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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을 깎으며

2017.12.21 한기봉 국민대 초빙교수/언론중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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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에 앉아 연필을 깎는다. 책상에 앉으면 노트를 펼치고 필통에서 연필과 칼부터 꺼내드는 게 오랜 버릇이다. 선물받은 고급 볼펜과 만년필이 있지만 서랍 속에서 잠잔 지 오래다. 정확히 언제부터인가는 모르겠는데 나는 연필이 참 좋다. 어느 회의나 세미나를 가도 주최 측이 내놓은 연필만은 챙겨온다.
 
연필에 칼을 댄다. 사각사각 뽀얀 나뭇결이 드러나며 연필밥이 동그랗게 말린다. 미세한 나무향이 풍겨온다. 깎인 부위와의 경계에 피어난 손톱 같은 칼자국은 둘레와 길이가 균등해야만 마음이 안정된다. 드디어 칼날이 연필심을 살짝살짝 벼린다. 금속과 흑연의 한판 대결, 그 떨리는 손맛이 나는 좋다. 너무 힘을 주면 심이 패거나 가늘어진다. 엄지가 적당한 압력으로 부드럽게 칼등을 밀어주어야 연필심은 굵기와 길이가 아름답게 빛난다. 소소한 행복이다.

저녁상을 물리고 따뜻한 아랫목에 앉은뱅이 책상을 끌어와 숙제를 하노라면 아버지나 어머니가 곁에서 연필을 깎아 주셨다. 어린 눈에 아버지의 연필 깎는 솜씨는 최고였다. 어두운 전등 아래서도 마치 기계로 깎은 듯 질서정연하고 정갈했다. 그 시절 연필은 품질이 떨어졌다. 나뭇결마다 단단함이 다르고 심이 물러서 칼이 리듬을 못 타면 나무는 푹푹 잘려나가고 촉은 울퉁불퉁해졌다. 심의 점도는 약해서 침을 묻혀가며 글씨를 썼다. 만화가 그려진 외제나 향나무 냄새가 풍겨오는 고급 연필을 쓰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아버지는 연필 쥐는 법부터 깎는 법, 몽당연필을 늘려 오래 쓰는 방법을 가르쳐주셨다. 다시 돌아갈 수 없다.

미국 만화가 데이비드 리스라는 사람이 쓴 ‘연필 깎기의 정석’(2013년 국내 출간)이란 책이 있다. 세상에 할 일이 그리 없어서 연필 깎는 기술을 연마했을까. 시대착오적이고 하찮게 보이는 기술이지만 그는 매우 진지하다. 책을 읽다보면 가장 보잘 것 없는 일이 때로는 가장 심오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 삶에서 연필 한 자루 완벽하게 깎는 것조차 기실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물론 연필로 글을 쓰지는 않는다. 지금도 컴퓨터 모니터를 원고지 삼아, 손가락과 키보드를 연필 삼아 이 글을 쓴다. 원고지에 글을 쓰면 보내기도 어렵고 받는 사람도 난감할 테니. 하지만 책상에는 오랜 기간 애호한 브랜드의 연필 몇 자루와 노트가 자리잡고 있다. 컴퓨터를 켜기 전, 천천히 연필을 깎는 행위는 흐트러진 마음과 자세를 작업 모드로 변환시키는 나만의 준비동작이자 경건한 의식이자 짧은 몇 분의 명상이다. 그게 없으면 글이 안 나간다. 뾰족해진 연필로 글의 소재나 꼭 쓰고 싶은 단어, 글 구성을 이것저것 노트에 써놓고 나서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그러다 생각이 떠오르면 또 연필을 들어 메모를 한다. 글 노트에 낙서도 하고 줄도 긋고 중요 표시도 하고 동그라미도 친다. 모니터와 키보드에는 연필과 공책이 주는 그런 여백과 섬세함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연필을 애호하는 사람이 무조건 좋다. 지인의 사무실에 갔을 때, 데스크탑 옆에 몰스킨 다이어리가 있고 그 위에 고급스럽고 클래식한 파버카스텔 연필 몇 자루와 지우개가 무심히 놓여있으면 그 사람이 왠지 다시 보인다. 날카로운 심을 보호하는 멋진 포인트 가드까지 덧씌워있다면 더 좋다. 아, 이 사람도 나처럼 연필을 사랑하는구나, 내 부류구나, 연필 한 자루가 동질감과 유대감을 준다.   

