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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일봉 “영화는 내 삶의 전부…인생의 스승”

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가고파’ 등 120편 출연한 한국영화 산증인

1957년 한국 첫 홍콩 합작 영화 출연…“지금도 영화 생각하면 가슴 뛰어”

2012.11.27 문화체육관광부 국민소통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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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고의 노력으로 한국 대중문화를 빛내며 오늘의 한류 열풍이 있게 한 영광의 얼굴들을 기리는 ‘2012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시상식’이 지난 19일 개최됐다. 대중문화예술인들에게 최고의 영광된 자리인 이날 시상식에서 1950~70년대를 풍미하며 한국 영화계 간판배우로 활약한 원로배우 윤일봉 씨가 영화계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은관 문화훈장을 수훈했다. 우리나라 대중문화예술 발전에 큰 획을 그은 한국영화계 거장이 말하는 인생과 예술세계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자. (편집자)

강한 카리스마와 이국적인 마스크로 1950∼70년대를 풍미하며 한국 남성상을 대변했던 영화배우 윤일봉 씨(78). 1948년부터 현재까지 총 120여편에 출연하며 오랜 시간 대중들에게 변함없는 ‘스크린의 신사’로 남아있는 그가 지난 19일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 시상식에서 은관 문화훈장을 받았다. 

한국 영화계의 거장 배우 윤일봉 씨는 지난 19일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 시상식에서 은관 문화훈장을 받았다.
한국 영화계의 거장 배우 윤일봉 씨는 지난 19일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 시상식에서 은관 문화훈장을 받았다.
원로배우 윤일봉 씨는 1948년 데뷔한 이래 다양한 장르의 한국 영화에 출연하며 굳건히 자리를 지켜온 한국 영화계의 산증인이다. 그는 신영균, 남궁원과 1950~70년대 한국영화발전을 이끈 3대 배우로 꼽히며 한국영화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린다. 1967년 영화 ‘애하’로 제6회 대종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했으며 1972년과 1977년에도 영화 ‘석화촌’과 ‘초분’으로 청룡영화상과 대종상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1984년에는 영화 ‘가고파’로 대종상 남우 주연상을 수상하며 영화계에 이름을 남겼고 2008년엔 제16회 이천 춘사대상영화제에서 ‘아름다운 영화인상’을 받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았다.

1950~70년대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배우 윤일봉 씨를 지난 22일 충무로의 한국영화배우협회에서 만났다.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윤일봉 씨의 큰 풍채에서 뿜어져나오는 살아있는 눈빛과 표정은 보는 사람을 압도했다. 그는 한국영화사(史)를 대변하는 거장답게 카리스마를 발산하며 영화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털어놓았다.

“당시 먹고 살기 참 힘들었어요. 영화를 제작하는 게 사치라고 여겨지던 시절이죠. 부모형제 마저도 영화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때였어요. 우리나라 문화를 전 세계에 알리는 일을 한다는 자부심 하나로 지금까지 영화인생을 살아오는 데 큰 힘이 됐죠.”

그가 영화계에 첫 발을 내딛은 것은 1948년 철도 다큐영화에 참여하면서 부터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윤 씨는 어느 날 학교로 찾아온 안철영 감독과 이용민 감독 등에게 캐스팅돼 영화에 출연했으며 같은 해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 영화’라는 타이틀을 달고 제작된 ‘푸른 언덕’에 출연, 스크린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됐다.

그 이후 윤일봉 씨는 본격적으로 연기를 하기 위해 방송과 영화를 넘나들며 바쁘게 지냈다.

“지금은 어딜가서든 연기를 배울 수 있지만 그 당시 연기학원이나 연영과 자체가 없었잖아요. 연기의 폭을 넓히기 위해 방송생활도 했었죠. 당시에는 라디오 드라마가 큰 인기를 얻던 시기였어요. 라디오 드라마에서 배역을 맡아 목소리로 연기하며 배우생활을 차근차근 시작했죠.”

