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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골목골목 섬살이를, 미술로 섬기는 섬

[김준의 섬섬옥수] 고흥 연홍도

2018.05.01 김준 섬마실 길라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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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홍도는 작년 5월에 다시 태어났다. 600여 명이 살던 섬을 80여명 노인들이 지키고 있지만, 최근 젊은 사람들이 섬을 오가고, 여행객도 크게 늘었다. 전라남도에서 추진한 ‘가고 싶은 섬 가꾸기’ 덕분이다. 무엇보다 젊은 사람들이 오가는 것이 좋다는 마을주민의 말에 섬정책의 방향이 엿보인다.

연홍도는 전라남도 고흥군 금산면 신전리에 속하는 섬이다. 300년 전 밀양박씨가 처음 입도하여 마을을 이뤘다. 넓은 바다위에 떠 있는 연(鳶)과 같다 하여 연홍도(鳶洪島)라고 했다. 고상한 이름을 갖기 전에는 ‘마도’라 했다. 말을 닮은 섬이라 붙인 이름으로 주민들은 ‘맛도’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100여 가구 600여 명이 살 때는 큰동네, 작은동네, 목넘, 선창, 신짐 등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지금은 큰동네, 선창, 목넘에 50여 가구 80여 명이 살고 있다.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거리지만 배를 타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곳이 섬이다. 배를 두 번 타고 버스를 두세 번 타야 닿는 섬이었다.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거리지만 배를 타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곳이 섬이다. 배를 두 번 타고 버스를 두세 번 타야 닿는 섬이었다.

김 양식을 돈으로 바다건너 신전리 간척농지를 매입해 벼농사를 짓기도 했다. 섬 안에는 논이 없고 황토밭을 일궈 고구마, 마늘, 고추 등 밭농사를 짓는다. 김 양식 외에 마을어장에는 바지락이 많이 나며, 다시마와 미역 양식, 멸치잡이를 하는 사람도 있다. 뱃길은 불과 600미터에,  해안선 길이가 4㎞에 불과하지만 섬은 섬이다. 금산면 큰 섬 거금도에 붙어 존재감도 없는 작은 섬이지만 지금은 큰 섬보다 널리 알려졌고, 찾는 사람도 많다.

연홍도에서 바라본 금당도는 자연이 그려낸 수묵화다. 금당별곡으로 소개될 만큼 멋진 경관이다. 연홍도에서 바라본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
연홍도에서 바라본 금당도는 자연이 그려낸 수묵화다. 금당별곡으로 소개될 만큼 멋진 경관이다. 연홍도에서 바라본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

녹동에서 배를 타고 거금도로 들어와 다시 버스를 타고 신전리까지 와서 또 다시 배를 타야 연홍도에 들어갈 수 있었다. 배를 두 번 타고, 버스를 두세 번 타야 오갈 수 있는 섬 속에 섬이었다. 이럴진대 연홍도에 손님이 올 것이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녹동과 소록도를 잇고, 또 소록도와 거금도가 연결되었다. 여기에 연홍도로 가는 배도 새로 지었고, 군내버스가 배 시간에 맞춰 선창에 닿는다. 욕심을 부리자면 끝이 없지만 이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다.

사람이 많이 찾으니 마을에서 운영하는 도선도 운영이 여유롭다. 선창에 내리니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을 ‘뿔소라(원래 이름은 피뿔고둥이다)’다. 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라(고둥)였으면 좋겠지만. 벽화 중에 눈에 눈길을 잡는 것이 박치기의 왕 김일선수다. 경기가 있는 날이면 염치불구하고 TV가 있는 집 앞마당에 모여 보았었다. 거금도 출신이다. 연홍도에도 씨름과 프로레슬링 선수 중에 꽤 알려진 인물들이 있다.

고흥은 일찍부터 장사들이 많았다. 작은 섬에 500여 명이 넘게 살았으니 대부분 일궈 밭농사를 지었다. 먹고 살기 어려워 바다를 논밭처럼 가꾸고 어장일도 허리가 휘도록 했을 것이다. 눈만 뜨면 보이는 건너 마을 너른 논을 얼마나 부러워했을까. 한 집 두 집 한푼 두푼 모아 신전마을의 간척농지를 사들였다.