세계의 대문호 중에는 연필 예찬론자가 많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자신의 집필량을 사용한 연필 개수로 가늠했다고 한다. 그의 일기에는 “오늘도 연필 일곱 자루를 해치웠다”라는 대목이 있다. 존 스타인벡은 마음에 드는 연필을 찾아 헤맸다. 그가 가장 좋아한 연필은 ‘손힘은 절반, 속도는 두 배’라고 연필 몸통에 씌여있는 블랙윙 602였다. 그가 그 연필을 쓰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이런 글을 남겼다.
“새 연필을 찾아냈어. 지금껏 써본 것 중에 최고야. 물론 값이 세 배는 더 비싸지만 검고 부드러운데도 잘 부러지지 않아. 아마 이걸 항상 쓸 것 같아. 정말로 종이 위에서 활강하며 미끄러진다니까.”

‘롤리타’의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그의 마지막 소설 ‘할리퀸을 보라’에서 이렇게 끝을 맺는다. “난 네가 부드럽게 만지작거리던 블랙윙 연필의 각진 면을 쓰다듬었다.”
반 고흐는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연필은 이상적이라고 할 만큼 단단하면서도 매우 부드러워. 재봉사 소녀를 그릴 때 이 연필을 썼는데 석판화 같은 느낌이 정말 만족스러웠어. 부드러운 삼나무에 바깥에는 짙은 녹색이 칠해져 있지. 가격은 한 개에 20센트밖에 하지 않아”라고 썼다. 고흐를 만족시킨 연필은 블랙윙 602와 쌍벽을 이루는 파버카스텔 9000이다.

소설가 김훈은 여전히 디지털 활자를 배격한다. 그는 연필과 지우개가 없으면 글을 한 자도 쓸 수 없다고 고백했다. 주로 독일 스테들러 연필을 쓴다고 한다. “연필로 쓸 때 온몸이 글을 밀고 나가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그의 작품은 ‘육필 원고’이자 ‘육향’인 것이다.
“내 책상 위에는 저녁마다 지우개 가루가 눈처럼 쌓이고 두어 장의 원고가 늘어난다. 인생은 고해인 것이다.”

연필 예찬을 해본다. 연필은 가장 저렴한 필기구다. 동아연필 문화연필 모나미 같은 평범한 국내산 연필 한 다스는 1000원~2000원이다. 외국의 명품 브랜드로 꼽히는 블랙윙이나 파버카스텔, 스테들러의 마스루모그래프, 스위스우드의 카렌다쉬. 포르투갈의 비아르쿠, 체코의 코이누르 같은 브랜드는 한 다스가 2만~3만 원 선이다. 자루 당 2000원 언저리다. 하지만 작은 사치에 비해 그 호사감은 크다.

연필은 금속이나 플라스틱성의 만년필이나 볼펜이나 샤프처럼 차갑지 않다. 나무를 쥐면 어린 시절과 아련히 연결되어진 따스한 느낌이 든다. 연필은 오감이다. 하얀 종이에 연필로 글을 써내려갈 때는 오감이 확장된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에 첫 발자국을 내는 거 같다. 명품 연필과 질 좋은 종이가 마찰하며 내는 마른 낙엽 스치는 듯한 소리, 연필을 따라 올라오는 삼나무나 향나무의 아련한 향, 손에 쥐었을 때의 부드러운 단단함…. 시각과 청각과 후각과 촉각이 조화를 부리며 얼음처럼 굳은 머리를 서서히 녹인다.

연필은 쓰고 지울 수 있어서 사적이다. 그래서 은밀하다. 평생 지운 게 많다. 수없이 고뇌하고 후회한 내 삶과 생각의 궤적을 아는 놈이다. 사실 꼭 연필이 아니어도 좋다. 나에게 맞는 최고의 필기도구를 만난다는 건, 어쩌면 일생의 배우자를 만나는 것과 같은 선택이다.

어떤 물건은 때로 필요성보다 감성적 가치로 존재한다. 그래서 펜과 종이의 효용가치가 사라져가는 시대에 연필과 만년필이나 다이어리 같은 아날로그 필기류가 여전히 팔린다. 전구가 발명되었어도 양초는 사라지지 않았고, 음원의 시대에도 레코드판은 살아남았다.

한 해를 보내며 서랍에서 연필들을 꺼내 깎는다. 긴 놈, 짧은 놈, 둥그런 놈, 각진 놈, 이 색, 저 색, 각양각색의 연필들이 제 몸이 닳리고 깎여왔다. 연필의 소명은 소멸이다. 연필은 다른 필기구와 달리 흔적 없이 소진된다. 삶의 길이가 세월의 파도에 부딪쳐 조금씩 짧아지며 소멸되어 가듯, 연필은 우리 삶과 닮았다.

한기봉

◆ 한기봉 국민대 초빙교수/언론중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언론보도로 피해를 본 사람과 언론사 간 분쟁을 조정하는 언론중재위원이며, 국민대 언론정보학부에서 글쓰기와 한국 언론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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