그는 20세가 되던 해인 1953년, 전쟁의 참화를 딛고 만들어진 정창화 감독의 데뷔작 ‘최후의 유혹’에 출연했다. 그는 “전쟁통에 영화를 만드는 일이 무척 힘든 일이었으나 스텝들 모두 힘을 모아 영화를 만들었다”고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최후의 유혹’ 조감독으로는 리얼리즘 영화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오발탄’(1961)의 유현목 감독이 참여했다. 단편영화 ‘해풍’으로 유현목 감독과 인연을 맺었던 윤일봉 씨는 정창화 감독에게 유현목을 소개해줬다. 이로 인해 유현목 감독에게 ‘최후의 유혹’은 영화계 입문작이 됐다.

이후 1955년 윤일봉 씨는 민경식 감독의 ‘구원의 애정’이라는 영화를 통해 극영화 첫 주연을 맡게 됐다. 그는 “6.25 전쟁으로 어려운 시절을 살았던 우리 민족의 이야기”라며 “현재를 살아가는 후배들이 시대의 아픔을 그려낸 영화를 통해 우리나라의 역사를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는 1957년 우리나라 최초로 홍콩과 합작 영화에 출연하며 본격적으로 ‘한류’ 진출을 시도했다.

“당시 아시아 굴지의 영화사인 홍콩 쇼브라더스와 합작영화인 ‘이국정원’에 참여했어요. 그 때 배우 김진규, 최무룡 등과 함께 열연했지요. 겨울연가 등 한국 드라마로 지금의 한류 열풍이 시작됐다고 하는데 사실상 한류진출 노력은 이때부터 시작됐어요. 한국영화에 대해 아무도 관심없던 시절, 배우들과 스텝들이 나서서 해외에 우리나라 영화를 알렸죠.”

1950~70년대를 풍미했던 한국영화계의 살아있는 전설 배우 윤일봉 씨.
1950~70년대를 풍미했던 한국영화계의 거장, 배우 윤일봉 씨.
그는 60년대 이후 한국전쟁에 참전한 용사들의 치열한 전투 과정과 분단의 아픔을 그린 김기덕 감독의 ‘5인의 해병’(1961),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1961)’, 김기덕 감독의 ‘맨발의 청춘(1964)’ 등에서도 열연했다.

1967년 윤일봉 씨는 이형표 감독의 ‘애하’로 제 6회 대종상영화제 남우조연상을, 1972년에는 정진우 감독의 ‘석화촌’으로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1974년 한국영화 미국 첫 로케작품인 강범구 감독의 ‘황혼의 맨하탄’, 1975년 정소영 감독의 ‘애수의 샌프란시스코’에 출연한 그는 같은 해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에 출연했다. 멜로, 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 출연하던 그는 1977년 ‘내가 버린 여자’, 1979년 ‘내가 버린 남자’로 흥행몰이를 한다.

한 평생 살아온 한국영화사의 숱한 기억들을 회상하며 그는 40년 전 이야기를 정확하게 짚어냈다. 윤일봉 씨는 군더더기 없는 노련한 말투로 대화를 이어갔다.

“당시의 30만~40만은 지금의 700만~800만 관객 동원수와 맞먹거든요. 1977년 명보극장에서 개봉한 ‘내가 버린 여자’는 40여만 관객이 봤지요. 79년 ‘내가 버린 남자’도 28만 가까이 들었고요. 1980년 변장호 감독의 ‘미워도 다시 한번 80’으로 또 한번 크게 흥행몰이를 했어요. 당시 꽤 많은 인기를 얻었지요.”

80년대를 넘어가며 그는 1984년 곽정환 감독의 영화 ‘가고파’에 주연으로 출연하면서 제23회 대종영화제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배우로 연기력을 크게 인정받은 그는 영화제작에도 참여해 1986년 ‘먼 여행, 긴 터널’과 1988년 ‘그 마지막 겨울’ 등 영화 두 편을 제작했다.

한국영화계의 산증인인 배우 윤일봉 씨가 꼽은 우리 영화사의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일까.