그때는 어장도 잘되고 농사도 잘 짓게 해달라고 소를 잡아 정성껏 당제를 지내기도 했다. 섬 남쪽 ‘아르끝’으로 가는 길목에 나지막한 당집이 있다. 나이도 들고 당제를 지내기 어렵자  ‘마지막으로 드리는 음식입니다. 많이 드십시오.’라며 인사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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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릉진 섬을 일궈 밭농사를 짓고, 김 양식으로 돈을 모아 바다 건너 뭍에 간척농지를 사들여 농사를 지었다. 물을 길어다 붓고 하늘에서 내리는 비도 모아 밭농사를 지었다.
구릉진 섬을 일궈 밭농사를 짓고, 김 양식으로 돈을 모아 바다 건너 뭍에 간척농지를 사들여 농사를 지었다. 물을 길어다 붓고 하늘에서 내리는 비도 모아 밭농사를 지었다.

골목길에 그려진 섬살이

마을 골목길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교회를 지나 미술관(학교)으로 넘어가는 길, 회관을 지나 미술관으로 가는 길, 남쪽해안을 돌아 미술관으로 가는 길로 나뉜다. 모두 ‘학교 가는 길’이다. 정확하게는 그곳에 학교를 지었다. 마을에서 일정하게 거리를 둔 곳이지만 어느 집도 소외되지 않는 거리와 접근성을 배려한 위치다. 그만큼 섬마을에서 학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그 중 가장 번화가(?)를 택했다. 그 골목에는 볼 것이 많다. 일 년이 채 되지 않았는데 그 사이 전시작품들이 또 바뀌었다. 생선상자를 안방삼아 연홍도 바닷가에 서식하는 조개들이 모두 모였다. 소라(피뿔고둥), 홍합, 맵싸리 고둥, 개조개 등. 저것 하나로도 한두 시간은 이야기를 하겠다. 석쇠에 맛있게 구워지는 생선은 어떤가.

장어통발이 헌 문짝에 걸려 멋진 작품이 되었다. 대나무 가지에 걸린 따개비는 어떤가. 영락없이 봄에 피는 매화나 벚꽃이다. 폐그물에서 떼어낸 부자에 철사를 구부리고 조약돌을 올리니 영락없이 개구쟁이 아이들이다. 낚시를 하고 말뚝박기를 한다. 마을미술관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커다란 조형물보다 골목에 작은 소품처럼 걸린 섬살이 흔적들이 발길을 붙든다. 주민들이 얼기설기 쌓고 깁고 붙인 것들도 있다. 돈 쓰기는 큰 것이 좋지만 발길을 붙드는 것은 돈 들이지 않고 재능기부로 섬살이를 자르고 부친 작은 것이다. 돈을 써야 하는 사람들에게 하찮게 보일지 모르지만, 여행객은 만족도 백배다. 연홍도처럼 작은 섬은 더욱 그렇다. 골목골목 섬살이 흔적이 작품으로 걸린 것은 섬사정을, 섬살이를, 잘 아는 ‘연홍미술관’ 관장 선호남씨 덕분이다.

10여년이 넘게 섬에 살았으니 잠깐 머물며 작업을 한 것과 곁 줄 수 없다. 섬마을미술관의 모델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다. 골목에서 여느 섬이나 마을미술관  작품과 다른 정감을 느낄 수 있다. 연홍도는 골목이 도화지이고 섬이 미술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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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미술관 작품들
골목미술관 작품들.

섬 in 섬, 연홍미술관

골목을 지나 곱게 늙은 소나무를 뒤로 하고 해안을 따라 가면 작고 아담한 학교를 만날 수 있다. 연홍분교다. 선창에서 학교로 가는 길은 아이들이 꿈을 키웠던 길이다. 그 길에 어울리는 작품들이 세워져 있다. 연홍분교는 1946년 공립학교로 설립허가를 받았다. 그리고 1988년 분교로 개편된 후 1995년 문을 닫았다. 그리고 10년 후, ‘연홍미술관’으로 변신해 아는 사람만 아는 ‘섬 in 섬’ 전시회를 개최해 왔다.

