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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지엔키 공원에서 들려오는 쇼팽의 피아노 음악

[정태남의 클래식 여행] 폴란드/바르샤바(Warszawa)

2018.06.12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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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의 쇼팽 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 공항 이름이 자꾸만 입에서 맴돈다. 폴란드 사람들에게 음악가 쇼팽은 우리로 치면 이순신 장군과 같은 존재이다.

바르샤바 중심가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쇼팽의 성역’을 둘러보기 위해 와지엔키 공원으로 향한다. 이 공원은 워낙 방대하여 다 둘러보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천천히 산책하고, 풀밭에 누워서 흘러가는 구름을 보거나, 야외 음악회가 있으면 귀를 기울이며 느긋한 삶을 즐긴다.

이 공원 입구 쪽 지대가 높은 곳에는 벨베데르 궁이 푸른 관목 사이로 하얀 모습을 드러낸다. 이 궁은 원래 1660년에 세워진 것이나 19세기 초반에 새롭게 단장해 러시아 총독궁으로 사용됐으며 1989년에서 1994년까지는 폴란드 대통령의 관저로 사용되기도 했다. 

쇼팽의 어린시절의 추억이 담긴 와지엔키 공원에 있는 ‘쇼팽의 성역’.  쇼팽 기념상은 바르샤바의 아이콘이다.
쇼팽의 어린시절의 추억이 담긴 와지엔키 공원에 있는 ‘쇼팽의 성역’. 쇼팽 기념상은 바르샤바의 아이콘이다.

벨베데르 궁 북쪽에는 연못과 관목과 꽃으로 단장된 ‘쇼팽의 성역’이 있다. 연못가에 세워진 쇼팽기념상은 예술사적으로 보면 아르누보와 상징주의가 융합된 양식이다. 쇼팽은 바람에 휘날리는 버드나무 가지 아래에 앉아 음악적 영감에 젖어있는 모습인데 버드나무 가지는 그의 손가락을 상징한다.

그런데 버드나무 가지는 왠지 휘몰아치는 바람에 휘날리는 것 같다. 또 낭만주의 음악의 꽃을 피웠던 그의 얼굴표정은 곧 폭발할 듯 매우 격정적으로 보인다. 

쇼팽은 7세 때 대중들 앞에서 연주회를 가졌고 심지어 폴로네즈 G단조와 B플랫 장조 두 곡을 작곡했다. 바르샤바의 귀족들은 앞다투어 신동 쇼팽을 초대해 응접실에서 연주하도록 했다. 당시 폴란드를 지배하던 러시아의 총독 콘스탄틴 대공도 그를 벨베데르 궁으로 초대하곤 했다.

쇼팽은 콘스탄틴 대공의 아들과 함께 놀기도 했고 가끔 고뇌에 빠진 콘스탄틴 대공을 위해 피아노 연주로 위로해주기도 했다.(대공은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동생이었다.) 그후 성장해 바르샤바 음악원을 마친 쇼팽은 20세 때 더 넓은 세계를 보기 위해 고국을 떠나 오스트리로 향했다.

그런데 그가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도착한지 한 달도 되지 않아 폴란드에서 러시아 지배에 항거하는 대대적인 민중 혁명이 일어났다. 그후 파리에 정착한 쇼팽은1849년 10월 17일에 39년의 삶을 마감할 때까지 그토록 그리던 조국 땅을 다시 밟지 못했고 또 외세로부터 독립한 조국의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음악적 영감에 젖어있는 모습의 쇼팽. 그의 얼굴표정은 곧 폭발할 듯 매우 격정적으로 보인다.
음악적 영감에 젖어있는 모습의 쇼팽. 그의 얼굴표정은 곧 폭발할 듯 매우 격정적으로 보인다.

쇼팽기념상은 바르샤바의 아이콘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이 기념상에도 폴란드의 격동의 역사가 담겨져 있다. 19세기 후반 바르샤바의 음악협회는 쇼팽기념상 건립계획을 세웠으나 러시아의 폴란드 탄압 정책 때문에 불가능했다.

그러다가 1901년 폴란드의 유명한 오페라 가수 소프라노 볼스카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앞에서 노래했는데 그녀의 노래에 매료된 황제는 그녀에게 원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바르샤바에 쇼팽의 기념상 건립을 허가해 달라고 했고 황제는 이를 승낙했다.

그녀는 바르샤바로 돌아와 쇼팽기념상 건립추진위원회를 발족했다. 이리하여 쇼팽탄생 100주년이 되는 1910년 제막예정으로 공모전을 열어 66명의 경쟁자 중에서 시마노프스키가 선정됐다. 심사위원 중에는 프랑스의 유명한 조각가 브루델도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관변 미술협회는 시마노프스키의 작품이 전통에서 너무 벗어난 형상이라는 이유로 제동을 걸었다. 게다가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기념상 제작은 무기 연기되고 말았다.

쇼팽이 어린 시절 러시아 총독을 위해 연주했던 벨베데르 궁.
쇼팽이 어린 시절 러시아 총독을 위해 연주했던 벨베데르 궁.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폴란드는 비로소 독립국가가 되었다. 이 기념상은 1926년에 완성돼 그해 11월 27일 폴란드 공화국 대통령을 비롯한 사회각계의 요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국적 축제 분위기 속에서 제막됐다. 하지만 그 환희는 오래가지 못했다. 1939년 폴란드를 전격 침공한 나치 독일군은 폴란드의 민족혼을 말살하기 위해 쇼팽기념상을 폭파하고 그 파편을 모두 녹여 무기를 만드는 데 사용했다.
 
전쟁이 끝나고 폐허를 딛고 일어서려는 폴란드는 쇼팽 기념상을 원래 모습 그대로 다시 세우기로 했다. 하지만 독일군이 기념상의 작은 복사본도 있는 대로 모두 파괴했기 때문에 원래 모습을 복원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와중에 다행히도 전쟁의 폐허 속에서 기록사진들과 조각가 시마노프스키가의 파괴된 집의 지하에 숨겨져 있던 원본 틀이 우연히 발견됐다.

이를 바탕으로 다시 원래대로 제작해 1958년에 이 자리에 다시 세웠던 것이다. 그 다음해 여름에는 매주 일요일 오후에 쇼팽기념상 아래에서 쇼팽 음악 연주회를 개최했다. 이 전통은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져, 5월에서 9월까지 일요일마다 정오에서 오후 4시까지 이곳에서 쇼팽의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  

정태남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미술·언어·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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