪽이다.

돈도 절약되지만 내 땅, 내 산, 내 하늘, 내 바다, 내 사람이 나는 좋다. 해외여행은 보고, 사고, 먹는 일에 대한 속박이 휴식과 사색의 틈을 앗아가지만 우리 산야는 나를 해방시킬 넉넉한 틈을 보장해 준다. 북적거리는 국제공항, 바퀴 달린 트렁크, 꽉 차인 일정표보다 고즈넉한 간이역, 배낭 한 개에 빈 수첩이 나는 더 좋다. 낯선 도시의 신기한 견문록보다 우리 시골길에서의 반가운 조우와 우연한 깨달음이 더 좋다. 

가끔 인터넷의 항공뷰로 우리 국토의 이곳저곳을 확대해 들여다보는 버릇이 있는데 거리뷰로 보는 것과 느낌이 아주 다르다. 그럴 때마다 우리 골짜기와 들판과 포구에 아직 내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천지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단 하루라도 좋다. 여행의 맹렬한 충동이 업습한다.  

사람들은 왜 여행을 꿈꿀까. 여행에 대한 명언과 격언이 문득 궁금해졌다. 대문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명문이 전해온다. 대체로 이렇게 요약되었다. “여행이란 결국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주저할 때는 떠나라. 가급적 빈 손으로 혼자 떠나라.”

시인 박노해는 이렇게 읊었다.

여행을 떠날 땐 혼자 떠나라
사람들 속에서 문득 내가 사라질 때
난무하는 말들 속에서 말을 잃어 갈 때
달려가도 멈춰서도 앞이 안 보일 때
그대 혼자서 여행을 떠나라
존재감이 사라질까 두려운가
떠날 수 있는 용기가 충분한 존재감이다
여행을 떠날 땐 혼자 떠나라
함께 가도 혼자 떠나라
그러나 돌아올 땐 둘이 손잡고 오라
낯선 길에서 기다려온 또 다른 나를 만나
돌아올 땐 둘이서 손잡고 오라
(‘여행은 혼자 떠나라’ 전문)

고은 선생은 “온갖 추억과 사전을 버리고, 빈 주먹조차 버리고 떠나라”고 했다. “떠나는 것이야말로 재생을 뛰어넘어 최초의 탄생”이라고 했다.(시 ‘낯선 곳’에서)
사전을 버린다는 건 의미를 버린다는 것이다. 의미는 사람들이 붙인 것이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몸을 싣고 싶은 계절이다. 그 열차는 불현듯 올라타야 한다.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이다. 꼭 요란한 사건만이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적 순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운명이 결정되는 드라마틱한 순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사소할 수 있다. 그런 경험은 소리 없이 일어난다.” (파스칼 메르시어 원작, 동명의 영화 빌 어거스트 감독, 2013년)

한기봉

◆ 한기봉 국민대 초빙교수/언론중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언론보도로 피해를 본 사람과 언론사 간 분쟁을 조정하는 언론중재위원이며, 국민대 언론정보학부에서 글쓰기와 한국 언론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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