연홍도가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은 1998년 폐교된 연홍분교장을 고쳐서 2006년 11월 전국 유일의 섬마을 미술관 ‘섬 in 섬 연홍미술관’을 개관하면서다. 당시 교실 2동을 개조하여 50여 점의 회화작품을 전시하는 전시실을 마련했다. 섬 안에 섬. 인간이라면 모두 자신 안에 작은 섬을 하나쯤은 갖고 산다. 어느 시인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아이들이 떠난 학교는 섬이 되었다. 학교는 섬 안에 작은 섬이다. 연홍미술관을 본 예술가이 그 섬에 빠졌다. 그렇게 ‘연홍회’라는 모임도 만들어졌다. 미술관을 개관한 초대관장 김정만에 이어 선호남이 미술관을 지키고 있다.

미술관에 시련이 닥쳤다. 2012년 남해안에 볼라벤 태풍이 급습을 한 것이다. 해안에 모래와 돌을 운동장으로 옮겨놓고 파도는 지붕을 급습했다. 미술관 안까지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았던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10여 년 동안 가꾼 정원과 운동장에 세워둔 작품은 파도가 휩쓸었다.

처음 미술관을 찾았을 때 ‘미술관 관계자 부재중, 용무가 있으시면 전화바람니다’라며 전화번호가 적혀있었다. 딱히 ‘미술관 관계자’를 만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었으니, 조용히 미술관을 둘러보고 나왔다. 운동장에는 나무를 심고 돌을 놓고, 노력과 시간을 두고 가꿔온 손길이 곳곳에 묻어 있었다. 미술관 안은 50여 점의 그림이 전시 중이었다.

미술관을 지키는 관장을 만난 것은 그로부터 한 참 시간이 지난 후였다. 작은 섬에 미술관이 만들어진 내력도 전해 들었다. 태풍이 오기 전이다. 꿈은 꾸는 자에게만 찾아온다. 연홍도가 전라남도가 추진하는 브랜드 시책사업 ‘가고 싶은 섬’에 선정되었다. 미술관을 가꾼 관장과 예술가들의 노력, 그리고 작은 섬을 잘 지켜온 주민들의 섬살이가 인정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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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라벤 피해 전 연홍미술관
볼라벤 피해 전 연홍미술관.

‘예술의 섬’으로 거듭나기 위해

사람이 많이 찾기 시작하면서 마을식당, 마을펜션도 문을 열었다. 새로 지은 배도 운항을 시작했다. 모두 주민들이 운영하는 것들이다. 주민공동체의 복원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반대로 그나마 남아 있는 마을공동체가 무너질 수도 있다. 그 동안 섬을 지키고 가꾸는 일에 집중하느라 관심을 갖지 않았던 일이 발생하기 시작할 것이다.

새로 문을 연 연홍미술관
새로 문을 연 연홍미술관.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작은 소득이라도 발생하면 나누는 일이 중요해진다. 의사결정구조는 더욱 중요하다. 이해관계가 생겨나게 된다.

연홍도를 찾는 사람들이 꼭 들리는 ‘연홍미술관’을 ‘섬’으로 두어서는 안 된다. 섬이 캔버스라면 미술관은 섬을 채우는 기획자다. 주민이 화가이자 예술가로, 주인공으로 역할을 위해 더욱 중요하다. 미술관은 마을예술창고가 되어야 한다. 그곳을 거점으로 예술가들이 섬으로 들고 나야 하고, 여행객들은 그 결과물을 보기 위해 방문과 재방문으로 이어져야 한다.

꽃씨를 뿌리던 날 만난 연홍도 어머니들
꽃씨를 뿌리던 날 만난 연홍도 어머니들.

주민들이 나서서 연홍미술관을 활성화시키고 지원해야 한다. 그것이 연홍도가 예술의 섬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길이다. ‘가고 싶은 섬 가꾸기’를 추진하면서 연홍미술관을 주목했던 이유다. 지금 그 시점이다. 주민은 미술관을 마을의 보물로, 미술관은 섬을 미술관으로 가꾸는 일에 힘써야 한다.

김준

◆ 김준 섬마실 길라잡이

어촌사회 연구로 학위를 받은 후, 섬이 학교이고 섬사람이 선생님이라는 믿음으로 27년 동안 섬 길을 걷고 있다. 광주전남연구원에서 해양관광, 섬여행, 갯벌문화, 어촌사회, 지역문화 등을 연구하고 정책을 개발을 하고 있다. 틈틈이 ‘섬살이’를 글과 사진으로 기록하며 ‘섬문화답사기’라는 책을 쓰고 있다. 쓴 책으로 섬문화답사기, 섬살이, 바다맛기행, 물고기가 왜, 김준의 갯벌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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