그는 1990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남북한영화제’라고 대답했다. 강대선 한국영화업협동조합 이사장을 비롯해 배우 윤일봉, 태현실, 장미희 등이 남측 영화계를 대표하며 뉴욕에서 북한 영화 관계자들을 만났다. 윤일봉 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념을 초월해 통일을 염원하는 의미로 마련된 자리에 초청된 것이라 의미가 깊어 이후로도 남북한 교류를 추진하려 했으나 지속되지 못했다”면서 아쉬움을 전했다.

60년간 연기생활을 하면서 애착이 가는 영화를 꼽아달라고 하자, 1984년 제23회 대종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은 ‘가고파’라는 작품을 꼽았다.

“당시에는 영화 제작편수가 턱없이 부족했던 시절이라 지금처럼 내 입맛에 맞는 작품을 고를 처지가 못됐어요. 서로 돕는 의미로 영화에 출연했었죠. 힘든 시절 다함께 동고동락하며 참여한 작품이라 한편 한편 애착이 가요. 굳이 한편을 꼽으라면 힘든 우리 시대상을 잘 반영한 ‘가고파’라는 영화를 꼽고 싶네요. 상을 받아서 기억에 남는다기 보다 영화에 담긴 메시지가 큰 울림을 주거든요. 힘들었던 우리 민족의 아픔을 작품에 잘 담았어요. 정영숙, 박근형, 황정순 등 함께 열연한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했고요.”

윤일봉 씨는 지난 19일 오후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열린 2012 대한민국 대중문화 예술상 시상식에서 대중문화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은관 문화훈장을 받았다.
원로배우 윤일봉 씨는 지난 19일 오후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열린 2012 대한민국 대중문화 예술상 시상식에서 은관 문화훈장을 받았다.

윤일봉 씨는 지난 19일 오후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열린 2012 대한민국 대중문화 예술상 시상식에서 대중문화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은관 문화훈장을 받았다. 소감을 묻자 그는 영화계 선배들이 고생한 공을 대신해 받는 것이라며 겸손함을 잊지 않았다.

“이번에 은관 문화훈장이란 큰 상을 주셔서 받게 됐는데, 어려운 시절 함께 고생했던 선배들을 대신해 받는 상이라고 생각하고 싶어요. 영화계 선배들이 다같이 고생하면서 일궈낸 한국영화를 앞으로도 후배들이 잘 이끌어줬음 하는 바람이죠.”

지금까지 한국영화계의 거물이자 큰 어른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배우 윤일봉 씨는 영화는 여전히 꿈이자 삶의 원동력이라며 화답했다. 하고 싶은 일을 물어보니 “머릿속에 그려지는 장면들이 무궁무진하다”고 답했다.

“지금도 영화 현장에서 들려오는 ‘레디 고’ 듣고 싶은 마음은 지금도 변함 없어요. 영화현장의 소리는 언제나 두근거리죠. 카메라 앞에 서서 표현한다는 일이 얼마나 멋져요.(웃음) 영화는 제 삶의 전부이며 인생의 스승과 같은 존재예요. 영화를 통해 인생의 희노애락을 느끼며 살아왔고 배우로서 살아온 세월에 대한 자긍심을 갖고 살고 있어요.”

한국영화계의 거대한 산처럼 든든하게 우리나라 영화의 중심을 지켰던 윤일봉 씨. 마지막으로 그는 한국 영화의 미래를 책임질 젊은 후배들을 향한 애정어린 조언을 잊지 않았다.

“최근엔 코디와 매니저도 있고 영화스텝들도 많아져 제작환경이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어요. 1950~60년 당시 누가 배우 스케줄을 관리해 줬겠어요. 현장에서 더위와 추위, 배고픔과 싸우던 시기였죠. 지금과 같은 환경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예요. 선배들이 땀흘려 고생한 노력이 초석이 됐다고 봐야겠죠. 영화인으로 긍지와 책임감을 갖고 말 한마디에도 조심할 줄 아는 후배들이 많아져 한국영화의 미래를 밝게 빛내줬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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